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초점

공연예술 창작활성화 평가보고. 무용




장의근 / 평가위원, 무용평론가

지희영 무용단 북망산에 새사람 있으니

비극적인 것 속에 희극적인 것 키워 가는 아이러니한 복합구조

지희영 무용단은 「북망산에 새사람 있으니 - 온세상 불우했던 천재들을 위한 몸짓」이라는 제하의 한국무용을 1993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5회에 걸쳐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하였다.

이 작품은 본 문화예술진흥원의 창작활성화 지원금을 수혜한 작품으로 무용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무용극이라면 우리는 희극보다도 비극적 양식을 즐겨 선택한다.

우리가 비극적 양식을 즐겨 선택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슬픈 감정이란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쉽게 만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반면 희극은 시대, 사회, 전통, 그리고 계층에 따라 이해의 차이가 있어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극은 상위모방과 하위모방으로 대분되게 되는데 상위모방의 비극의 형식 경우 귀족이나 양반과 같은 사회 지도층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게 된다. 지도층의 경우 그가 처해 있는 사회에서는 피할 수 없는 몰락만이 그 사회로부터 고립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실 평범한 인간의 몰락보다는 귀족이나 양반의 몰락이 평범한 대중에게는 더욱 감동적인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하위모방의 비극의 형식인 경우는 상위모방의 경우에 반하여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약점에 의해 사회 혹은 집단으로부터 고립되게 되는데 이같은 약점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언제인가는 고립될 수 있다는 연상 체험을 불러일으켜 동정심을 유발,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상위모방이든 하위모방이든 여하튼 비극은 주인공의 행위의 귀결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필연성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과 애련의 감정이 환기되게 되어 공포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환기되었던 감정이 폭발, 다시 정화되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본 작품은 특이하게도 아이러니한 운명을 지닌 금화라는 여인을 극의 희생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극적이라 하겠으나 후반부에 이르러 금화라는 여인이 천신의 아들과 사랑을 하게 되어 알을 낳게 되고 또 알에서 태어난 천동이 비극에 빠진 주인공이 적을 물리침으로써 사회가 다시 융합된다고 하는 영웅적 신화를 창조해 가는 희극적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작품을 분석해 본다면 이는 비극적인 것 속에 희극적인 것을 키워 가는 아이러니한 복합구조(Complex Polt)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단락상으로는 아주 명료하게 1막과 2막으로 나뉘어, 1막은 비극적 스토리를, 2막은 희극적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으나 그 전개 과정 또한 그리 단순한 구조는 아니다.

그 내용을 짚어 보면 1막의 경우 비극 형식의 본질이라 할 죽음의 불가피성이라든가 죽음을 초래하는 모방이라든가 순교적인 성도의 죽음을 피하는 양시모와 같은 것이 있어 도덕적 지평을 찾아낼 수가 없다.

특이한 복합 구설(構設) 의도적 인과론 우연으로 대치

따라서 본 작품은 영웅적 신화를 창조할 목적으로 아이러니한 우연성을 비극적 형식 속에 삽입하여 정감적 희극으로 전이시켜가는 특수한 형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특이한 복합 구설(構設)을 구성해가는 특이한 구조론이 비극적 여인의 운명을 풀어가는 과정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인과론을 배제하고 우연성을 도입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함속에 아이러니가 있다고 하겠다.

비극의 경우 비극을 잉태하게되는 주인공의 과오는 불가피한 것이든 필연적인 것이든 반드시 주인공의 행위의 귀결로서 와지는 것이기 때문에 보는 이의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환기시키게 되고 또 이러한 감정은 적대적이든 호의적이든 윤리 판단의 척도가 되도록 구성하는 것이 정론이다.

그런데 본 작품은 전반부의 비극을 전개하면서 의도적으로 인과론을 우연적인 것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우연히 나타난 신토에게 금화가 쫓기게 된다.

·우연히 나타난 천신의 아들에 의해 쫓기던 금화가 구원된다.

·천신의 아들과 금화의 사랑의 결과로 알을 낳게 된다.

·알에서 천동이 탄생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모든 등장인물들은 우연히 무대에 나타나지며 필연적 인과론이 없다. 다만 예증을 통하여 인물과 인물이 연결되고 있을 뿐이다.

인과론 의도적인 우연으로 대치한 새로운 극 형식

예증법을 쓰기 위하여 인과론을 의도적인 우연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흥미 있는 새로운 극 형식이라 하겠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정통적 극 형식에서 본다면 논리성의 결여는 곧 모순이다.

