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하는 주체
-대중문화를 통해 라캉을 이해하기 Ⅱ
권택영 / 경희대 영문과 교수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 - <오브제 프티 아, a>
한 권의 소설을 끝까지 읽어가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그 영화는 왜 그토록 많은 관객을 끌어들였는가. 그 작품은 왜 그렇게 많이 읽혔는가. 무엇이 관객을 사로잡는가. 사막처럼 지루하고 벼랑처럼 가파른 삶의 질곡을 우리는 어떻게 견디어내고 그리고는 어찌하여 또 마지막 순간에는 그 삶을 뒤돌아보며 아쉬움을 느끼는가. 아무 것도 아닌데 우리를 살게 하는 유혹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청준의 중편소설,「이어도」는 삶을 이끌어 가는 힘과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힘이 환상에 의지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어도라는 섬을 믿고 힘든 삶을 이겨낸다. 갇힌 섬 생활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언젠가는 온갖 질곡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게 될 이어도를 믿으며 현실을 견디어 낸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에 그 섬을 본 사람은 없다. 제주에서 낳고 자란 천남석은 이어도를 증오한다. 아니 그 섬이 부재하기를 빈다. 뱃사람인 아버지는 늘 바다에 나가 살았고 어머니는 둑에 올라 돌을 고르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이어도 노래를 부르며, 끊임없이 주변을 감돌던 노래,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다 죽는다. 그래서 천남석은 섬을 증오했고 이어도의 부재를 간절히 바랬다.
제주 앞 바다에서 파랑도 수색작전이 있던 날 밤, 천남석이 실종된다. 이어도라고 여겨지는 파랑도는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고 섬의 부재는 천가를 기쁘게 했으련만 왜 그를 잘 아는 양주호는 자살했으리라고 믿는가. 천은 이어도의 부재를 확인하는 순간 자신의 내부에서 그 섬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게 양주호의 믿음이었다.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제주였건만 막상 떠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결코 그 섬을 버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가 증오했던 그 땅을 그는 사랑했던 것이다. 증오는 얼마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인가. 아니 증오로밖에는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천남석, 그는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처럼 '일찍이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러기에 이어도 술집의 여인에게도 구박과 학대로밖에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른다. 그의 가슴에는 또 하나의 섬, 이어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도는 무엇인가. 한 세상의 질곡을 견디게 만드는 환상이요, 저마다의 가슴속에 있는 섬이다. 그 섬 때문에 살아가며 그 섬 때문에 사랑의 말을 하지 못한다. 그건 볼 수 없으면서도 늘 마음속에 있는 부재하는 실재이다.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힘으로 종교요, 이념이요, 사랑이요, 환상이다. 라캉의 말을 빌어 실재계(The Real)에 난 구멍이요, '상상계(The Imaginary)적' 주체가 '상징계(The symbolic)'를 거친 후 희미하게 남겨놓은 얼룩이다(오브제 프티 아,a). 사막의 신기루처럼 다가서면 저만큼 물러서는 유혹이다. 멀리서 손짓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다가서기 전까지 상상계요, 잡는 순간이 상징계요, 다시 저만큼 물러서며 우리를 유혹하는 게 '실재계(혹은 실재를 상징하는 현실계)'이다. 천남석은 이어도의 부재를 갈망하여 파랑도 수색전에 참여한다. 그러나 막상 그 섬이 부재임을 알았을 때 가슴속에서 그 섬을 본다.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는 한 그는 삶의 어려움을 견디어낼 것이다. 그러기에 섬을 떠났으리라는 양주호의 믿음을 물리치고 그는 고스란히 살아서 돌아온다.
이런 내용을 담은 소설「이어도」를 읽게 만드는 매혹은 어디에서 오는가. 서술은 수색작전에 참여했던 해군중위 선우현이 천남석의 실종에 의문을 품고 제주도를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실을 캐는 데 충실한 그는 천과의 만남을 회상하며 양주호와 천의 여인을 통해 자료를 모으지만 원인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서술을 지속시키는 힘, 아무 것도 아니면서 절대적인 얼룩은 천남석이다. 소설은 모두 그에 관한 얘기지만 그는 끝머리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그가 나타나는 순간 소설은 끝나버린다. 부재이면서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 미끼다(a).
