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느의「밤의 끝으로의 여행」
함유선 / 수원대 강사, 번역문학가
셀린느 탄생 1백주년 맞이하여 문학적 재능 재평가 등 활발
올해는 작가(의사이기도 했던)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Louis-Ferdinand Celine, 1894∼1961)가 태어난 지 1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프랑스 문학계는 그의 탄생1백주년을 맞이하여 앞다투어 의사로서의 루이 데뚜슈(Louis Destouches)의 삶과 작가로서의 셀린느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는 그의 작품을 전집으로 묶어 차례로 간행하였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네 번째 작품집인「셀린느, 소설집」을 발간하였다. 또한 끊임없이 격랑에 휩쓸리며 이리저리 떠도는 조각배처럼 수모와 치욕 속에서 유랑의 삶을 살았던 그의 생애에 관한 연구도 활발하다. 그의 전기로는 이미 세 권으로 간행된 바 있는 프랑소와 지보(Francois Gibault)가 쓴 전기「셀린느」(1977, 1981년, 1985년에 출판), 모리스 바르데슈(Maurice Bardeche)가 발표한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1986년 출판), 프레데릭 비뚜(Frederic Vitoux)가 쓴 전기「셀린느의 생애」(1988년 출판) 등이 있다. 이들의 작업 이외에도 최근 필립 알메라스(Philippe Almeras)가 쓴 「증오와 열정 사이의 셀린느 : 마스크를 쓰지 않은 전기」(1994년)가 출판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알메라스의 작업은 그가 셀린느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 작품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히 사실에 입각하여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인간으로서의 셀린느의 모습에 초첨을 맞추고 있다.
각 월간지와 주간지에서도 특집으로 셀린느의 굴곡 많은 삶과 뛰어난 문학적인 재능을 재평가하는 작업과 아울러 그동안 출판되지 않은 미발표 원고 등을 발굴하여 그의 문학세계를 새로이 조감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작가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 본명은 루이 데뚜슈. 그리고 작가이기 이전에 의사였던 데뚜슈 박사. 그러나 그의 삶에서 의료 활동과 문학 활동은 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두 개의 작업이 그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기억하게 되는 것은 전쟁에 대한 기억이다. 이렇듯 프랑스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은 기이하게도 나치에게 협력하고 유태인을 배척한 작가라는 노란 낙인과 함께 늘 거론되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가려 그렇게 전쟁의 아픈 상처와 함께 떠올리게 되는 작가로 남아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직도 그 전쟁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한 많은 프랑스 사람들의 심정적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 자신 스스로 용서받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또는 용서받을 일은 아예 없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루이 데뚜슈는 1894년 파리 근교의 꾸르브와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다(나중에 의사 생활을 하고 글을 쓰게 되면서 필명으로 사용하는 셀린느라는 이름은 그의 외할머니에게서 따온 것이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외아들이라서 그런지 부모의 각별한 보호와 사랑 속에 유년 시절을 보낸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1914년 1차대전 중에 지원 입대를 한다. 기병대원으로 참전 중에 중상을 입고 퇴역을 한다. 그리고 렌느에서 의사수업을 하면서 1919년에 렌느의 의과대학장이 될 폴레 교수의 딸 에디트와 결혼을 한다. 1924년에는 「필립 이냐스 셈멜바이스의 삶과 작품」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결국 문학적인 이 학위논문은 셀린느 자신이 자신의 첫 소설 작품으로 꼽고 있을 정도이다. 곧, 의사소설이라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1924년부터 셀린느는 의사와 작가라는 직업을 동시에 병행했다는말이다.
그리고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독일, 덴마크, 영국 등지를 거의 맹목적으로 떠돌며 의료활동을 한다. 이때의 부침(浮沈)이 많았던, 떠도는 삶이 곧 셀린느의 미래의 삶과 그 여정을 예고해주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을 여행으로 보고 그 끝없는 항해를 시도한 작가 셀린느는 실제로 여기 저기를 떠돌아다니는 방랑생활을 한 것이다. 곧 그의 삶의 이정표는 그가 작품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뿌리 내릴 곳은 밤의 끝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가능한 여행이었다.
