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세계 고도들의 옛모습 보존과 현대건축물 수용에의 변화와 조화

세계의 고도 / 독일 아헨시(Aachen)

- 거주는 길에서부터





김기호 / 서울시립대 교수, 건축, 도시설계가

작은 도시와 큰 건축

도대체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은 서독의 서부 귀퉁이에 박혀 있는 별볼일없이 보이는 인구 24만여의 조그만 도시인 아헨을 거창한 세계의 고도라는 제목 밑에 소개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필자에게는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하면 떠올리는 파리나 비엔나, 로마 등은 물론 기타의 수많은 도시의 건축, 도시 공간에 대한 슬라이드가 2천여 장은 족히 되나 필자가 아헨이란 도시를 테마로 잡은 것은 다음의 몇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아헨에는 필자가 4년여를 살아서 그 뒷사정까지 잘 알고 있는 바이니 공연히 잘 알지도 모르면서 수박 겉핥기로 그림이나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생활까지도 생생히 보여줄 수 있고, 둘째, 유럽, 최소한 독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무엇인가 보려면 서울로 가야하는 것과는 달리 작은 도시에도 큰 건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며, 셋째,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중·소도시들도 건축, 도시적인 측면에서 나름대로 개성과 질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이다.

아헨은 앞에서 말한대로 인구 20만이 좀 넘는 작은 도시이다. 그러나 그 면적은 서울의 약 4분의 1이나 되니 큰 도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헨을 특징짓는 것은 아무래도 역사 깊은 성당(Dom) 및 그 주위의 광장과 대학이리라. 아헨성당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의 문화재에 속하는 귀중한 건축물로서 한 건축물내에 여러 시대의 다양한 양식의 건물 부분들이 같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성당은 원래 AD700년대 말 칼대제의 왕궁내 예배당으로 지어진 비잔틴양식의 영향을 받은 8각형의 둥근 중심건물에 14세기 전반에 서쪽으로 고딕양식의 건물이 덧붙여 지어졌고 15세기 초에는 동편에 후기 고딕양식이, 그 후에는 바로크풍의 채플이 팔각형 중심건물에 덧붙여 지어졌다. 그리하여 그 건축물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건축교육을 위한 생생한 대상이며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이는 걸핏하면 오랜 건물을 (제법 그 상태가 멀쩡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헐어내고 새로 짓는 것을 큰일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일각의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것 같다.

아헨의 대학생수가(아헨공대, 전문대, 음대 등) 4만 이상을 헤아리니 시의 인구수에 비하면 대단한 수가 아닐 수 없다. 이에 걸맞게 아헨의 건축 경관을 형성하는 것중의 중요한 것의 하나가 앞에 말한 성당 이외에 대학에 관계되는 건물이다. 그중에도 특히나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근년에 지어진 의대 및 부속병원 건물이다. 대학병원 건물은 첫눈에 보아도 그 모습이 그로테스크하다. 우선 그 크기가 길이 240여 미터에 폭이 130여 미터의 큰 덩치, 또 그 빨갛고 노란 색깔이며 뼈가 다 드러난 듯한 구조체, 내장이 다 보이는 듯한 배관들이며 병원보다는 오히려 무슨 공장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이즈음의 병원은 옛날같이 의사선생님이 청진기나 하나 들고 두드려 점치듯이 병을 가려내는 시대가 아니다.

병원은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점점 더 첨단의 진단, 치료장비로 무장되고 있으며 의료행위는 상당부분 이런 기기들을 조작하는 행위로 대체되고 있다. 오늘날 병원 건축비의 50%이상이 설비비에 충당된다는 것을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아헨대학의 병원은 이러한 의료행위의 변화를 그대로 건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외부에 비해 병실 내부는 상당히 차분하고 안온하게 꾸며져 있으며 여러 개의 중정이 있어서 어느 병실에서나 쉽게 주변의 나무들이나 들판을 볼 수 있으니 겉과 속이 다른 제법 쓸만한 집인 것 같다.