욕망은 근본적으로 결핍이어서 끝없이 계속되는 반복충동이요, 그것을 충족시키는 단 하나의 대상은 죽음뿐이다. 우리의 삶이 무(無)에서 태어나 무(無)로 돌아갈 때까지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내일을 되풀이하듯 소설도 그렇다. 이런저런 형태로 천남석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다가 어느 순간 그가 나타나면서 서술은 종결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부재이기에 서술이 지속되는 유혹이었다.
「이어도」는 내용과 서술형식의 면에서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면서 삶을 지속시키는 동인인 라캉의(오브제 프티 아)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탈 이념이라는 시대의식과 우리는 왜 사랑하지 못하는 가라는 영원한 물음을 던진다.
원주민들이 사는 어느 섬 해안 가에 백인 모녀가 물거품을 뒤집어 쓴 채 도착한다. 어머니는 이 섬에 사는 백인 남자에게 시집온 벙어리였고 우여곡절 끝에 그 남자가 아닌 이웃에 사는 가난한 남자와 함께 다시 그 섬을 떠난다.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 화려한 현대 도시의 추리 물도 아니고 복잡한 사건이 얽힌 심리극도 아닌 진부한 삼각관계의 사랑이야기가 왜 관객을 매혹하는가. 피아노 때문이다. 해변가에 다른 이삿짐과 함께 도착한 피아노는 여느 것과 다를 게 없다. 그 평범한 악기가 어떻게 스토리를 지속시키고 관객을 사로잡는가. 남편은 길이 험하니 피아노를 가져갈 수 없다며 버리자, 여자는 아쉽게 돌아본다. 남편이 없는 날 모녀는 이웃 남자에게 청하여 해변가로 나와 하루종일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는 어릴 적부터 말을 못하던 그녀가 자아에 갇히지 않고 사회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그녀의 자존심이었고, 그녀가 기대어 삶을 영위하는 환상(라캉의 용어로 sinthome)이었다. 그러기에 해변가에 버림받는 순간부터 그 물건은 숭고한 광휘를 얻는다. 그것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녀의 삶도 함께 가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여러 의미를 띠고 주체의 자리를 움직이는 기표가 된다(S(A)). 여자에게는 없으면 살 수 없는 환상이요, 남편에게는 돈 가치가 없는 귀찮은 물건이요, 연인에게는 그녀의 영혼에 이를 수 있는 통로이다.
버림받은 피아노를 남편에게 땅을 주고 사들인 연인은 피아노를 매개로 그녀와 조금씩 가까워 지려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사랑을 얻지 못한다. 그는 분노로 피아노를 그녀에게 돌려주고 그 일은 엉뚱하게 그녀의 가슴에서 움트던 사랑을 끌어낸다. 피아노가 돌아오자 자아를 되찾은 그녀는 연인과 함께 섬을 떠난다. 남편은 그녀의 소중한 환상을 존경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소유물로 생각할 뿐이었고 연인은 그녀의 환상을 존중했고 사랑이란 육체를 통한 영혼의 교감이라고 믿었다.
캠피온은 두 남자의 차이를 설명보다는 한 장면으로 관객의 뇌리에 새긴다. 아내의 밀회를 훔쳐보는 장면이다. 그는 땅에 대한 욕심으로 아내가 연인의 품에 안기는 것을 묵인한다. 아니 묵인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장면을 훔쳐보며 자기 스스로 성적만족을 찾는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관음이요, 정욕을 넘어서지 못한다(캠피온이 이 장면을 담는 기법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피아노는 또 한번 자리를 옮긴다. 이번에는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피아노를 찾았고 연인을 얻었는데 그녀는 왜 피아노와 함께 물 속으로 뛰어드는가. 여자와 피아노를 묶은 밧줄이 물 속에서 풀어져 다시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녀의 이런 자살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편에 의해 손가락이 짤리웠기에 그녀는 다시는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출구가 닫혀버린 것이다. 피아노는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닌 게 아니고 그녀가 그것을 칠 수 있을 때만이 그녀에게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녀의 삶을 지속시키는 동인이요, 그것 없이는 살수 없는 환상이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미하기에는 사랑보다 앞선다. 정체성을 잃지 않았을 때만이 진정한 사랑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인 캠피온이 각본을 쓰고 감독한「피아노」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다. 대화보다 상징적인 장면으로 말을 하고 비록 배경이 과거요, 낯선 원주민의 세계라 할지라도 여성의 자아인식을 강조한 오늘날의 페미니즘영화이다. 또한 소유가 아니라 경험의 교환이라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추구하는 보편성을 지닌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아노는 누구의 수중에 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지연되고 독자를 사로잡는 욕망의 대상(S(A))이요, 그것이 마지막에 다시 그녀의 손안에 들어왔을 때는 광휘를 잃고 마는 욕망의 미끼이다(a).
