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 제주

제주의 사월 달군 제1회 4·3예술제




허영선 / 제민일보 교육부차장

돌아온 제주의 사월은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이 열기는 현대사의 비극이자 제주민의 지울 수 없는 아픔인 4. 3이 잊혀질 만하면 다시 사람들의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역사가 제주민을 지배하는 무게는 규정지을 수 없을 만큼 버겁다. 4월의 노래들은 그래서 그리 가볍다거나 경쾌한 봄의 향취일 수는 없는 것이다.

제주의 유채꽃이 노랗게 현란한 반면 이 이면에 배인 깊은 슬픔을 눈치채는 이 얼마나 될까. 이 지역민들에게 제주의 사월은 이제 예사로운 어감이 아니다.

4. 3 항쟁이 일어난 지 마흔여섯 해가 지난 올해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범도민적 4. 3합동 위령제가 합동해변에서 열려 더욱 뜻이 깊었다. 게다가 이때를 맞춰 얼마전 창립된 제주민예총이 전력을 기울여 4월예술제를 대대적으로 열었다는 점에서 도내 문화예술계는 야릇한 흥분이 일었다.

그렇다고 이 예술계가 거칠고 강한 목소리를 치켜올린 것은 아니다. 4월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김한다는 뜻이 강하게 깔렸다는 것이다.

제주민예총 문무병 대표는 "지금까지의 예술작업이 간헐적이고 단편적이었다는 점을 중시하면서 이제 제주지역 민족예술인들의 뜻을 한데 모아 4.3의 진상규명과 도민 명예회복 그리고 억울한 넋들에 대한 진원을 하려 했다" 고 말했다.

이번 예술제는 3월 31일 저녁 7시 제주도 문예회관 놀이마당에서 이제는 이 지역 '젊은 심방'으로 불리우는 정공철이 집전한 초감제를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4.3 진상규명과 억울한 넋들을 위로하는 초감제에서 정공철은 특유의 떨리는 듯,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사설로 관중을 사로잡았고 관중들은 영감놀이, 군웅놀이가 이어지자 함께 나와 어깨를 자웃거리며 걸찍하게 한판 굿판에 어우러졌다.

이 예술제에는 제주민예총의 모든 장르가 동원되었다. 문학의 밤, 마당극 공연, 노래공연, 그림전시, 강연, 사전전시, 책자발간 등 다양한 형태들이 도민들의 발길을 끌어 들였다. 이 행사에 쏟아보낸 관객들의 느낌은 새로운 문화운동의 힘을 감지 할 수 있었다는 경이로움이었다.

제주민예총 문학분과위원회(회장 김광렬)가 마련한 「제1회 문학의 밤」은 지금껏 이러한 자리를 접해보지 않았던 많은 시민들에게 이색 체험을 갖게 했다.

당초 예상보다 많은 2백여 명의 학생과 일반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저녁 7시에 시작, 10시가 가까워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참석자들은 시종 진지했다.

1부는 1992년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4. 3 당시의 11구의 유골발굴 장면을 비디오로 담은「다랑쉬의 슬픈노래」를 상영, 숙연한 감정을 일으키게 했고, 이어 회원들은 이 행사에 맞춰 시인들의 4. 3 시를 엮어낸 소시집「아직 다 부르지 못한 4월의 노래」속에 담긴 자기 시를 낭송, 분위기를 돋웠다.

또한 이날 행사의 핵심인「순이삼촌」으로 4. 3 소설의 시발을 일으킨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기영씨가 강사로 나선 4. 3 문학강연이 이어져 200여 참석자들의 진지한 경청이 있었다.

이날 강연을 통해 현기영씨는 4. 3 문학은 이제 살아남은 자의 한을 풀어내는 형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식의 변화를 꾀해야 하고 보편성을 획득,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로 문학성을 창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80년대의 문학이 위락의 기능과 공동체 구성원들의 결속을 추구하는 기능을 했고 이때 4. 3 의 활발한 문학화 작업이 이뤄졌지만 보편성 획득에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4. 3 문학은 단순계몽주의적 성격의 교훈조에서 벗어나 정교하고 내구성 있는 충실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작가는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대상을 관찰, 설득력 있는 문학을 표출해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이번 예술제에서 가장 상징적인 효과를 보이며 많은 관람객을 동원하고 대중적인 정서를 일으키는데 일조를 한 장르는 탐라미술인협의회(대표 강요배)의 4. 3 미술제.