길 - 난장판, 축제 그리고 민주주의

이즈음 많은 서울 사람들은 길이라는 말만 들어도 아마 머리가 지끈거릴지도 모른다. 도대체 길도 제대로 안된 도시에 웬 차는 그리 많은지! 더구나 걷는 것도, 줄서는 것도 제대로 못 마친 사람들에게 어찌 차를 맡겨서 길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드는지, 지난 연간 민주화의 열기가 가득할 때 이한열군의 장례식에 신촌부터 시청앞까지의 길에 참여했던 사람이나 그 광경을 TV로라도 본 사람들은 무엇인가 후련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이는 그 장례식이 갖는 정치적 의미 같은 것을 떠나서 길, 그 자동차들이 억수같이 다니던 그 길이 사람의 발에 되돌아 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여러분은 혹시 시청앞 그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서 그 가운데의 분수가로 가까이 걸어가보고 싶은 욕망을 느낀적이 없는가? 종로가 온통 보행자들의 천국이 되는 것을 상상해 본적이 없는가? 언젠가는 한때 대학로가 토요일 오후면 차량이 통제되고 그곳에서 여러 가지 행위들이 일어났는데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도시의 길은 고속도로가 아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보는 곳이고 또 보이는 곳이다. 그곳은 휙휙 지나만 가는 곳이 아니다. 거기에는 가다가 잠시 머물기도 하며 또는 아예 눌러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곳이다.

독일의 라인강을 따라 포도재배 및 포도주가 성한 도시, 마을들에서는 보통 봄이 오는 초엽인 2월 중순경이면 카니발이라는 행사가 있다(아헨시에서도 물론 카니발이 있다). 이에 대하여는 그 연원이 구구하나 한편으로는 음험한 겨울을 어서 떨쳐버리고 다가오는 봄과 더불어 대지의(생산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우리네 입춘대길적, 지신밟기적 의미와 다른 한편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앞으로 부활절(보통 4월 초나 중순)까지 계속되는 금욕기간 전의 하나의 살풀이적인 의미가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카니발의 여러 행사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로젠몬탁(Rosenmontag)이라고 하는 월요일에 시의 중요한 길을 온통 차량통행을 중지시키고 시민들이 각양각색의 옷 및 모습으로 일상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길을 메우며 소리지르고 노래하며 마시며 춤추는 것이다. 거기에다 이 카니발을 준비해온 시내의 각 카니발클럽들이 악대를 편성하여 앞세우고 차에다 요란한 장식 등을 연도의 사람들에게 뿌리며 몇킬로나 열을 지어 행진하며 연변의 기타 사람들은 같이 환호하거나 춤추며 길 주변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온통 창문을 열어제끼고 내다보면 함성을 지르는 그야말로 길, 연변, 연변건물이 통틀어 하나가 되는 것은 정말 길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모습이다.

우리의 전래민속극놀이의 구성이 길놀이와 판놀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길은 우리에게도 역시 오가는 것 이상의 무엇이었음이 분명한데 그런 것이 없어진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더구나 그런 것들이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던 일제의 독재의 방편으로 사라졌다고 하니 참으로 분통터지는 일이다. 독재는 아무래도 시민들이 길의 주인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이 점은 많은 독재자들이 길은 크게 넓게 만들되 길에 사람은 별로 없고 위압감과 썰렁함만 감도는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우리는 이제 민주화의 탄탄대로에 들어섰다고 말들한다. 그런데 진정 우리가 민주화의 탄탄대로로 들어서려면 무엇보다 먼저 길을 시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데모나 하고 돌 던질때에나 억지로 길이 시민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닌 즐거운 축제의 기쁨의 길로서.

