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음악

풍요 속의 빈곤




홍승찬 / 음악평론가

지난 3월 4일과 5일, KBS 홀에서는 수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이 있었다. 그리고 한달전인 2월 1일에는 조수아 벨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왔다갔다.

1992년 한 차례 내한한 바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셉 수크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수크 챔버 오케스트라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내한 공연 소식이 지면에 크게 소개되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런지 객석도 많이 비어 있었다. 그러나 조수아 벨의 경우는 달랐다. 연초부터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더니 연주 당일에는 예술의 전당 음악당이 청중들의 환호와 탄성으로 가득 찼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청중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려한 몸짓은 그칠 줄을 몰랐고, 후반부에 들어서자 청중들의 귀에 익숙한 소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그의 매끈한 외모와 현란한 기교는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미국의 대중가수 도니 오스몬드를 생각나게 했다. 어려서부터 온갖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춤과 노래에도 뛰어났던 '신동' 도니의 재주는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세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또한 그가 들려주는 감각적이고 매혹적인 음색은 테너 마리오 란자를 떠올리게 했다. 택시 기사에서 일약 세계적인 테너로 변신한 그는 분명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같은 존재였으며 적당히 통속적이면서도 감정 표현이 지나친 그의 노래는 '보통 사람들'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었다.

반면 수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그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담백했다. 전혀 빈틈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넉넉한 품과 고즈넉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자신들을 애써 드러내보이려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안으로 움츠려들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하다는 말밖에 더 이상 정확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만큼 적절했다. 바이올린 일곱, 비올라 셋, 첼로 둘에 베이스 하나로 구성된 악단의 규모에서부터 허세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연주 곡목 또한 그 정도 크기의 악단이 소화할 수 있는 것들로만 구성되었다. 13명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풍부한 음량을 발산하면서도 각 파트의 완벽한 균형과 일체감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청중들의 앵콜을 받아들이는 시점도 적당했고 체코의 민요인 듯한 짧고 소박한 곡을 앵콜곡으로 선택한 것도 적절했다.

그리고 단 한번의 앵콜을 끝으로 악보를 접어들고 무대 뒤로 재빨리 사라지는 모습에서는 조금은 얄밉다 싶을 정도의 절제와 절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내팽개쳐버린 고전 음악의 전통과 이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왜곡된 현상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수요공급 원칙이 적용된 당연한 결과인지는 몰라도 유통구조와 여과장치의 미비로 인한 일종의 오염이다. 동구권 연주자들의 내한공연이 지나치게 급증하면서 과잉공급 현상이 초래되었지만 무분별한 수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공연사업의 핵심은 일단 상품(?)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수준과 능력에 따른 차별화와 그에 따른 효과적인 홍보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음악애호가들로서는 진정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중한 순간들은 모르는 채 지나쳐 버리고, 어설픈 겉치레에만 한눈을 팔게 되는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풍요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웬만한 자극에는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한다. 살갗이 두꺼워져 신경이 무디어져가고 있다. 그러면서 차차 현대사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논리에 순응해 가고 있다. 조수아 벨이 수크 챔버 오케스트라에 앞섰다면 바로 그런 상황에 보다 익숙하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앞서 수요공급이 어떻고 유통구조가 어떻고 한 것도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필자의 한계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 곁에 꼭 붙들어 두어야 할 감동의 수난이 지나가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한때 가난한 예술가들의 보금자리였던 파리가 돈에 물들면서, 이제는 프라하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어쩌면 진정한 풍요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프라하와 더불어 그것이 품고 있는 순수한 예술혼과 음악전통을 애써 보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스크바가 자랑했던 찬란한 밤의 문화는 이미 사라지지 않았던가.

지금 교향악 축제가 한창이다. 우리나라의 직업 오케스트라들을 거의 다 모아 놓았으니 그 현황을 한눈에 파악하게 된다. 그런데 그 모습들이 천차만별이다. 이름값을 해내는 오케스트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반대로 일부 지방 오케스트라들의 분발이 눈물겹다. 민간 오케스트라의 창단 붐을 타고 수도권에 적을 둔 오케스트라는 자꾸 늘어나는데, 지방의 현실은 그것과 동떨어져 있으니 이 또한 풍요 속의 빈곤이다. 위성도시 부천의 시립교향악단이 우리나라교향악단을 대표할 만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나,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시립교향악단이 다른 지방 악단들을 앞서는 의욕을 과시하고 있는 것도 정상적인 현상이나 당연한 결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악조건을 극복하고 성취한 놀라운 결과에 대해 그에 상승할 만한 대가가 돌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또한 풍요 속의 빈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실력만큼 대접을 받지 못한다든가,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것이 없다면 풍요 속의 빈곤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만큼 있는 교향악단의 수도 부족하다고 아우성들인데, 그나마 있는 교향악단들도 예산이 없다. 지휘자가 없다 해서 쩔쩔매고 있으니 빈곤의 악순환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다. 악단들마다 늘어나고 있는 외국 지휘자들이 좋게만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까닭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음악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을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설혹 빈곤이 풍요로 바뀐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한 풍요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