오태석의 창작활동을 중심으로 I
서연호 / 고려대 교수
1980년 이후의 작품들
서연호 : 실로 오랜만에 오형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게 됐군요, 대개 공연이 끝나면 주점에 앉아 연극계 선후배의 입장에서 혹은 창작가와 관객의 입장에서 진담 반 농담 반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귀가해버린 것이 25년여의 세월입니다. 「불효자는 웁니다」연습 도중에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주로 그 동안에 발표된 개별적인 작품들을 중심으로 해서 오형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최근의 작품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오태석 : 크게 보아 80년대 이후와 이전으로 나누어 이야기할까요? 내가 미국을 갔다 오기 전과 갔다 온 뒤가 전혀 틀리다는 입장이거든요. 미국 가기 전에는 본래 우리의 전통극이 연극의 본질이랄까 형식이랄까 이런 것을 너무 잘 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연극의 형식이나 극장이나 희곡이라는 개념도 그렇고, 이런 것들이 전부 서구에서 왔으니까 이런 것들을 모두 배워야 되는, 따라가야 되는, 그런 것으로 연극이 이해되었단 말이지요. 1979년에 브로드웨이에 가서 한 7개월 동안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들이 내노라 하는 것이고, 다 대단한 물건이란 말이지. 거기서 이를테면 동구 쪽 헝가리 연극, 체코 연극, 폴란드 연극 등을 보면서 이쪽 우리 것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구요, 내가 가지고 있는 유산이라는 게 어느 정도의 규모이고 어느 정도로 대단하다 하는 발견을 하게 된 거죠. 브로드웨이에서 서구연극의 실체, 그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의문이 풀린 거지. 그리고 아, 할 일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연호 : 1979년 가을에 귀국해서 「사추기」를 공연하였는데, 무척 흥미 있게 본 공연이었습니다. 새로운 발상과 메커니즘들이 복잡하게 얽힌 형태로 기억납니다. 어쨌든 그리고 나서 오형의 작품은 크게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지요. 전통의 탐구랄까. 재창조랄까 하는 방향으로 .......,
오태석 : 우리가 한 세기 가깝게, 구한말에서 지금까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살았지요. 5백년이나 이어온 조선왕조가 망하고, 창씨개명까지 당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몰상식한 군부에 의해 유린당하며, 어두운 진흙 속에서 살아왔지요.
서연호 : 그러다 보니 시야도 좁아지고 생각도 옹졸해지고 감정도 혼탁해지게 된 것이 아닌가요.
오태석 : 오랜 동안 비극 속에서 살다보니, 우리가 5천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를 이끌어 온 저력이 있었음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지요. 그걸 뚫고 온 어떤 숨결이 있었을 것이고, 어떤 정신이 있었을 것인데, 지난 일세기는 우리가 지덕이나 음덕이 가장 쇠하여져서, 그러한 저력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전통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를테면 산대나 판소리 등이 지니고 있는 찬란함, 해학이라든지 의외성이라든지, 말의 흐름의 완급, 완급의 뛰어난 조절능력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살아날 수 있는 구조, 그런 것들이 살아날 때, 우리 연극언어도 탱탱하게 생생해진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자꾸 취하게 됩니다.
서연호 : 말하자면 전통극의 구조 찾기와 연극언어 찾기를 새로 시작한 셈인데. 구체적으로 작품활동과 연계시켜서 설명해 주시지요.
오태석 : 이를테면 「자전거」(김우옥 연출, 1983, 오태석 연출, 1986)라든가,「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92)같은 건 산대놀이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서연호 : 산대놀이의 구조를 바탕으로 했다는 말이군요.
오태석 : 사실「백구…」같은 건한 십여 년 작업을 해야 하겠지요. 실외에서 연희되는 것이 본바닥이고, 그 뛰어난 연희성이라든가 활달함, 색깔, 그런 것들을 생명력 있게 즐기려면 밖으로 나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고, 오랜 작업을 하다 보면, 실내에서도 실외에서 노는 맛, 다시 말하면 산대의 맥이랄까, 색깔이랄까, 움직임이라고 할까, 이런 것들을 충분히 살려가며 연희할 수 있겠지요.
