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문학

나무 그늘 밑에서의 쉼




신범순 / 문학평론가, 관동대 교수

벌써 엷지만 푸르른 빛들이 갈색으로 거칠어진 대지를 덮어나가고 있다. 겨울의 가로수 특히 플라타너스의 그 거무칙칙하고 울퉁불퉁한 근육들은 얼마나 을씨년스러웠던가! 나는 아마 노량진 역 근처의 그 플라타너스들, 거친 세월 속에서 괴로움을 들이마시면서 뒤틀어대던 근육들의 고통스러운 노동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찬란하게 봄의 푸른빛이 점차 커가면서 왕관과도 같은 잎사귀들을 딱딱하고 여윈 가지들 끝에 씌울 때면 그 모습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 잎사귀들은 하늘의 별모양을 흉내내기도 하면서 부드러운 푸른 손바닥들을 흔들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무들에 대한 추억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푸르름의 짙어지고 엷어가는 깊이와 추억의 깊이를 은근히 뒤섞기도 하는 법이다.

이번 달에 발표된 김윤배의「측백나무의 겨울」(「현대시」4월 호)을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나의 나무 하나를 생각해본다. 그러나 이 시의 '측백나무'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나무이다. 나는 어쩐지 고호의 측백나무를 연상해 보는 것이 이 시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것은 아닌지 어떤지 생각해본다.

'겨울은 조심스럽게 왔다 측백나무 묵묵한 모습으로 서있는 골목을 벗어나면

거친 말들 속에 공구들 어지럽게 뒤섞여 녹슬고 있는 작은 광장에 이른다

젊은 노동자들은 공구를 챙기며 귀향을 서두르고 있다 그들의 어깨 뒤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겨울 하늘이 측백나무를 향해

잔뜩 몸을 낮추고 있다 젊은 노동자들은 악다구니를 퍼붓다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다 겨울은 측백나무 사이로 깊어갔다 광장에 남아있던 젊은 노동자들의

거친 웃음소리가 측백나무 가지에 걸려 비닐처럼 찢겼다 눈이왔다 눈송이가

측백나무 푸른 침묵에 부딪쳐 작은 불꽃처럼 스러졌다.....'

-「측백나무의 겨울」부분

이 조용한 존재, 나무는 언제나 우리들 주변에 '묵묵히' 서있다. 그리고 나무들은 계절들을 살아간다. 계절들의 변화는 나무들 속에서 분명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 시 역시 그러한 드라마의 열림을 분명히 감지한다. '겨울은 조심스럽게' 측백나무에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겨울 하늘이 측백나무를 향해 몸을 낮춘다. 그것은 곧 쏟아져내릴 것만 같이 쌓여 있는 것이지만 측백나무를 향해서는 조심스럽게 몸을 디밀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무는 겨울 하늘을 밀어내느라 '검푸른 정맥이 솟는다'.

이 조용한 드라마는 가난한 살림살이를 여며가는 좁다란 골목 속에서 벌어진다. 이것이 여인의 내밀한 드라마라는 것을 어떻게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침묵하면서도 모든 것을 쳐다보고 자신 속에 담아내는 여성적 존재를 이 측백나무 속에서 어떻게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 삶의 주변에 있는 여인들은 이렇게 깊은 측백나무의 내밀한 깊이를 간직하고 있다. 그녀들은 남자들의 모든 활동을 껴안고 깊이 되새김질하면서 시인과 철학자의 가슴을 일궈낸다. 우리 시인들은 사실은 그녀들의 삶을 보면서 비로소 어떤 깨달음을 얻어냈던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니 고호의 측백나무는 좀더 현란한 남성적 꿈틀거림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푸른 불길처럼 대지를 밟고서 타오르고 있었다. 길들이 그 옆을 흘러가고 있는데 그것은 숱한 삶들의 의지와 비밀을 다지며 대지 위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그의 대지는 그러한 삶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 거기 있다. 아니 고호의 대지는 좀더 적극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자신을 밟고 가며 어떤 길을 만들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 속에서 어떤 불길을 뽑아내기를 요구한다. 그의 대지는 그러한 요구들 때문에 언제나 꿈틀거리며 파도치고 휘어진다. 나무와 집들 그리고 교회들 바람과 구름마저도 그 꿈틀거림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김윤배의 '측백나무'는 그러한 삶의 넓은 대지, 그 깊이 속에 뿌리박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대는 그 개지를 부여잡지는 못한다. 그 대신에 골목과 광장의 조용하면서도 긴장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골목의 침묵과 광장의 시끄러움이 대비된다.

젊은 노동자들의 거친 말과 거친 웃음소리는 광장에서 들려오는 것들이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침묵의 깊이 속에 반향 된다. 이 시에서 이러한 단순한 대비법이 산뜻한 효과를 보여주고 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광장의 노동자들은 너무 가볍게 처리되어 있다. 그들은 단지 거칠은 존재이며 자신들의 노동 행위 속에서만 자리잡고 있는 단순화된 존재들이다. 그들의 노동이 꿈틀대야 하는 대지는 그 광장에 없다. 그 광장은 그저 그들이 사용하던 공구들만이 놓여있는 자리일 뿐이다. 어떻게 그 광장은 대지를 배반했단 말인가? 그들이 노동의 자리에서 되돌아올 때 어떻게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겠는가?

측백나무는 그러한 단순한 대비법으로는 진정한 쉼의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다. 어수선한 노동의 현장인 광장과 침묵하는 골목의 대비법은 그러한 자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박형준의 「공원에서 쉬다 4」(「현대시」4월호)의 나무 그늘은 어떠한가?

'회환은 살진 기생충, 어느 날 사내의 목구멍 속에서 끌어올려진다

크악크악 발음되지 못하는 生의 푸른 정오에는 저마다의 몰락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 둥글어진다 그들은 나무의 그늘처럼 우리들 삶에 깃들어 산다

.....'

- 「공원에서 쉬다 4」부분

몰락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찬양할 수도 있다. 여인들의 치마 주름살과 나뭇잎들의 살랑거림을 겹쳐놓은 것은 매우 멋진 표현이다. 그러나 여전히 몰락이 왜 아름다운 것인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어떠한 몰락이어야 하는가 말이다. 나는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보들레르처럼 회한을 길러내던 퇴폐주의자의 아름다움은 어딘가 형언할 수 없는 현대인의 처형자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회한'이 이 시에서처럼 분명한 모습을 하지 못하고 막연한 서정적 분위기를 돋구기 위한 것으로 남아 있는 한 시는 성공하기 어렵다.

'구석진 곳에서 칠이 벗겨진 벤치들이 한없이 아늑해지는 날'이라는 표현도 그저 값싼 수사법으로 굴러 떨어질지 모른다.

이 시의 다음과 같은 부분을 좀더 싱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누가 내게로 와서 벤치가 되어다오……그러면 나는 내 인생의 푸른 정오를 들려 주겠다' 그러나 나무의 그늘은 그냥 드리워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하염없는 깊이를 그 뿌리 속에 드리워야 한다. 마치 고호가 한 나무의 뿌리를 대지에 박기 위해 화폭에서 끊임없이 투쟁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