길은 마을의 거실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즈음 도시의 이웃관계의 소원함, 또는 더 나아가 인간의 소외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치 이런 것들이 산업화, 문명화된 도시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숙명적으로 감수하려고까지 한다. 그리하여 주택의 문제에 대한 것이 거론되어도 대부분이 주택 내부의 크기나 방배치, 설비 등이 그 중심 테마가 된다. 즉 네 벽으로 둘러싸인 내 집안에서만 문제가 없다면 만사 O.K라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거야말로 눈이 모두 한쪽으로 달린 가자미 같은 생각이다. 당장 밖의 길에서 자동차들이 붕붕거리는데, 길에 쓰레기 더미가 쌓이는데, 길이 울퉁불퉁 비만 오면 물이 고이는데, 부근의 공장에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데 집안이 아무리 잘꾸며진들 이 모든 위협에서 보호해 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사람이 어찌 집구석에만 틀어박혀 살 수 있는가! 좋건 싫건 이웃은 있게 마련이고 집밖의 나들이는 필요하게 마련이다. 어린이가 있는 가장은 이점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도심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번듯하고 번쩍거리는 유리로 둘러싸인 대형건물들이 앞을 다투어 건설되며 건물 내에는 상가며 식당이며 약국, 병원 등등이 갖추어져 마치 모든 일이 그 건물 내에서 이루어 질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점심시간쯤의 도심지를 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좋은 건물을 뒤로하고 길로 나오는지! 그 이유는 구구히 깊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은 건물 내부와는 다른 외부를 경험하고 싶어하며 그 외부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것이 도시에서는 길이다.

자! 길이 이렇다면 길은 분명히 이런 요구에 맞게 계획, 디자인되어야 함이 지당하리라. 즉 길은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의 거실로서 여러 가지 다양한 행위를 담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택내의 거실에 의자나 탁자 또는 기타의 소품 등 가구를 놓듯이 길에는 그곳에서의 행위에 필요한 길가구(Street furniture)가 요구된다. 그뿐 아니라 길은 방과 비슷하게 바닥, 벽(길가의 건물 등) 그리고 지붕(하늘이나 캐노피 등의 유리덮게)으로 구성되는데 그 어느 것도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재미있는 길이(거실이) 이루어지기 어려우리라. 길이 집의 거실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거실이 점적이며 정적인 곳인데 비해 길은 선적이며 동적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길에서 움직이며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되며 사람에 따라서는 그 길중의 어떤 곳을 특별히 좋아하며 특별한 장소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기도 한다. 이같이 길은 사람들의 사회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장소와의 일체화에도(즉 우리의 길, 우리 동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헨시의 길들은 우선 칼로 자른 듯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지 않아 왠지 마음의 부담이 없어 좋다. 제법 구부러져 있는 길들은 어디서나 확 트였다는 느낌보다 둘러싸인 느낌을 받게 되어 사람들이 그곳을 빨리빨리 자나가 버리지 않고 좀 머물러도 될 것 같은 어찌보면 방 같은 느낌을 준다. 거기에다 거리들은 새로 확 뚫은 길들이 아니기에 제각기 나름대로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예를 들어 옛날에 그곳에 사과나무가 서 있었다든지, 또는 양조장이 있(었)다든지, 또는 어떤 유명한 사람이 그 곳에서 태어나거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며 이것은 그 길의 이름에 나타나거나 또는 거기 서 있는 건물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 외에도 길의 한가운데에 작은 조형물을 세워 이를 상기시키는 것도 자주 보인다.

그런데 이 조형물들은 그 크기나 위치가 멀리 떨어져서 보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쉽게 만져보거나 타보거나 기대보거나 하여 쉽게 친숙하여질 수 있는 것들이다.

어린이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특히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참을성 없는 엄마, 아빠는 이런 곳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다 못해 의례 아이들과 다투거나 아예 주저앉아버리기도 한다. 이같이 도심은 어린이들의 놀이터로도 의미가 있는 곳이라니 우리에게는 먼 꿈나라 이야기일까? 결국 어떤 질도 양을 당해낼 수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