그 뒤 1928년에 귀국한 셀린느는 파리 근교 끌리쉬에서 역시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의사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낮에는 의료활동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생활을 하면서 1932년에 문제의 작품「밤의 끝으로의 여행(Voyage aubout de la nuit)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발표되자 곧 문단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우선 이 작품에서는 이제까지 그 어떤 소설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비어와 속어 등이 그대로 여과 없이 문학언어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언어의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혁명적 문체와 사회 통념을 무시한 충격적 내용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작품은 문단에서 문제성 있는 작품으로 주목을 끌었지만, 처음으로 문학상 수상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작품이라는 점이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발표된 그 해에 콩쿠르 상의 수상작으로 거론되어 수상이 확실히 되었으나 결국 많은 논쟁 끝에 거부당하고 만다. 그러나 그 뒤 르노도 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랑스 문학에서 셀린느의 등장은 이른바 졸라 성향의 사실주의적인 문학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문단에 주된 기류를 이루고 있던 초현실주의자들처럼 그도 역시 1차 대전이라는 전쟁을 겪고 그것이 그의 소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자양이 되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은 그 이전의 그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그 뒤에 등장하게 될 수많은 미래의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이른바 문학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20세기의 위대한 지성으로 회자되는 실존주의 작가 시몬느드 보브와르는 이 작품이 식민지 정책과 인가의 상투어구, 사회를 신랄하게 공격함으로써 앙드레 지드와 알랭과 발레리와 같은 작가들의 대리석처럼 차디찬 문장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사르트르도 또한 셀린느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첫 작품으로 세계 문단의 주목을 끌게 된 셀린느의 1936년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린 자전적 작품이라고 한 소설「외상죽음」을 발표하여, 또 한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소설「죄의 고백」이나 반유태인적 성향이 농후한「벌레 같은 놈 없애버려라」, 친독일적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궁지」등을 발표함으로써 반역적 작가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레지스탕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셀린느는 덴마크로 망명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1944년 셀린느는 가족과 함께 독일군의 화물차를 타고 프랑스를 떠나 베를린으로 피신했다. 1945년 덴마크로 망명하지만 코펜하겐에서 전범자로 몰려 체포, 투옥되었다. 그리고 1950년 파리 법정은 셀린느에 대해 대독협력 전범자로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1년, 벌금 5만 프랑, 국적 박탈, 재산 몰수 판결을 내렸다.
공산주의 작가들은 셀린느의 사형을 요구할 정도로 그에 대해 극도의 적의를 나타내었다. 그 뒤 특사로 풀려난 셀린느는 1951년 프랑스로 귀국하는데, 그의 귀국은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53년 파리 근교의 뫼동(Meudon)에서 개업하고, 계속해서 그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망명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소설「이 성에서 저 성으로(D'un chateau a l'autre)」(1957년 출판)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셀린느의 문학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움직임을 일게 하였다. 또한 영국과 미국과 독일 등 세계 문단에서도 그의 작품을 전후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셀린느는 그가 살고 작품을 썼던 뫼동에서 1961년 사망했다. 그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독창적인 주제와 혁명적인 문체로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의 문학적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성과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또한 그의 죽음과 아울러 그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와 증오도 사그라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는 아직 문학비평가들의 진정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듯하다.
그 당시 그는 시대의 조류에 무분별하게 휩쓸리거나 정치적 상황에 영합하려는 계산적인 반유태인 주의자도 아니었고, 어떤 정치적 출세를 꿈꾸는 허황된 기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그 어떤 이즘이나 신념도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철저히 반유태인주의, 반전주의, 반공산의, 반자본주의, 무정부주의적 논쟁 활동으로 좌우양진영에게서 공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가두려는 이념의 사슬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서 자신만의 신념에 철저하게 복종함으로써, 그 자신의 신념의 정조를 끝까지 지키고자 투옥되었으며 끝내 그는 그 자신의 투옥에 대한 그 어떤 설명이나 해명도 더더구나 변명은 결코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침묵하고 글을 썼다. 셀린느의 생애를 전기로 출판한 프랑소와 지보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그 어떤 관례나 규범도 일단 의심했고 한 사회 질서가 내포하는 불의와 위선에 서슴지 않고 욕설을 퍼붓던 서민출신의 귀족'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를 이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로 꼽고 있다. 그런데 프루스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삶을 살았던 셀린느는 그의 뛰어난 문학성에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부유하고 귀족적이고 평생 직업도 갖지 않고 칩거상태에서 품위있게 고요한 삶을 살았던 프루스트의 삶이나 문학은 이제 새롭게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 소설 셀린느에 의해 동정(童貞) 잃어
"그것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로 시작하는 소설「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주인공이 의예과 학생 바르다뮈가 지나가는 부대의 모습을 보고 갑자스럽게 군대에 합류하는 것으로 이 소설이 갖는 여러 가지 돌발적인 상황을 예고한다. 그 우스꽝스런 입대와 전쟁터에서의 방황은 앞으로의 주인공의 삶을 미리 예시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말한 '상상적 여행'의 시작이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셀린느는 인간들에게 진실을 말하려고 했다. 그것은 곧 인간들이 행하고 있는 진실이다. 삶은 죽음이라는 이면이 없이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조건을 지닌 진실이며, 인간들 자신에 대한 진실이며, 인간들 자신에 대한 진실이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들의 미음 속에는 예외없이 가난하건 부자이건 간에 '악랄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진실은 파스칼에서부터 프로이드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되풀이되어 오고 있는 사실이다.