깊은 물 속으로 잠기는 피아노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할 때 억압되는 부분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다시 떠올라 사회 속에서 한 인간으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물 속에 잠겼다 떠오르는 행위는 원주민이 사는 섬(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사회(아버지의 이름)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겪어야 되는 상징계적 경험이다.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왜 그렇게 많이 읽혔는가. 1861년부터 시작된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남부 조지아주의 붉은 흙처럼 강렬한 삶을 사는 스칼렛의 개성과 그녀를 사랑하는 버틀러, 그리고 애슐리와 멜라니, 네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장편소설은 1920년대에 쓰였다. 고증을 거칠 정도로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으나 그 역사가 중심인물의 개성에 종속되고 글이 쓰여진 모던 시대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지 못한 탓으로 문학성이 뒤지지만 뛰어난 스토리텔링은 1937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를 사로잡는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표면에 떠올라 사건을 끌어가는 인물은 스칼렛이다. 그녀의 매력, 고집스러움, 전쟁과 함께 부침하는 삶의 굴곡, 역경을 이겨내는 강인함, 이기심, 허영심, 열정, 그리고 가까이에 행복을 두고 먼 곳에서 찾는 미망, 때늦은 후회, 삶의 낭비. 스칼렛은 독특한 개성을 지녔지만 인간이 겪는 삶의 미망을 보여주어 독자를 끌어들인다.
소설은 스칼렛이 애슐리의 결혼 소식을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 애슐리가 멜라니의 남편이 되는 것을 막아보려는 그녀의 시도에도 아랑곳없이 손에 넣을 수 없는 대상이 되고 손안을 빠져나갈수록 그녀에게 강렬한 삶의 동인이 된다. 그러므로 애슐리에게 거절당하는 그녀의 모습이 버틀러라는 제3자에게 보여지는 장면은 그녀의 첫 번째 상흔이며 마지막까지 삶을 지배하는 흔적이다. 그녀가 버틀러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버틀러가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장면이 남긴 상처에서 비롯된다. 또한 미첼은 이 장면을 두 인물과 독자가 공유하는 비밀로 만들어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하는 스칼렛의 마음을 독자만이 읽는 기쁨을 준다.
스칼렛의 첫 번째 결혼, 멜라니에 대한 보살핌, 역경을 헤쳐나가는 인내, 다시 일으켜 세우는 부 ……그녀의 모든 행위를 있게 하는 동인은 애슐리다. 상실의 기표가 되면서 그는 그녀의 삶을 움직이고 스토리를 움직인다. 그녀가 매혹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까지 애슐리는 욕망의 미끼(a)이다. 멜라니의 죽음으로 애슐리를 손안에 넣을 수 있게 되는 순간 그녀는 깨닫는다. 이게 다야? 그토록 자신의 삶을 움직여온 대상을 막상 손에 쥐고 보니 나약하고 무력한 사나이다. 아프리카의 이구아나가 인간의 손에 잡히는 순간 영롱한 빛을 잃고 칙칙한 덩어리로 남듯이 멜라니가 죽기 전까지 그녀의 삶은 모두 애슐리의 시간 안에 있었고 그는 그녀의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리라 믿은 타자였다(상상계). 이제 장벽이 걷히자 그녀의 손에 잡힌 대상은 매혹을 거두고 (상징계) 지금까지 환상의 빛에 가리워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또 다른 대상, 버틀러가 욕망의 대상으로 부상한다(현실계). 오직 그 대상이 닿을 수 없이 먼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에야. 그녀의 가슴에는 또 하나의 살아야 할 목표가 생기며 욕망은 계속 남게 되고 삶은 지속되는 것이다. 애슐리가 무력하게 그려진 것은 라캉의 <오브제 프티 아>로서 제격이었다.