여하튼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예증법은 작품명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북망산에 새사람 있으니」라고 하는 주제명 하단에 '온세상 불우했던 천재들을 위한 몸짓'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는 분명 묵시적으로 전달하고픈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북망산'이란 중국 하남성에 실재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죽음에 이르러서야 가볼 수 있는 종언적 의미를 던져주는 말이다. 여기 '새사람'이 있다고 한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어질 수 없는 문체론이다. 그러나 좀더 연상해보면 죽음과 새로운 삶을 연계시키고 있음을 추상해낼 수 있게 된다.

즉 죽음이란 삶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전환점임을 예지시키는 것이다.

이 작품을 무대화하고 감상하는 데에는 이같은 예증법으로 상징화 혹은 추상화된 의미를 인출해낼 수 있는 사유와 명상력을 필요로 한다. 이 작품의 예증법에 의한 난해한 구성은 '온 세상 불우했던 천재들을 위한 몸짓'이라는 부제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몸짓, 즉 춤을 불우했던 천재들을 위해 추겠다는 것이며 다분히 이상향을 위한 제축적 공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춤으로 불우한 현실을 새로운 삶을 위한 이상세계로 건너다 줄 수 있다고 하는 말은 비현실적인 것이며 추상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참으로 무용극다운 형식의 발상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술한 바와 같이 예증기법에 의해 구성되었기 때문에 연상직관력을 가지고 희곡을 분석하고, 무대를 구성할 수 있는 안무자와 관객을 요구한다.

안무자는 이같은 희곡의 예증법을 물활론적(物活論的) 해설로써 신화적 감정의 오류(pathetic fallacy)로 대치해 간다.

의인화된 물상의 춤과 인간의 춤 결합, 이중적 작업 멋져

일반적으로 무용극을 다루는 안무 방법은 춤사위 자체를 언어와 같이 지시적으로 상징화하여 극의 문체론을 따라가거나, 극적인 장면과 무용적 장면을 아무런 내적 관련을 주지 않고 시간차를 두고 무대상에 동거시켜 작품의 문학성은 극적 상황을 통하여 이해하고 춤은 따로이 춤이 갖는 상황 속에서 춤의 율동미 그 자체만을 감상케 한다.

안무자는 본 작품을 안무함에 있어 이 양자 모두를 거부한다.

즉 안무자는 자연과 같은 물상(物象)에 인간이 갖는 감정적 율격을 주어 의인화된 춤을 만들고 이 춤을 또다시 그 자연 속에 처해진 인간들의 춤과 연계, 결합시켜간다.

자연에 대한 물활론적 해석과 의인화된 물상의 춤과, 이 춤과 인간의 춤의 결합이라고 하는 이중적인 작업은 참으로 멋진 접근법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한정된 무대 배경의 정적 요소인 자연을 동적인 춤으로 전이시킬 수 있게 하여 무용의 무대를 보다 활력이 넘치는 무대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같은 탈전통적 무대구성법과 안무법은 당연히 신화를 창조하는 장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재미있어 진다.

그러나 전시적 효과를 기대한 것으로 보이는 의상의 에로틱함과 맞물려 신화적인 신비감보다 일상적 에로티시즘으로 바뀌어버린 것이 흠이라 하겠다.

이 부분에서는 물활론적 접근이 아닌 또 다른 방법론이 찾아졌어야 할 것이다. 무용이란 육체를 주된 표현의 매체로 사용하여 표현하는 예술형식이고 보니 자칫 관능적인 표현이 되기 쉽다. 그래서 무용을 연극과는 달리 부속적 형식을 채택함에 있어 더욱 전문성과 논리성을 요구하게 된다.

여하튼 신토가 금화를 탐하려는 부분의 춤은 퍽 에로틱했다.

이러한 에로틱한 분위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신토에 대한 복수심이나 극적 공포, 혹은 긴장감을 소거해가게 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극적 상승을 위해 잠시 주었던 암전은 그 어떤 공포나 긴장감도 확대시키지 못하고 우울한 명상의 기회가 되어 관객의 연상체험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그 결과 신토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게 했다.

여하튼 본 작품이 후반부에 이르러 구설을 전달하는 데 있어 난해성을 보인 것은 무용수의 춤사위를 이지화시키지 못한 데서 연유된 것이라 하겠다.

김은희 무용단 신(新) 무녀도

주제 선택 바람직, 무대화에는 유의해야

본 작품은 모화라고 하는 무녀 일가가 겪게 되는 비극적 운명을 구설의 중심 테마로 하여 서구 문명의 기하학적이라 할 이지가 몰고 온 가정과 사랑과 생명의 타락된 윤리관과 같은 현대사회의 반인류사적 오류를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사상성은 필연적으로 우리 사회가 해결하여야 할 제일의 과제임에는 틀림이 없겠기에 우선 바람직한 주제선택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의 사상성이나 철학을 무대화하는 데에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음을 상기해 본다.