이 전시회는 「닫힌 가슴을 열며」라는 부제를 달고 세종미술관과 제주도 문예회관 전시실을 동원한 대규모 전시회로 제주도 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전시회에는 도내 미술인이 대거 참가, 처음으로 역사 그림들을 그려냈다.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 이 전시회에는 회화, 판화, 사진, 설치미술, 조각 등을 망라, 제주인의 아픔을 정서적으로 승화시킨 작품들과 사진으로 당시 상황을 묘사한 작품들, 초가를 불태워 한 농촌의 광장을 비디오아트로 재현한 작품들은 충분히 감동적인 눈길을 끌 만했다.

이 전시기간 중인 4월 3일 오후에는 세종갤러리에서 목포대 원동석 교수(미술평론가)가 「현대사와 미술」을, 탐미협 문예비평연구회 김유정씨가「제주 4. 3과 미술」을 주제로 미술작품 슬라이드 상영과 이와 관련한 강연회를 개최, 4. 3 미술의 진행과정과 그 의의를 살피는 시간도 마련됐다.

제주민예총 산하 놀이패 한라산은 16일과 17일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 무대에서 사월굿「사월」공연을 펼쳤다. 「사월」은 4.3 에 대한 총론적 접근으로서 4.3의 전과정을 서사적으로 구성했는데, 놀이패 한라산의 열다섯 번째 마당판, 이 굿은 4.3 의 성격을 명확하게 관철해냄으로써 도민들의 바람인 진상규명을 통한 억울한 넋의 신원임을 천착해 낸다는 기획 의도를 담은 작품.

모두 여섯 마당으로 구성, 첫째 마당은 8.15해방 이후 제주도 각 마을의 독립에 대한 기쁨과 야학 등으로 나타나는 폭발적 교육열기, 공출 반대로 나타나는 도민들의 자치열기 등 당시 상황을 보여주었다.

둘째 마당은 1947년 3.1절 기념대회 도중 한 어린이가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이는 사건을 계기로 걷잡을 수 없이 분출하는 도민들의 저항과 발포로 맞서는 군정과 경찰이 그려지고 이후 도민들이 전도적인 총파업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투쟁. 당국은 육지부에서 서북 청년단 등을 불러들임으로써 대 탄압을 예고한다는 사실을 그려냈다.

셋째 마당은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한 농촌에 서북청년단들이 들이닥쳐 행패를 일삼는 등의 고통에 찬 장면들이 묘사됐다.

넷째 마당은 1948년 4월 3일 한라산 오름마다 봉화가 오를 수밖에 없었던 사건을 다루고 있고, 다섯째 마당은 5.10 선거를 피해 산으로 숨는 도민과 선거 무효에 당황한 미군정이 제주도에 비상계엄을 내리고 무장대에 대한 토벌을 강화, 무장대가 군경토벌대에 궤멸되는 과정을 그렸다. 짜임새있게 극을 구성 리얼리즘 연극의 맛을 보여준 이 사월굿은 마당극으로 오랜 관록을 갖고 있는 김수연과 윤현숙이 제작했고 정공철, 한경임, 양근혁, 윤현미 등 15명이 출연, 열연을 보였다.

이밖에 노래패인 섬하나 산하나는 시와 노래 영상을 함께 엮어낸 무대를 꾸며 주었다. 4월 1일과 2일 이틀간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4.3 추모공연을 가졌다.「진혼」이란 부제를 달고 연 이 공연에서는 「한라산」,「일어서는 사람들」등 9곡이 선보였다. 연출은 안미정이 했고 문광원, 안미정, 오길호, 고봉기, 김대용, 고세실리아, 고현민, 송명환이 출연했다.

이번 예술제는 준비기간이 비교적 짧고 예산상의 어려움이 심해서 각 분과의 역량을 충분히 표출해내지 못했다는 아쉬운 점을 감안, 제주민예총은 올해는 분위기를 일단 녹여냈다는 점에서 만족하고 내년부터는 더욱 치밀하게 행사를 준비하고 홍보에도 신경을 쓸 것이라는 종합적 평가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