스칼렛이 표면에 떠오르는 인물임에 비해 버틀러는 억압되어 있으면서 끊임없이 존재를 드러내는 흔적이다. 그는 스칼렛이 그에게 돌아서는 순간까지 그녀의 시간 안에 산다. 첫 번째 상흔 이후 끊임없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연을 가장하고 도움을 준다. 그가 우연인 것처럼 그녀 앞에 나타나고 그녀에게 속마음을 보이지 않으려 빈정대는 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애슐리의 환상이 남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라기보다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기 위함이다. 그는 애슐리가 스칼렛에게 맞지 않는 인물임을 알기에 애슐리를 질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스칼렛이 그가 싸워야 할 적이었다.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너밖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알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연인의 이중성. 그의 위장은 한 손으로는 마스크를 쓰고 마음을 숨기면서 또 다른 손으로는 틈틈이 그 마스크를 가리키는 연인으로서의 위장이다. 가면의 극치이다.
연인은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버리면 사정없이 휘두르거나 광휘가 걷히고 나면 무관심해진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사랑을 지속시키려는 강한 성격의 두 연인이 벌이는 팽팽한 대립을 다룬다. 그리고 오직 연인은 대상을 얻게 되는 순간에야 대상을 떠난다. 얻는 순간 매혹이 사라지는 탓일까. 아니면 사랑이란 원래부터 그런 환상이어서 영원히 흔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녀의 가슴에도 자신의 가슴에도 욕망이 남아 영원히 삶이 지속되게 하기 위함인가. 두 연인의 엇갈림은 소설이 멈추지 않고 다시 쓰이도록 하는 유혹이다.
플라톤의「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이 원래 남녀 한 몸이었는데 신의 질투로 남녀가 나뉘어서 인간은 한평생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맨다고 말한다. 그러나 라캉에게 그 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짝의 완전한 결합이란 죽음이며, 종말이며, 침묵이기 때문이다. 침묵을 막기 위해 무언가가 꿈틀댄다. 흘러 넘친 어떤 것(Jouissance), 제 삼의 시선, 흔적, 얼룩, <오브제 프티 아>.
제삼의 시선
라신느의「훼드라」에서 테시우스왕의 아내 훼드라는 왕의 전처소생인 히폴리터스에게 구애하지만 잔인하게 거절당한다. 마침 남편이 들어서자 그녀는 히폴리터스의 눈에 나타난 험상궂은 표정을 본다. 왕에게 나의 배반을 폭로하려는 구나. 그녀는 앞질러 그에게 복수를 하고 그 결과 자신도 파멸된다. 히폴리터스의 눈을 잘못 읽었던 것이다. 곤혹스러움으로 찡그린 것을 폭로하려는 단호함으로 읽어낸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의 위치에서 그의 눈을 읽었던 것이다. 그녀가 부딪친 히폴리터스의 응시는 보는 응시가 아니라 그녀가 상상한 응시였다. 왜 이런 잘못이 일어나는가. 응시 사이에 개입된 제3의 응시, 즉 무지한 왕의 응시에 의해서다. 제3의 시선에 의해 둘의 닮음이 무너진다.
이청준의 단편「불의 여자」는 도시의 한복판 어느 한옥 집 마당을 훔쳐보는 '나'의 이야기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회사를 쉬고 하숙집 창문으로 그 집 앞마당을 내다본다. 그녀는 비가 오면 벗은 몸으로 빗속에 나와있곤 했다. 활활 타오르는 여자는 그렇게 몸을 식혔고 나는 그저 호기심으로 지켜본다. 여름이 오고 도시는 가뭄으로 마른다. 그녀는 타오르는 열기 때문에 점점 메마르고 '나'는 그저 안타까울 뿐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 집에서는 화재가 나고 그녀는 타죽고 가뭄은 끝난다. 그녀의 이상스러움을 지켜보던 '나'의 호기심은 불안으로, 안타까움으로 바뀔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훔쳐보는 행위는 제3의 시선에 의해 보여진다. 죽기 전날 '나'의 창을 스치듯 지나쳐간 그녀의 시선. 그리고 죽은 뒤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나'의 탓이 더 큰게 아니겠느냐는 반문. 그녀에게는 열정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그게 없었다는 후회. 그녀를 지켜보는 '나'는 또 다른 '나'에 의해 보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제삼의 시신에 의해 '나'와 '그녀' 사이의 대립관계는 무너진다.
