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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부조리, 부조리의 죽음




함유선 / 수원대 강사, 번역문학가

부조리극에서 의미와 효과의 전달 수단은 이미지와 은유

"나와 세계를 묶어놓는 유일한 관계는 부조리의 관계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확실히 만져볼 수 있고 믿을 수 잇는 것은 이와 같은 관계의 대립, 단절, 모순, 혼돈, 낯설음, 곧 부조리뿐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작가 까뮈는 그의 저서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인간의 상황을 이렇게 정의하면서 처음으로 '부조리(absurde)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까뮈는 인간의 상황을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존재, 목적이 없는 존재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인생이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라는 절박한 질문으로부터 비롯된 방법론적 회의의 치열한 부정 끝에 얻어낸 긍정의 논리, 곧 부조리는 인간의 근원적인 사고와 삶을 지탱해 주는 최초의 바탕이며 동시에 최후의 윤리적, 미학적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도달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조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이 절망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시지프스처럼 반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듯 인간의 상황을 부조리라고 하는 한마디 말로 역설한 까뮈의 주제는 사뮈엘 베케트, 외젠느 이오네스코, 아르튀르 아다모브, 쟝 쥬네 등 이른바 부조리 극작가들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헝가리 출신의 극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마틴 에슬린이 이들의 작업을 처음으로 '부조리극'이라고 명명하였다. 부조리극이라는 것은 종래의 연극을 지배해왔던 심리나 성격을 부정하고 일관된 줄거리나 대사를 거부한다. 부조리극에서 의미와 효과를 전달하는 주된 수단은 이미지와 은유이다. 마치 시처럼 더욱 깊은 의미를 서서히 펼쳐서 드러내는 응축된 시적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이 세계의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노출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부조리극은 일관성 있는 이야기나 플롯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인정할 만한 성격 묘사도 없이 거의 기계적인 인물을 관객에게 보여줄 뿐이다.

극의 주제도 없이 시작도 결말도 없이 인간 삶의 꿈과 악몽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그리고 언어사용에 있어 무의미한 헛소리에 의존한다.

이오네스코, 풍자적 기법 사용 웃음 뒤에 페이소스 느끼게 해

부조리 극작가 중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상상력의 절대적 자유를 구가한 외젠느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 연극 「대머리 여가수」,「수업」,「의자」,「코뿔소」등으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극작가이며, 기존 연극의 아성에 과감하게 도전한 부조리연극의 기수로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던 외젠느 이오네스코가 지난 3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82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이오네스코는 최근 동맥경화로 고통을 겪어왔으나, 급격한 병세 악화로 이날 몽파르나스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오네스코는 1912년 루마니아 슬라티나에서 루마니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프랑스로 건너와 파리와 메종 알포르에서 살았으며 특히 라 메엔느 지방의 샤펠 앙트네즈의 한 농가에서 몇 년 동안 혼자 하숙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열네 살 때인 1926년 루마니아로 돌아가 거기에서 학업을 마치고 부카레스트의 고등학교에서 불어교사로 재직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가 쓴 에세이에서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 있다. 1938년 루마니아에 파시즘이 점차 강하게 대두되자 그는 아내와 함께 고국을 떠나 다시 프랑스로 건너와 파리에 정착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1950년 5월 11일 그의 첫 희곡인 「대머리 여가수」가 파리에서 니콜라스 바타이유의 연출로 무대에 올려졌을 때, 관객들은 놀랐고, 대부분의 비평가들도 당황하였다.

쟈크 르마르샹과 레이몽 크노와 같이 열광하는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는 일반 대중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익살꾼', '기만자', '허풍선이'라는 혹평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반연극(反演劇)'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을 통해 이오네스코는 사실주의 연극의 모든 관례적 형식과 내용을 파괴한다. 전통적인 줄거리 진행과 전개, 결말과 효과, 극의 심리학이 철저히 부정되는 등 극의 모든 금기사항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은 사건에 사실주의적 진술이 아니라 언어 자체이며, 일련의 진부한 상황을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야릇하고 부조리한 특성이다.