서연호 :「부자유친」(1987, 1992)은 고전소설 「한중록」의 현대적 해석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의도대로 잘 됐다고 생각합니까? 첫 번째 공연과 두 번째 공연에서 다른 체험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태석 :「부자유친」같은 경우가 이를테면 내가 의도하는 작업의 일환인데, 그 놀아진 구조는 산대의 구조거든요. 산대의 정신을 바탕에 깔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무대상의 곳과 때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잖아요. 산대를 차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야기지요.
서연호 : 그게 의도대로 된 부분이라는 말입니까?
오태석 : 그 점은 그렇지요. 그런데 그 안에서 부자간에, 부와 자의 애증의 깊이가 더 천착되어야 하지 않았는가, 그 점이 내가 짧은 거지. 부가 정말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을 미워했는지, 자는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손을 봐야 하겠지요. 그 안에 내재된 심리적인 질곡을 파헤치는 것보다 무대상의 연희성에 많이 더 치우치지 않았는가. 충분히 여과시키고 녹이고 삭히지는 못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서연호 :「백마강 달밤에」(1993)는 어땠어요? 준비할 때의 느낌하고 실제 공연되었을 때의 느낌하고, 여러 가지 시비가 많았던 작품인데, 그런 것에 관계없이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
오태석 : 우리가 제사지낼 때 왜 흠향이라고 하잖아요. 고인에게 잡수시도록 한다는 의식이지요. 이렇게 이쪽에서는 저쪽을 향해 앉아 있는데, 저쪽의 얘기는 들을 수가 없잖아요. 답답하겠지. 그러니까 저쪽에도 좀 쫓아가서 '당신은 지금 어떻게 지내시오' 하는 식으로 저쪽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 「백마강…」의 시작이었습니다.
서연호 : 이승과 저승의 이야기 구조가 어딘가 제대로 맞물리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태석 : 그러니까 저승, 명부에 갔을 때의 상상력이 좀 유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명부 쪽의 상상력이 짧았다 부족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단테의 「신곡」같은, 서구적인 명부가 아니었는가, 그게 내 솔직한 고백이지요, 우리의 명부는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의 심성에 와서 딱 떨어지는 그런 명부가 아니라, 서구적인 명부가 아니었나 합니다.
전통의 발견과 재창조
서연호 : 이제부터 오형이 한국인의 명부를 분명하게 찾아 놓아야지요.「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1991)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오태석 : 내가 정확히 본 건지는 모르지만, 심청이 물에 빠진 다음에 다시 올라오는 게 3년 만이에요. 돌아가신 분 보낼 때도 삼 년이 걸려요. 탈상할 때 말이에요. 여기서 가는데도 삼 년, 그쪽에서 오는 데도 삼 년. 이 삼 년 동안 심청이가 저쪽에서, 그러니까 명부에서 무엇을 했겠느냐. 대단히 심심했겠다. 그렇다면 심심풀이 겸 그대 좀 세상에 잠깐 나와서 이러구 돌아가는 걸 좀 봐라. 이것이 작품의 시작이죠.
서연호 : 오형이 만든「심청이 …」에서는 우리가 좀 알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그게 뭐냐하면, 우리「심청전」이 가지고 있는 신화적인 구조가 있잖아요? 심청이가 물에 빠졌다가 다시 환생을 해서 왕후가 되가지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잖아. 그런데 오형의 작품에는 그 환생구조가 안 보인단 말이에요. 심청이가 명부에 있는 삼 년 동안 육지에 올라왔다가 다시 물로 투신하는 얘기, 그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환생구조는 인정하되 일부러 생략한 것이냐, 아니면 두 번 빠지는 행위 자체를 통해 새로운 상징을 시도한 것이냐 하는 의문입니다.