만일 내가 외딴섬으로 꼭 한편의 내 작품을 가지고 갈 수밖에 없다면 나는 「의혹의 그림자(Shadow of a Doubt)」를 고르리라. 언젠가 히치콕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언뜻 보면 거울이미지처럼 닮은 짝으로 구성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라캉의 '거울단계'(상상계)모양 두 개의 닮은 장면이 비추인다.
찰리 삼촌은 필라델피아의 교외침대에 옷을 입은 채 고개를 오른쪽으로 누워 있고 조카 찰리는 캘리포니아 산타로자의 침대에 옷을 입은 채 고개를 왼쪽으로 누워 있다. 등뒤에 문은 거울에 비추이듯 서로 반대편으로 나 있다. 그 다음 장면, 찰리 삼촌은 우체국에 가서 조카 찰리에게 방문하겠다는 전보를 치고 조카는 우체국에 가서 놀러오시라는 전보를 치려다가 삼촌의 전보가 와 있음을 본다. 찰리가 흥얼대는 곡은 텔레파시처럼 조카에게 옮겨진다. "우린 쌍둥이야, 너무 닮았어요"라고 조카는 말한다.
이외에도 거울이미지는 많다. 필라델피아에서 찰리 삼촌은 두 형사에게 쫓긴다. 산타로자에서 기자로 변장한 두 형사가 그를 수색한다. 동부에서 또 다른 용의자가 또 다른 두 형사에게 쫓긴다. 그는 잡혔다가 도망쳤으나 프로펠러에 치어 죽는다. 찰리 삼촌은 기차에 치어 죽는다. 두 아이들, 두 의사들, 두 아마추어 형사들, 역에서 두 장면, 차고에서 두 장면, 찰리를 죽이려는 두 번의 살인 시도, 두 번의 가족만찬, 두 교회장면, 형사의 두 번 방문, 그리고 열쇠 장면은 '두시까지'라는 바에서 일어나고 그 바에서 찰리 삼촌은 두 잔의 더블 브랜디를 시킨다.
이런 이중구조는 다른 비평가들이 거울이미지로서 혹은 구조적 필연성으로 언급해왔다. 그러나 히치콕의 구조는 이보다 더 복합적이다. '모든 이중성은 제3의 것에 의존한다.' 그 제3의 것은 이 거울관계 속에 없는것 같지만 힐끗 보면 나타나는 얼룩으로 스토리를 지속시키는 축이다. 마치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 한가운데 길쭉한 물건처럼, 쌍둥이처럼 서 있는 두 대사들 사이의 비스듬한 그 물건은 힐끗 보면 해골로 나타난다. 이 제3의 시선은 무엇인가. 그림 전체를 무너트리는 조그만 얼룩이다. 아무 것도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것, 히치콕의 영화에서 거울관계가 아닌 물건을 찾아보자. 찰리 삼촌의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돈, 그 돈은 삼촌이 돈 때문에 살인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가 살인한 과부는 마땅히 제거되어야할 인간 쓰레기였다. 찰리 조카는 밖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돈이 없다는 대화에 몽상에서 깨어난다. 따라서 돈은 둘을 묶어주지만 거울이미지는 아니다. 인물 사이에서 오가는 두 번째 요소는「즐거운 과부」라는 곡조이다. 가족만찬에서 누군가 그 곡을 흥얼거리자 감염된 듯 모두 따라 부른다. 제목의 첫 글자를 누군가가 말하는 찰나 찰리 삼촌은 잔을 쓰러트려 물을 엎지른다. '과부'라는 낱말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제3의 요소는 '반지'다. 두 찰리 사이에서 반지는 자리를 옮길 때마다 스토리의 방향을 바꾼다. ① 삼촌은 조카에게 결속의 다짐으로 반지를 준다. 그러나 반지에는 낯선 이름의 첫 글자가 새겨있어 조카에게 의혹의 그림자를 던진다. ② 어느 날 도서관에서 삼촌이 감추려는 신문에서 피살자의 이름을 발견하자 조카는 그가 살인자임을 직감한다. 카메라는 도서관 천정을 향해 점점 물러나면서 반지는 점점 작아지고 어두운 도서관에 댕그라니 남은 조카의 모습도 작아진다. ③ 자꾸만 딴소리를 하는 삼촌 앞에서 조카는 말없이 반지를 빼놓는다. 반지를 되돌려주는 것은 당신이 살인자임을 안다는 뜻이다. 이로써 둘의 쌍둥이 관계는 끝난다. ④ 다른 용의자가 잡히자 삼촌은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직 조카밖에 없음을 알게된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안전을 지킬 것인가. 그녀는 모두 파티에 나간 틈에 삼촌의 반지를 훔친다. 단 하나의 물적 증거를 영원히 소유할 것을 내보이며 그녀는 천천히 층계를 내려간다. 카메라는 난간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따라간다. 손에 쥔 반지를 비추면서, 삼촌만이 그 의미를 안다. 그 반지는 다시 약속이 된다. 어머니를 위해 당신이 멀리 떠나는 한 나는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이 반지를 증거로 사용할 것이다. 이렇듯 반지는 거울이미지를 연결 지었다 갈라놓으면서 매혹의 광휘를 얻는다.
