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공간 확보의 시금석
-덴마크의 극장들
김채현 / 무용평론가, 중앙대 교수
지난 호 「문화예술」에서 필자는 춤극장 부족 현상이 미구에 춤계의 현안으로 제기될 것임을 예측하고 미리 그 대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이 문제는 춤계뿐만 아니라 정책 당국자나 우리 사회에서 예술 후원 의사가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토지와 건물 등 하드웨어에 드는 비용이 갈수록 막대하기 때문에 극장 건설 방안은 대개 앉은 자리의 희망사항에 그치기 일쑤이다.
그런데 이번 여름에 덴마크에서 열린 '94 코펜하겐 국제 댄스 페스티벌을 참관하면서 필자는 극장 공간을 확보함에 있어 몇몇 흥미로운 사례들을 보았고, 이러한 예들에서 극장 부족 현상에 대처할 만한 가능성도 느꼈다.
'94코펜하겐 국제 댄스 페스티벌은 올해로 세 번째 열린 춤제전으로서 1990년도부터 격년제로 개최되어 왔다. 올해 6월 8일부터 25일까지 코펜하겐 시내 여러 극장에서 열린 이 제전은 17개국의 약 30단체와 개인이 참가하여 아직 연륜이 짧다 해도 국제제전으로서의 위상을 세워나가는 데 열심이었다. 코펜하겐 국제 극장예술원KIT: Kopenhagen Int'l Theater이 주최한 이 춤제전에 이스라엘의 바체바무용단, 노르웨이 국립무용단, 벨기에의 레 발레 씨, 미국의 몰리사 휀리, 프랑스의 마크 톰킨스, 네덜란드 단스 테아터2, 독일의 쇼우프무용단 등 국제적 지명도가 있는 단체나 개인들이 참가했고, 동양권에서는 홍신자의 웃는돌무용단을 비롯, 중국과 일본 단체가 초청받았다.
스칸디나비아 즉 북유럽의 국제적 춤제전이라 했을 때 핀란드의 지방 도시인 큐오피오Kuopio의 댄스 페스티벌을 제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큐오피오 춤제전은 6월 12일부터 19일까지 20단체 가량 참가해서 개최되었는데 국제 제전으로서 손색이 없다. 큐오피오 춤제전에 참가한 단체들 가운데 상당수는 코펜하겐의 춤제전에도 참가했다. 그럼에도 코펜하겐측은 인쇄물에서 자기들의 춤제전을 스칸디나비아 최대의 국제 춤제전으로 명시하고 있었는데, 그리 과장되진 않았다 해도 당분간은 큐오피오의 연륜만은 무시하기 어려우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코펜하겐 측이 신생 춤제전을 자랑하듯 스칸디나비아 최대 운운하는 데는 그만한 전략이 깔려 있을 것이다. 유럽 공동체는 해마다 유럽의 한 도시를 '유럽문화수도'로 지정하고 있다. 그동안 1985년의 아테네를 시작으로 플로렌스, 파리, 베를린, 더블린, 리스본 등이 지정되었는데, 1996년도에는 코펜하겐이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최초로 유럽 문화수도가 될 예정이다. 바로 이 점에서 코펜하겐이나 덴마크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해 보였으며, 코펜하겐의 '96년도 유럽 문화 수도 행사 계획안에도 코펜하겐 국제 춤제전이 좀 대대적일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것은 덴마크가 스칸디나비아에서 문화에서도 대국의 이미지를 갖추고 싶다는 희망의 소지임에 분명하다. 그 저변에는 16세기이래 스웨덴 및 노르웨이가 독립해서 분리해 나간 역사적 갈등도 작용했을 것이다.
덴마크가 내세울 만큼 고전발레계에서 유명한 안무가 부르농빌에게서 짐작하게 되듯이 덴마크는 고전발레라는 전통의 힘이 막강해서 아마 현대무용의 역사는 한국보다 짧고 현대무용 인구도 한국과 덴마크 인구(5백만)의 차이만큼 훨씬 작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은 코펜하겐 국제 댄스 페스티벌에 고전발레 단체나 개인은 전혀 눈에 띄지 않은 걸로 미루어, 여기서 댄스는 발레를 제외한, 발레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이 춤제전은 덴마크 현대무용계의 (발레에 대한)데몬스트레이션의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덴마크를 여행하면 느끼다시피, 막연히 안데르센과 농목 산업의 국가로 인식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접하게 되는 문화적 분위기가 좀더 생활 가까이에서 피부에 와 닿는 곳이 스칸디나비아이다. 그만한 문화적 잠재력은 우리가 여태까지와는 달리 북유럽도 세계 춤 지도에서 주시해 볼 곳임을 의미한다.
