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문학

무덤, 연못, 가야금




신범순 / 문학평론가, 관동대 교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인생의 절벽과 심연, 구비와 갈래길에서 끊임없이 던진다.

우리의 책들은 그러한 질문에 대답하려는 시도들이며, 우리의 모험과 탐험, 도박과 전쟁, 그리고 수많은 제도들의 성곽쌓기 역시 그러한 것들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바다나 하늘 속으로 들어가고, 땅위에 성을 쌓으며, 저 먼 들판을 가로질러 이방인이 세계를 침범한다. 춤을 추며 상대방을 사로잡고, 우리를 둘러싸는 모든 것들을 치밀한 언어들의 창고 안에 쌓아놓는다. 그것들을 우리들의 영원한 재산으로 만들고 그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해 언어들의 무기를 다듬고, 그것들의 길고도 지루한 전쟁 속에 밤을 지새우는 막사들을 세운다. 우리는 삶을 만들어가는 수많은 방식들을 개척해 왔던 것이다.

요즘의 시들 중에서 나는 삶을 만들어가는 이렇게 거대한 장에서 자신을 부풀리고 파들어가며, 눈부신 여러 가지 빛줄기로 사로잡고자 하는 몇몇 이미지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박서원의「무덤으로부터의 유년」과 장석남의 「연못을 파서」, 그리고 송재학의「푸른 빛과 싸우다」등이 바로 그러한 작품들이다.

박서원의「무덤…」은 익숙하게 예상할 수 있는 말들을 비껴가면서 자신의 추억과 성장과정에서 겪었던 낯선 세계의 신비로움을 들려준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낯설음,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변신을 둘러싸고 마법적인 빛으로 반짝이는 낯선 세계가 펼쳐진다.

'외할머니는 나를 발(足)로 찼네 어서어서 구석으로 들어가

깊은 잠을 자라고 구석에서 너른 들판의 메뚜기가 되어 뛰라고

어둠은 거대해서 내 눈은 반딧불이었는데 검은 자개장롱은 방안 가득

아가리 디민 공룡 같았지

……

마녀의 주문으로도 태양은 떴지

반딧불 내 동공이 이를 닦고 세수를 하자 공룡같던 장롱도

초원과 밀밭 어머니도 모두 몰고 가버렸지 그렇다네 그렇게 비참한 일도 없었다네'

「무덤으로부터 유년」부분 (『현대시』, 1994년 3월호)

그녀는 우리들 유년의 낯선 어둠을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독특한 이미지로 만들었다. 우리들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던 그 '구석의 어둠'을 이 시는 다시 선명하게 일깨운다.

그 구석은 아직 기대고 끌려다니며 안아주어야 되는 유약한 존재의 비참한 침실이다. 그 침실에서 불안한 꿈을 키우고 가장 어두운 '무덤'의 자리에서까지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키며 풍요롭게 할 위안의 목소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무덤을 여는 다정한 목소리"는 그 어둠 속에서 빛나는 '마녀의 태양'을 검은 환상의 하늘에 띄운다. 눈을 감고 보는 무덤의 언덕 위 세계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거대하고 환상적인 화려함으로 한껏 부풀린다. 우리는 이러한 환상들을 잠의 꿈 속에서 끊임없이 현실 속으로 퍼낸다. 그리하여 현실의 빈약함을 꾸준히 메워나간다. 박서원의 악마주의는 꾸준히 자신의 환상의 태양으로 우리 현실의 어둠인 일상의 빛을 비추려 한다. 그녀가 그러한 환상들을 좀더 현실의 명확한 윤곽과 긴장되게 대비시켜 준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장석남의「연못을 파서」는 자신이 겪는 모든 체험들을 끌어안고 그 깊숙이까지 비추는 깊이의 거울을 빚어낸다. 우리들의 추억이 그러한 거울 속에서 끊임없이 생생한 그림자를 다시 되비쳐 줄 수 있다면 우리들의 행복은 배가될 것이다.

그의 '연못'은 그러나 장석남 특유의 상상적 노동에 의해 자신의 일상적인 매혹으로부터 시작해서, 억압적 굴레와 멀리 빛나는 하늘에 대한 동경, 그리고 거리의 작은 행복들, 고통들에 이르기까지 껴안는다. 그것은 마치 높은 경지의 수련을 쌓은 승려처럼 넓고 깊고 투명하다. 그러나 그 연못이 그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는 망설임을 보인다.

그의 시는 '연못'의 이미지를 좀더 강력한 에너지로 키워내지 못한다.

'나의 연못은 그러나

그렁그렁하기만 할 뿐

언제나 그렇기만 할 뿐

연못 허리를 밤낮 건너가는 것은

몇 개의 영롱한 빛일 뿐

아무 자국도 남기지 않는 나의 시는 세월 속에

그렁그렁하게 연못을 팔 뿐

「연못을 파서」마지막 부분 (『상상』, 1994년 봄호)

하지만 장석남의 '연못'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것은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는 환상의 부드러운 물결이다. 그 물결은 부드럽게 자신이 지나쳐버린 모든 대상들을 껴안고 쓰다듬는 수많은 손가락들을 지녔다.

그리고 그 속에 가슴 깊은 바닥을 파놓고 있다. 그러한 되새김의 공간, 그리고 조용히 영롱한 빛과 운율을 솟구치게 하는 공간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송재학의「푸른 빛과 싸우다 2」(『세계의 문학』, 1994년 봄호)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의 저 너머로부터 스며들어오는 색다른 세계를 어떻게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이는지 느껴볼 수 있다.

그의 시는 김해선의 가얏고 산조에 대한 단순한 음악감상이 아니다. 가야금의 뚱땅거리는 선율에서 그는 자신이 갇혀있는 세계와의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떠오름을 느낀다.

즉 낯설은 햇빛과 푸른 물, 공기의 이상한 켜가 그러한 세계를 감싸안고 그에게 다가온다. 가야금 소리의 꿈틀거리는 구비들은 낡은 풍경들의 쓸쓸함과 깊은 한이 서린 여인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감싸안고 있는 강산의 푸른 빛을 뒤져낸다.

'…저 소리의 몸을 더듬었을 일천구백이십몇년의 농현과 마음이 내귀를

제치고 때로 엷은 때가 묻은 동정 때로 낡은 중절모의 풍경 때로 쓸쓸한

사람의 활동사진을 느리고 흐리게 갈아끼운다 그러다가 저 잡음마저 숨죽인

푸른 산 푸른 골짜기를 첩첩 쌓아올리는 장양조의 젊은 아낙과 나루터까지

들어오는 새웃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중머리산조의 물소리!'

식민지 가얏고의 푸른 빛의 깊이에 대해서 이 시는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송재학이 숨쉬고 있는 이 '깊이'는 아직 구체적인 말이 없다.

그것은 자신의 느낌 속에서 조용한 환희의 떨림을 전할 뿐이다. 그것이 말을 될 때 잘못하면 그 느낌이 깨져나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말 속으로 그러한 것들을 끄집어내기 위한 투쟁으로 그를 몰아붙일 필요가 있다.

비록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그러한 말의 속화를 통해서 죽어버릴지라도…….

하지만 한 선율 속에서 단절된 역사의 장벽 틈새로 육체의 감각과 정신의 뒤흔들리는 뒤섞임을 통해서 스며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우리는 많은 세월을 그렇게 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