나는 그대가 바라보는 한 존재한다 - 상상계에 갇힌 존재
히치콕의 「이창」은 남자주인공 제프의 주관적 시점으로 비추어진 영화다. 그는 사고로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의자에 묶여 있다. 그러기에 고치 속에 갇힌 누에 모양 앉은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고 그가 보는 세계는 늘 맞은편 아파트 그것도 문이 열려 있을 때뿐이다. 카메라는 제프가 보는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관객은 그를 보고 그가 보는 맞은편을 본다. 보기만 하는 시선의 갇힘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의 눈으로 맞은편 아파트를 바라본다. 그래서 아내를 죽이고픈 그의 욕망은 맞은편 아파트의 사내가 살인자이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가 보는 세계는 자신이 보기를 원하는 세계일 뿐이다. 제프의 갇힌 주관적 상태는 관객에게 보여짐으로 상호주관성으로 옮아간다. 그는 오직 한 지점만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사방에서 보여지는 것이다. 바라봄과 보여짐의 교차는 스크린과 관객에 의해 이루어진다. 라캉의 바라보기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는 남을 보지만 사실은 그 속에서 우리 자신만을 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대가 보는 한 존재한다. 만일 그대가 시선을 거두면 나는 존재하기를 멈춘다.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점쟁이의 욕망은 손님의 욕망과 일치하고 탐정의 욕망은 숨긴 자의 욕망과 일치한다. 인류학자들이 뉴질랜드의 정글에서 괴상한 마스크를 쓰고 전쟁 춤을 추는 원시부족을 찾아갔다. 그들은 그 춤과 기록이 일치함을 보고 만족했다. 그러나 그건 부족들이 탐색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그들의 욕망을 알아내어 그것에 맞춘 춤이었다. 그 춤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념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우리는 선택되었기에 이념의 부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자신을 인지했기에 스스로를 선택자로 믿는 것은 아니가. 우연히 인지한 것이 필연성을 부른다. 이것이 주체가 순수한 응시와 일치시키는 데 개입되는 미망이다.
히치콕의「싸이코」는 <오브제 프티 아>, 욕망(desire), 충동(drive),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도착(perversion)에 관한 라캉의 이론을 설명하는 좋은 예이다. 회사에서 돈 문제로 복잡하게 얽혀든 마리온은 도망치다가 어느 모텔에 머문다.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돌아오려던 그녀는 모텔 주인의 초대를 받는다. 그때 멀리서 모자(母子)의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는 아들이 젊은 여자를 식사에 초대하는 게 싫은 거라고 아들은 해명한다. 마리온은 샤워도중 피살되고 곧이어 형사도 살해된다. 살인자는 누구인가, 어머니인가 아들인가. 감방에 앉아 관객을 응시하는 살인범의 마지막 얼굴, 그건 아들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어머니의 음성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영화 전편에서 들리던 그녀의 음성은 아들의 것이었다.