오태석 : 아니, 그러니까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것, 그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 거죠, 무슨 얘기냐 하면 심청이의 행위를 통해서 지금의 이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
서연호 : 내 얘기가 바로 그겁니다. 아버지는 안 나와도 심청이가 하는 짓은 우리 관객으로 하여금 눈을 뜨게 만든다, 그거지. 눈을 뜨게 하는 그것이 말하자면 아버지의 모티브하고 통하느냐 그 얘기야.
오태석 : 아버지 모티브랑 통하는 거지.
서연호 : 알겠어요. 그러면 이제 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작가의 입장에서 좀 수정을 할 생각은 없으세요?
오태석 : 심청이가 뛰어들게 되는 요인이 좀더 큰걸 싸안구 뛰어들어 주었으면 좋을 뻔했는데 그게 축소가 되지 않았는가. 단지 불행하게 된 여자들의 이야기 정도로…… 그러니까 용두사미가 되었다. 이 말예요.
서연호 : 그건 오형의 겸손의 말씀이고, 정말 오형이 앞으로 더 의미 있는 심청이를 그려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지.「자전거」는 두 차례 공연되었고, 모두 재미있게, 감명 깊게 본 공연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태석 : 내가 6·25를 열 한 살 때 겪었단 말이죠. 어린 눈으로 보았지만, 겪은 것을 오늘에 전해줘야 하고, 그것을 어떤 모양새로든지 자꾸 펴놓아야 한다. 그런 입장인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자전거」지요. 6·25가 벌려 논 아픔이 아직까지 상존하고 있다는 걸 제시하고 싶었어요. 6·25때 부서진 모든 것들이 다시 메워진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그런 아픔이 아니냐, 그것이 문둥이의 아픔으로 제시가 된 거지요. 자식을 낳았으되 같이 살 수 없는 것, 남의 호적에 올려서야 학교를 보낼 수 있고……그 유리, 자식까지도 자기 걸로 할 수 없는, 그러니까 내가 네 아비다 하면 안 되는, 어떤 천형 같은 그런 고통 속에 지금 우리가 있다. 그것이 대체 뭐냐 이거죠.
서연호 :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더 재미있었어요. 밤이라는 어두움이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력을 열게 해 주었죠, 밤길을 가는 면서기의 의식 속에서 과거가 극중 극으로 나타나면서, 현실의 비극은 비극대로 상승작용을 하고…….
오태석 : 그게 시골의 밤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우리가 어릴 때는 밤길을 많이 걸어갔잖아요.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거든. 귀신이야기도 생각하고요……귀신하고 만난다는 건 곧 상상력하고 만난다는 이야기지. 뭐든지 가능한 거라. 뭐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예요.
서연호 : 앞으로 보완할 생각은 없어요?
오태석 : 불만이 많아요. 다시 만든다면 등기소에서 불탄 사람들이 좀 나와도 될 것 같고…….
서연호 : 그 사람들을 끌어낼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삼촌 이야기도 확대시킬 여지가 있지 않아요? 사금파리로 얼굴만 긋는데, 그 사람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그처럼 양심적인 괴로움에 시달릴까 하는 점 말이에요.「자전거」다음에 만든「필부의 꿈」(1985)은 어떤 작품이었죠?
오태석 : 이를테면 산대의 연희성 같은 걸 끌어내려고 애를 쓴 거죠. 상상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 어떤 친구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같다고 했어요.
서연호 :「비닐하우스」(1989)는 어땠어요?
오태석 : 우리가 항시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야 되고, 보이지 않는 얼개 속에 딱 통제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에 대한 우스개 소리지요.
서연호 :「운상각」(1990)은 초봄의 썰렁한 무대에서 공연했는데, 관객들이 별로 없었어요. 저로서는 참 재미있게 보면서 관객들을 아쉬워했던 작품이에요.
오태석 :「자전거」와 같은 맥락의 작품이죠. 6·25때 한 가장이 남겨놓은 흔적이라는 게, 그 빈자리가 그렇게 크다, 그런 이야기죠. 그런데「자전거」가 정면으로 갔다면「운상각」은 여과된, 조금 떨어져서 본, 그렇기 때문에 조금 여유가 있었죠. 웃음이 같이 가줄 수 있는. 조금 빗겨서 본다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무대와 객석 사이에 탄력이 있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재미있게 보셨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서연호 : 6·25의 상처와 관련해서 가족들이 입은 피해는 없었어요?