육욕에 동정(童貞)이 있는 것처럼 공포에도 동정이 있다고 셀린느는 말한다. 그처럼 소설에도 이를테면 동정이 있다. 그런데 프랑스 소설을 셀린느에 이르러서 그 동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우선 구조의 문란함을 들 수 있고, 또 어휘의 음란함이다. 소설 자체가 음란하고 구역질나는 어휘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을 조소와 야유가 지배한다. 또 가주어와 가목적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이것은 이 소설이 구어체로 쓰여졌기 때문이긴 하지만, 많은 경우 단어들이 그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곧 동정을 잃었다고 해서 소설이 더럽혀지고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습을 정면에서, 측면에서 충분히 보기 위해서 그는 이렇게 지금 세상과 단둘이 마주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육체란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희생의 제물이 될 것이고 또한 고깃덩어리 자체도 내장과 느슨함과 추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런 갑작스러운 계시'를 깨닫게 됨으로써 이 소설의 주인공 바르다뮈는 구토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비르다뮈는 육체라는 것이 '진열된 내장들과, 누르끄름하고 창백한 비곗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바르다뮈는 악에 대한 철학적인 탐구를 계속한다. 다시말하면, 전쟁과 질병이라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무한히 되풀이되는 두 개의 악몽에 대한 탐구이다. 그렇다. 그것은 악몽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인간의 진실은 그렇다면 무의식속에 있다. 무의식에는 또한 어떤 부정적인 힘이 서식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죽음의 충동이다. 가학증과 피학대증이 뒤섞인 충동이다. 셀린느는 바로 이런 것이 세계를 이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진실은 곧 죽음인 것이다 셀린느 자신이기도 한, 피로에 지친 이상주의자 바르다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곳에서나 벌어지는 도살 행위에 몸을 바치는 세계에서 구원받기란 불가능하며 인간은 자리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따라서 이 세계의 진실은 죽음이다"라고.
여행은 필요하다. 그것은 상상력을 움직이게 한다. 그 나머지는 전부 실망과 피로 뿐이다. 우리의 여행은 완전히 상상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그 힘이 있다./여행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 사람, 짐승, 도시, 자연, 이 모든 것은 상상에서 나온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리트레가 말했듯이 분명하다./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다. 눈을 감기만 하면 된다./그것은 우리 삶의 저쪽이다.
그러므로 그 진실인 죽음을 향해서 가기 위해서는 여행을 해야 한다. 셀린느가「밤의 끝으로의 여행」모두(冒頭)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삶이라는 이 험난한 항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진실인 죽음, 안정된 그 죽음. 그 죽음을 향해 가기 위해 평생 주변을 떠돌아야 했던 셀린느의 삶.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간에 그는 평생을 파리라고 하는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에서 맴돌았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 어느 곳에도 뿌리박지 못하고 가난과 질병을 찾아다니며 글을 쓰고 환자들을 치료했던 셀린느. '인생의 괴로움의 순간에 찾아와 주는' 한 사람인 '의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했던 셀린느. 그는 우리 인간이 겪는 보잘것 없고 자질구레하고 짐승스럽기까지 한 이 비참한 생을 여과없이 그리면서 동시에 그 괴로움을 치료해주는 의사의 역할을 서슴없이 떠맡은 한 시대의 사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