몸체 없는 어머니의 음성(a)은 영화에 긴장을 주고 마지막 역전을 향해 관객을 이끌어 가는 유혹이었다. 예를 들어 아들은 어머니의 오래된 옛집의 층계를 오르고 카메라는 그 뒤를 따른다. 그가 이층 어머니 방으로 들어설 때, 카메라는 그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닫힌 문을 비추인 채 층계로부터 어둑한 집안 내부를 조망해준다. 관객은 눈으로는 집안 내부를 보며 귀로는 방안에서 들리는 모자의 얘기를 듣는다. 잠시 후 아들은 어둑한 물체를 부축하고 층계를 내려간다. 관객은 어머니의 존재를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그녀의 음성은 텅 빈 소리였으나 영화를 끌어가는 절대적인 미끼(오브제 프티 아)였다.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었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살인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샤워 중에 마리온이 살해되는 장면인데 예고 없이 일어나고 조각조각 파편화된 장면들로 편집되어 충격적이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게 없을 듯한데 두 번째는 어떻게 만들어야 관객에게 충격을 줄 것인가.
우선 천천히 살인이 있을 것 같은 예고를 준다. 어둑하고 낡은 집안의 층계를 올라가는 형사. 분위기는 음산하고 금방이라도 무엇인가가 튀어나와 목덜미를 잡을 것 같은데 위층 어디선가 삐끗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그때 어머니같이 보이는 길다란 물체가 튀어나와 칼로 그의 얼굴을 긋는다. 관객은 놀란다. 예상과 일치했는데도. 왜 그럴까. 예상은 했지만 설마 그렇게 될 줄이야. 그렇다면 우리는 늘 예상하는 일이 들어맞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라캉의 욕망이다. 만일 이때 조금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상상계에 갇힌 사람이다. 그는 예상과 실제 일어나는 일이 똑같다고 믿는 자이며 이것이 충동(drive)이다. 충동은 욕망의 상부구조로 둘은 뗄 수 없는 한 짝이다.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주체를 이루듯이 ($⼤㪙a).
싸이코의 가장 극적인 반전은 마지막 장면이다. 어머니의 혼에 완전히 사로잡힌 노먼이 그녀의 음성으로 말한 후 카메라를 뚫어지게 응시하여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 응시는 숭고한 광휘에서 오는 매혹이 아니라 포르노를 볼 때 느끼는 혐오와 비슷하다.
관객은 왜 노면의 시선에 동의하지 않는가. 이 영화의 전반부는 미리온의 시점에서 진행되다가 갑자기 그녀가 죽고 그 후에 형사, 그녀의 동생, 쌤 등이 노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관객은 마리온을 따라가다가 노먼으로 바뀌는데 의아해한다. 그리고 전자에게는 일체감을 느끼지만 노먼에게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전자는 대상으로서의 응시이지만 후자는 사물로서의 응시. 즉 '도착'이기 때문이다. 대상으로서의 응시($⼤a)는 주체가 대상에게 환상을 품게되는 경우요, 사물로서의 응시(a⼤$)는 포르노처럼 대상이 주체를 사로잡으려는 욕망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주체가 경직되어 버리는 경우이다. 즉 대상의 욕망과 주체의 욕망을 일치시켜버리려는 고착상태로써 신경증이다. 주체가 어머니의 욕망인 상상계에서 아버지의 이름인 상징계로 진입하여야 욕망이 지속되고 삶이 지속되는데 상상계에 갇혀버리면 신경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싸이코」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면의 응시는 사물의 응시로서 관객을 동화시키지 못하고 섬뜩한 상태로 소외된다. 주관성에 갇힌 세계, 바라보기만 하고 보여짐은 모르는 주체, 상호주관성이라는 사회성이 제거된 주체이기 때문이다. 마리온의 세계가 낮이요, 이상이라면 노먼의 세계는 밤이요, 사이코의 세계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욕망으로부터 충동으로의 퇴행을 보여준다. 히치콕이 마리온보다 노먼 부분에 긴 시간을 할애한 것은 미국 자본주의사회의 감추어진 히스테리아를 보이면서 독자에게 비판적 거리를 주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라캉에게 상호주관성은 중요하다. 바라봄과 보여짐의 변증법, 주관성에 함몰되지 않는 상호주관성, 라캉에게 이성은 보기만 하는 주체가 아니라 보여지기도 하는 금이 간 주체이다. 그래서 그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순수사유는 상상계적 사유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이 글에 참고된 책은 라캉 자신의 글들 외에 Slavoj Žižek 이 편집한 Everything You Always Wanted to Know about Lacan (But Were Afraid to Ask Hitchcook, 1992년, Verso)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