오태석 : 아버님이 6월28일날 서울서 납북 당하셨지, 경무대(오늘날의 청와대)정무비서로 계시다가 그만 두시고 변호사 개업을 하셨는데.....,
서연호 : 현재의 연세와 존함은?
오태석 : 일흔 여섯, 오세권, 세상 세(世)자에 권세 권(權).
서연호 : 소식은?
오태석 : 모르죠.
1979년 이전의 작품들
서연호 : 1979년 이전의 작품에도 주목을 받았던 작품들이 많습니다. 먼저 가장 시비가 분분했던 「초분」(1973)부터 말씀해 주세요.
오태석 :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입장과 여기를 보듬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의 갈등인데, 다시 말하자면, 원심력과 구심력의 갈등인 셈이죠. 그 형식 자체가 사건을 구체화하기도 어렵지만, 사건을 너무 애매모호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줄거리를 찾으려는 사람들한테 오해, 아니 오해라기 보다는 그걸 잘못 읽게 만든 요인이 아니가 싶어요.
서연호 : 그런 점은 좀 더 보완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그렇다고 해서 그 작품의 생명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노는 건 그대로 다 노니까.
오태석 : 70년대 초반만 해도 어디 해외로 나간다는 건 특수층 아니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단 말이죠. 나는 그게 굉장히 갑갑했어요. 과거부터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볼 때, 대륙이면서 섬이기도 한, 뭐 그런 토양에서 길러진 쭉쭉 뻗치는 기질이라는 게 있었지요. 근데 그 기질을 꽉 막아버린 게 바로 사상문제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섬 아닌 섬이 되 버린 거라.
서연호 :「초분」의 공간은 바로 섬이지요. 바로 70년대의 우리 상황이란 말이지요?
오태석 : 그래서 섬을 무대로 설정한 거지요. 그 날려는 기운, 대륙으로 뻗치려는 기운과 아무리 빈곤하더라도 여기를 지켜야 된다는 거, 여기를 사랑해야 된다는 거, 뭐 그런 입장이 우리 심층에는 항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구심과 원심이 막 갈등을 일으킬 때 관객과 만나지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지요, 대륙으로 뻗칠 수 있는 이런 기운을 딱 막아놓은 조건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살아있게, 움직이게 하는 요인도 된단 말이죠. 그 요인이 긍정적인 쪽으로 펼쳐지기를 바랐던 거지요.
서연호 : 다시 새롭게 만들어 볼 생각은 없어요? 지금 말씀하신 요소를 강조해서 …….
오태석 : 그거는 제 숙제예요. 그래서 내년에 「초분」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천착을 해서 하기로 했습니다. 1973년에 일으킨 반응, 뭐랄까, 그게 어떤 터닝포인트 같이 됐었잖아요. 사실적인 연극만 하다가 연극사적으로 다른 일이 벌어졌던 거니까. 그것을 재확인해 보는 작업이 돼야 한다 이거지. 그러려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연습이 돼야 하겠단 말이에요.
서연호 :「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안민수 형 연출도 봤고(1974), 오형 연출도 봤는데 (1988), 두 작품이 모두 특색이 있었는데…….