즉 작품화하여 관객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수신 교과서와 같이 아무 재미도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 작품 속에 내재된 좋은 사상과 철학은 사회의식으로서의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예술이란 바로 이러한 수신 교과서와 같은 건조할 수밖에 없는 사상이나 철학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감응하게 하는 형식을 통해 사회의 총체의식이 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 본다.

이러한 관객을 감응하게 하는 형식으로 본 무녀도를 평가, 분석한다면 우리에게 즐거움을 감응시키는 형식이라기보다는 큰 고통감을 주어 우리의 내면에 응결된 감정을 자극하고 있는 형식이라 하겠다. 이것이 비극의 원리일 수도 있겠다.

우리의 삶이란 항시 기쁨일 수만은 없다.

삶이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파노라마의 연속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무대가 인생의 반영이라면 「신무녀도」는 인생의 슬픈 단면을 파노라마적으로 펼쳐가는 장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본 작품이 비극적 단면을 강력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면에는 진보된 휴머니즘적 이념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의 우리 사회의 현실상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와 패라노이어가 되어가고 있다.

작품 속에 나타나고 있는 진보된 휴머니티는 바로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모해가는 현대사회에 대한 애련의 감정을 넘어서서 번민에 찬 고통과 공포감을 가지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해석을 가하게 되는 것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심리적 증후군이 작품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서 장면 5에서 작품은 서구문명의 근원이라 할 기독교에 심취한 욱이를 한국문명의 근원이라 할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어미인 모화로 하여금 자결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꾸며진다.

이것이 이 작품이 서구문명, 혹은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곤혹스러운 의식일 것이며 형식에 있어 비극을 채택하게 된 동기라 본다.

여하튼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놓은 어미에 대한 행위의 윤리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문제는 장면 6에서 곧 풀리게 된다.

자식을 죽인 어미의 반인륜적 행위의 응징으로써 어미 스스로 물에 빠져 죽도록 구설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적 작품의 구설은 인륜, 즉 가정, 사회, 사랑, 생명을 바라보는 깨어 있는 의식을 보여주며 바람직한 세계, 우리가 꼭 이루어야 할 세계에 대한 패러다임으로 인륜에 대한 윤리성을 제시한다.

우리 사회는 서구 문명의 이입으로부터 과학과 기계주의를 낙관한 나머지 컴퓨터 베이비를 묵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지경이 되니 우리의 가치관은 응당 전도될 수밖에 없으며 인륜에 대한 불감증을 앓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

아리스토틀은 "비극이란 운명이란 것을 통해 생명의 귀중함과 존엄함을 느끼게 하여 생에 대한 벅찬 의욕과 감동을 갖게 하여야 하며 보다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생명의 귀중함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아리스토틀적 견해를 척도로 본 작품을 분석한다면, 본 작품은 모화 일가의 비극적 몰락을 통해 퇴색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가치관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주제 선택과 비극적 형식의 채택은 참으로 바른 것이다.

그러나 무대예술이란 모화 일가가 몰락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인물이나 사건을 관객 앞에 재현시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무대조건이 합쳐져야 하는 것이고 보면 관객으로 하여금 즉각적이고 영속적인 감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안무와 그 밖의 무속적 형식의 구성이라고 하는 기술의 문제가 따른다.

본 작품은 이러한 기술적인 면에서도 명쾌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오르간 음이 섞인 그레그리오 성가가 들려오는 가운데 막이 오른다. 마치 19세기 성당 안에 들어온 듯한 감응을 갖게 한다. 외경스럽기까지 하다.

회색 톤으로 일견되는 씨너리가 무대 상수의 수직 공간을 가로막고 있다. 여기에 납색 조명이 드리워져 암울한 긴장감을 더해간다.

U.R쪽 상단에 비추어진 중세풍의 성당 창문을 연상케 하는 백색 조명이 초췌한 욱이의 숨통을 다소 터주고 있다.

감관적 지각을 통해 이같이 전달되고 있는 무대 분위기는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전통 춤사위를 다소 변형하거나 확대 또는 축소시켜 양식화한 춤과 결합되어 충분한 복합 이미지(multiple image)를 창출하면서 극적 갈등과 극적 반전과 주인공의 고민과 고통을 전달해 간다.

종종 지적하게 되는 말이지만 춤이란 육체의 기층에 내재한 내면의 불가해한 감정, 즉 비애, 공포, 기쁨, 환희와 같은 농축된 감정을 해소해가는 형식일 뿐 생의 복리를 표현, 전달하기에는 부적합한 예술이다.