'94 코펜하겐 국제 댄스 페스티벌이 열린 극장들은 어떻게 보면 엉성한 느낌이 드는 가건물들 같았다. 극장 공간이 부족하여 이런저런 곳을 급조해서 만들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다. 가령 홍신자의 웃는돌 무용단이 공연한 곳은 코펜하겐 시내 니콜라이 교회를 개조한 대전시실이었다. 겉은 교회로되 속은 이미 예술 공간으로 바뀐 곳이다. 이번 제전에서 공연이 가장 많이 열린 단시넨 극장과 카논홀렌 극장은 예전에 대포와 같은 무기를 적재(積載)했던 포병 기지창(基地廠)의 강당이나 창고를 그렇게 개조한 곳이다. 이 곳들에서 연일 공연을 보면서 필자는 신과 군대가, 종교와 전쟁이 문화예술에 자리를 내주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일테면 인간 구원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문화예술의 비중이 제고되는 것이 세기말의 징후이며 이런 경향은 21세기에 가서는 훨씬 강화될 것이다. 이 점에서 국가간의 문화교류는 어차피 그리고 빠른 속도로 문화 전쟁으로 구체화될 것이고, UR 개방은 그 전초전에 불과하다.
이번 제전에 참가한 노르웨이 국립무용단은 프랑스 출신 카린 사포르타가 안무 책임자로 있는 단체다. 입센의 「들오리」를 반쯤은 춤, 반쯤은 연극으로 재창작한 이 작품에서 누구든 미국 현대무용의 기교적 형식주의에 비해 유럽 현대무용에 개념적 사고의 특질이 전통처럼 흘러온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이 공연이 올려진 알베르츠툰트 하우스는 코펜하겐 시내에서 전철로 가야 닿을 교외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극장은 이전에 초컬릿 공장이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공장 지대여서 그런지 주위는 비교적 한적한 주택가와 몇몇 공장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 극장 건물도 아주 높은 굴뚝이 용도 폐기된 듯싶게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극장 앞 벽에는 올해와 내년의 공연 일정을 적은 간판이 달려 있었다.
코펜하겐 변두리의 어느 거대한 돔 건물에서는 벨기에의 레 발레 씨 무용단이 역시 춤과 연극을 뒤섞은 작품을 보여 주었다. 열예닐곱 살 먹은 한국 입양아가 단원으로 출연해서 더 기억에 남는 이 공연단의 작품은 오토바이까지 부르렁대고 물에 첨벙대던 아이가 익사하는 식으로 소외의 세태를 퍽 사실적으로 옮겼다. 옛날에 관청이나 집회장과 같은 공공용도로 쓰였을 이 원형의 돔 건물에 들어서면 거대한 성에 왔다는 인상을 받는다. 입구의 로비도 엄청나게 높고 넓어 사람을 압도했다. 이 로비에다 옛날 기차를 갖다 놓았는데, 촌스럽기는커녕 조그만 옛날 역에 와 있는 듯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편이었다. 공연 시간이 임박하면 기차의 신호종이 딸랑거려 심심풀이도 되었고......
대개의 유럽이 그렇지만, 옛날 건축물을 헐지 않고 내부만 개조해서 계속 사용함으로써 도시나 환경의 고풍스런 품격을 유지하고 있음을 본다. 동양의 짓는 건축술에 비해 쌓는 서양식 건축술이 오늘날 겉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속을 쉽게 개조할 여지를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겠으나, 우리는 이래저래 다 없애버리고 나서 관광 자원의 빈국이라고 자조(自嘲)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구시대의 명소들뿐 아니라 공장까지 문화 공간으로 개조해 쓰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으로 여겨졌다. 물론 인구에 비해 공간이 너른 곳이라는 차이야 인정한다 해도, 문화 공간 또는 극장을 새로이 마련한다고 할 때 완전히 다시 짓는 것부터 상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도 곱씹어봐야 한다. 끈질기게 보존하되 오늘의 용도로 다시 탄생시키는 역사의식이 재원을 마련하는 일보다 앞서야 하는 경우도 많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