오태석 : 군사정권 때 한 번 소급계엄령을 내린 일이 있었어요. 장준하 선생 치려고 한 거지. 박정희씨가 제일 미워했으니까……그때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4학년 학생들이 놀랍게도 데모를 했어요. 오전에 데모를 했는데 저녁에 소급령이 내렸으니까 장준하 선생, 백기완씨와 더불어 소위 학생주동자 여덟 명이 끼어 들어간 거라. 아찔하더라구요. 두 사람 죽이면서 학생들 여덟 명도 죽일려구 그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온 공포가 뭐냐 하면, 국민학교 때 배운, 외삼촌이 잘못해도 내가 죽는다던 사육신 사건이 되살아나요. 내가 변호사라면 변호를 좀 해주겠는데 하면서, 책을 뒤져보니까 사육신을 따라 죽은 식구들 이름이 나오더라고. 그걸 옮겨 적다가 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너희는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옛날에도 삼족을 멸한 중에 씨 하나가 남아서 어렵게 어렵게 자죽을 이으면서 살아 남았다. 너희들도 그렇고, 그들도 그랬는데, 함부로 하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서연호 : 좋은 뜻이고, 실제 감동도 컸어요. 속칭 오사단 패가 공연한 「약장사」(1975)는 어떻게 만들어졌어요?
오태석 :「약장사」는 심우성씨 이야기가 발단인데, 옛날에 얘기장사라는 게 있었다. 야 그거 재미있었겠다. 그게 발단이지. 우리가 판소리를 보면 얼마나 유창하고 좋은 말이 많아요. 지나간 어른들이 이렇게 좋은 문장을 늘어놨는데, 후손이 그런 거 하나 못하겠냐. 새로운 판소리 비슷하게 생각 한 거죠. 이 얘기, 저 얘기, 시쳇말 넣고 저쳇말 넣고, 떠들떠들 하다가 자기 꾀에 지가 넘어가는, 지가지를 부숴 버리는, 읽어버리는 자승자박하는 인간, 현대 우리들의 모습, 뭐 그런 거죠.
서연호 : 역시 오사단이 만든 「춘풍의 처」(1976)는?
오태석 : 우리 작품 가운데 며느리의 설움, 본처의 설움, 눈물 질질 짜는, 소극적인 여자 이야기 많지요. 그런데 이춘풍의 처만은 적극적인 여자예요. 팔 걷어붙이고 남편 잡으러 간단 말야. 우리 시골에 가면 춘풍의 처 같은 여자 많아요. 대가 크고, 통 크고, 호탕하고, 우스개 소리도 잘 하는 여자들, 그런 여인상이 대단히 바람직하지 않느냐 그거죠. 그래서 산대놀이의 정신에 담아 본 거예요. 1979년은 내가 미국에 갔을 때, 최형인씨가 중심이 되어서 즉석 현지 공연을 했어요. 뉴욕대 연극과 과장이 와 가지고 하는 소리가, 이거 너희 민속 같은데, 아주 현대적이다, 일본 것, 중국 것하고는 전혀 다르다고, 왜 이제야 우리 눈에 뵈느냐고 하더라구요.
서연호 :「물보라」(1987)는 국립극장서 하고 나서 한 번 더 공연을 했던가요?
오태석 : 1989년인가 또 했지요.
서연호 : 다시 만들 생각은 없어요.
오태석 : 그 전에 고풀이라든가, 창이라든가, 이런 게 없었잖아요. 그게 굉장히 신선하고 좋더라고, 근데 이제는 하도 많이 하니까 식상을 했고, 고풀이를 하면은 그게 제대로 풀어져야 하는데, 그게 작품의 핵심인데, 제대로 못해내요. 1989년에 할 때는 하도 신경질 나 가지고 그걸 다 없애버렸지요.
서연호 : 다시「사추기」로 되돌아 왔습니다. 소재는 푹 삭은 우리들 이야기지만, 표현방식은 서구적인 냄새가 짙은 작품인데…….
오태석 : 미국 갔다오자마자 한 작품입니다. 이 가난한 나라에서 구로 공단 공원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가지고 내가 미국에 7개월간이나 가 있었는데, 그 보상을 해줘야 되잖아요. 그래서 내가 거기서 본 양식, 그 중에서 여기서 펴 놔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빨리 재생해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못 간 친구들한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뜻이었죠. 타임머신 설치하고, 그 난리친 건, 저쪽에서 하는 방식이 이런 거라고 보여주려고 했죠. 얘기는 다 이쪽 건데, 형식은 다 서구적이지, 극단적으로 그렇게 됐지요. (대담, 1993년 1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