마임적 표현 끌어들인 형식 한국무용 활력소적 역할

그래서 춤은 춤을 춤으로써만이 쾌(Catharsis)가 소환되는 주술적 힘을 가진 형식인 것이다.

따라서 춤 본래의 모습은 현실과 이상, 혹은 정감과 사유를 결합하거나 대립시키는 것과 같은 작위성을 표현하거나 무대화하기에는 적합치 않은 일원론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예술형식인 것이다. 본성적으로 견식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본 작품은 이러한 춤의 유희적 표현력을 장치, 조명, 의상과 같은 무대상의 부속적 형식의 도움으로 논리적 구성과 양식화된 춤의 상징적 표현을 빌어 카리스마적 관념과 묶는다는 데 성공하였다고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본 작품이 때로 일상적 생활 속에서 얻어지는 인상이나 감정이 게재되는 마임적 표현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도 같은 논리와 맥락에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안무자의 형상적 사유는 그간 한국무용이 직면해 온 매너리즘(한국무용가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는)에 생기를 불어넣어 향후 한국무용의 표현력을 확대해 가는 데 활력소적 역할을 하게 될 문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분명한 창의성을 가지고 있다.

이같은 창의성이란 무용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의 핵심 과제일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창의성이 무대 전반에 걸쳐, 또 작품 전반에 걸쳐 보여지고 있다. 그 예로써 무대 장치를 들 수도 있겠다.

전통무대에서의 장치는 새로운 극적 감각의 미학적 욕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극적 반전 꾀하지 못한 안무로 연출적 효과 저하

다시 말해 전통무대에서의 장치의 배경 아크(Scenic Arc)의 고정화된 3면은 무대 마루의 수평적 평면에 의해 단순한 원근이나 명암을 나타내는 것으로 장소에 대한 설명을 던져주고 있을 뿐, 새로운 무대미학의 요구는 다이내믹, 즉 동선의 발전 같은 것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본 작품의 장치는 씨너리 3면에 열고 닫을 수 있는 가변성의 출구를 내어 등·퇴장에 따르는 다표현적 동선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미흡함이 있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씨너리가 전체적으로는 고정화되어 있어 대립되고 이완되는 극적 상황에 가변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씨너리의 회색조의 고착된 색상이 조명의 조도와 색도를 약화시켜 크리스차니티와 같은 아폴론적 이미지를 약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구조를 좀더 분석해 보자. 욱이와 어머니의 상반된 믿음과 갈등, 욱이의 가출과 낭이와의 사랑, 욱이와 낭이의 상간적인 사랑.

이같이 극은 반전되어 낭이와 욱이 사이에는 또 다른 갈등이 생겨나게 되며, 여기에 모화가 끼어들어 그 갈등의 평형을 깨게 됨으로써 욱이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자식을 죽게 한 어미의 슬픔과 도덕적 번민은 어미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물 속에 헌납하게 한다.

인지, 고민, 카타르시스의 3분법이 단순하게 구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회유를 반복하며 진행되어 전체적인 가변성을 주지 못하고 있는 씨너리와 그의 색조가 이 작품의 극적 변화와 반전을 충분히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변성의 다이나믹한 무대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물론 이 작품의 극적 절정이 카타르시스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전술한 장치의 틀과 색조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극적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요인은 의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즉 서구 문화 혹은 크리스차니티의 대리역인 군무진과 한국문화 혹은 샤머니즘의 대리역인 군무진은 캐릭터상 대립되는 성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양자의 의상이 양식과 색상에 있어 일목요연하게 차별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의 몫을 연출에 있다고만 하여야 할 것인가?

사전적 의미로서의 연출이란 무대의 구성 요소인 연기, 장치, 조명, 의상, 음악 등을 유기적으로 종합하여 공연이라는 하나의 총체적인 효과(total effect)를 창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실제의 무용에 있어 관객이나 비평가가 즐기고 판단하는 것은 그들이 본 것, 즉 무용이라는 총체적 작품의 효과일 것이다.

더욱이 안무자가 그 어떤 의도적 목적을 가지고 이를 실현할 양으로 주제를 선택하고 연출자를 선택하여 실연에 임했다면 안무자는 주제를 명백히 할 문학성을 살려낼 수 있는 조성책임은 물론, 이 문학성이 무용이라는 실체로 무대상에 부각되도록 무대상의 전모를 엿볼 수 있는 연출적 안목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안무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는 본 신 무녀도의 공연은 성공적이지 못한 것만큼이나 무거운 숙제를 우리 무용가들에게 인식케 하는 기회까지도 제공하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