이오네스코는 사실주의 연극의 줄거리 전개, 논리, 그럴듯함을 야유하면서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새로운 극작술과 언어로써 부르주아 사회의 관습이 인간의 내면적인 삶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드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중산층을 지배하는 숨막히는 인습의 세계와 삶의 공허함을 특유의 블랙유머와 날카로운 풍자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첫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야유와 질시를 받기는 했지만 이오네스코는 그 이후에도 「수업」,「의무의 제물」,「미래는 달걀 속에 있다」,「쟈크」,「코뿔소」등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와 더불어 이 시대의 부조리극의 대가로 각광을 받는다. 베케트는 그의 대표작「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낯선 배경, 기이한 인물, 연결 잃은 대사를 관객에게 처음으로 보여줌으로써 연극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극작가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기다림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추구, 지리멸렬의 방황 속에서 통일성을 잃은 세계의 혼돈과 삶의 불합리를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부조리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절망을 표출하는 사무엘 베케트와는 달리, 이오네스코는 풍자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웃음 뒤에 진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는 그의 작품에서 독재의 암흑을 드러내는 모든 사람들의 상처받은 의식을 표현한다. 인간성의 파괴, 자유의 상실 속에서 혼란으로 가득찬 세계, 절망적 인간 조건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작품의 근원에는 형이상학적인 고뇌, 죽음의 상징화

이오네스코의 작품은 프랑스 내에서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차츰 프랑스에서 인정을 받게 되고 그 뒤 세계적으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그의 작품은 세계 각 곳에서 번역, 공연되었다. 특히「코뿔소」가 1958년 베를린에서 초연 되어 대단한 반응을 일으키고, 1960년 쟝 루이 바로의 연출로 파리에서 상연되면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우리 나라에서도 1961년 극단 실험극장이 「수업」을 처음으로 소개하였으며, 「대머리 여가수」도 공연되어 우리 나라 연극계에 새로운 충격을 던져주었다. 특히 1970년에 이오네스코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됨으로써 그가 그 동안에 받았던 모든 부정적 평가를 씻어 버릴 수 있는 명예를 얻게 된 것이다. 지난 1977년에는 국제문화협회 초청으로 우리 나라를 방문하여 동양극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오네스코의 작품의 근원에는 인간 조건의 비극을 앞에 둔, 형이상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고뇌가 가해지고 있다. 그 불안에서, 꿈과 깨어있음 사이에 걸린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오네스코는 일종의 최악의 술책과도 같은 것에 호소를 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운명인 죽음, 근원적이고 악몽과도 같은 죽음이 우리의 일상에서 떠나지 않고 있음을 상징화하고 있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논리 이전의 문제이며 이를테면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우리를 기다리는, 때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과 허무의 그림자, 그는 그 죽음을 통해서 비극에서 돌연 희극으로, 웃음에서 다시 눈물마저 잃은 절망으로 급전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본능, 곧 사랑,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오네스코의 연극에서 보여주는 무대도 또한 진부한 일상생활에 젖은 텅 빈 의식들의 현실이며 그들이 기대하는 진부한 현실의 복사이다. 이 무대는 관객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한 연극을 받아들이라고 역설하거나 강요하지도 않는다. 한편으로는 강한 패러디적 성격으로 의아심에 맹타를 가함으로써 의식을 일깨우고 다른 한편으로 수식없이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충격은 극의 진행과 더불어 리듬을 타고 더욱 압력을 가해 온다. 숫자의 개념을 잊고 울려대는 시계(「대머리 여가수」), 거실바닥에서 돋아나는 버섯(「아메데」)이 무대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일상적 논리를 파괴하다가 스스로 산산조각나는 언어가 난무하는가 하면(「대머리 여가수」,「수업」), 보이지 않는 사람들 대신 빈 의자가 가득하고(「의자들」), 한 인물이 경찰에서 관객으로, 아버지로, 의사로 바뀌며, 응접실이 지하 세계로, 극장으로, 산꼭대기로 변하고(「의무의 제물들」), 사람이 자라나는 시체를 타고 나르고(「아메데」),연극이 끝날 때까지 대머리 여가수와는 어떤 연관도 보여주지 않는 (「대머리 여가수」) 연극 등 그의 초기 작품에서 일관된 극작법은 가히 반연극이라고 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그래서 클로드 아바스타도 (Caulde Abastado)는 이오네스코의 극을 앞선 '40년대 연극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이오네스코의 극작품의 특성은 시적인 언어와 모순성이 넘치는 힘있는 언어로 인간의 비극을 조롱하는 희비극적 요소가 항상 공존한다는 점이다. 미셸 꼬르뱅(Michel Corvin)은 이오네스코의 작업을 "모순으로 넘치는 비합리적인 세계를 넘어서 그 이상의 세계를, 그리고 형이상학적일 정도의 고뇌를 가한 언어의 유희로 연립적 진실의 세계를 지향하고, 나아가서 진실이 없는 중성적 무의미의 세계를 이루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결국 이오네스코의 극작품은 언어의 혼란과 해체를 통한 인간현실의 진실한 고백이다.

이제 비인간적이고 사회에 악을 가져오는 문명의 모든 이기에 대해서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이오네스코는 그 비판의 대상이었던 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 비인간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가 꿈꾸고 그려왔던 그 세계에 들어가서 갈등을 극복하고 진정한 연극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그 공간에서 그의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