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그 상대성과 애매한 한계
- 연극공연을 중심으로
이혜경 / 연극평론가
다양한 주제와 표현양식이 공존하는 현대 연극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는 것은 가치관과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 중에서 외설시비에 대한 질문들의 예를 들면, 알몸의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 무대 위에 성적 행위를 연기하는 배우를 허용할 것인가,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이고 어디서부터 방종인가, 어디까지가 연극이고 어디서부터 포르노인가,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 누가 그을 것인가 등이 있다. 이에 대한 논란을 단순히 예술성과 흥행성의 대립이나 법적 규제의 필요성 유무에 대한 쟁론으로만 보는 것은 일차원적인 관점이다.
연극에서의 외설논쟁은 연극에 있어서 도덕성의 시비, 현대 연극에서 성적 표현이 갖는 의미, 한국사회에서의 연극의 위치에 대해 보다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공연예술로서의 연극의 특성, 현대 연극이 내용과 표현 양식의 변화, 연극인과 관객과의 관계, 연극과 사회의 상호 책임과 의무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도덕성 - 가치관의 상대적 기준
연극을 포함한 공연 예술에서 내용의 적법성이나 선정적, 폭력적인 표현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들이 공연되는 사회의 미풍양속이나 무대 위에서의 표현 양식에 대한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서양 연극 사를 살펴보면 현대연극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새로운 사조가 대두될 때마다 그 사조들을 도출해내는 대표적 작품들이 기존의 가치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논쟁의 핵심이 되어 왔다. 17세기 프랑스 연극의 황금기 신고전주의의 효시인 코르네이유의「르 시드 Le Cid」는 표현 양식도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여주인공이 전쟁 중 자기의 아버지를 살해한 장군과 하루도 못되어 결혼을 약속한 것이 당시 예법에 어긋난다고 해서 혹독한 논쟁에 휩싸였는데 당시 재상이었던 리쉴리에는 이 문제의 판결을 새로 결성된 프랑스 학술원에 의뢰하기까지 하였다. 신고전주의의 엄격한 틀에서 벗어나고 탄생한 낭만주의는 1830년에 공연된 빅토르 위고의 희곡「에르나니 Hernani」에서 비롯된다고 연극사가들은 이야기하는데 이 작품 또한 꼬메디 프랑세즈 극장에서 초연 되었을 때 작품이 비극의 정형으로 정해진 표현양식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저속한 언어들을 사용하고, 또한 당시까지 금기되어왔던 폭력과 죽음을 무대 위에 재현했다는 이유로 관객들 사이에 분란을 야기 시켰다. 기록에 의하면 공연 중 보수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 간에 일어난 소요가 너무 커서 배우들의 대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19세기말 사실주의를 정립한 입센은 그의 대표작「인형의 집」(1879)에서 남편의 인형으로 살아온 노라가 하나의 개인으로 독립하기 위해 집을 떠나게 함으로써 당시 통용되던 결혼관에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또 다른 작품「유령」(1881)에서는 전통적인 도덕관을 지켜 가는 여주인공의 아들을 아버지에게서 옮은 매독으로 죽어가게 함으로써 과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켜 심지어 몇몇 나라에서는 이 작품의 공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 속에서의 도덕성에 대한 시비와 소요는 당시에는 비록 나라의 재상이 개입할 정도로 심각했을지 모르나 이십세기도 저물어 가는 지금 현대연극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 순진함에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또한 세계 연극계의 고전인 브레히트의 희극들이 체제 질서유지에 위배된다고 80년대까지 한국에서 금지되었던 상황을 예로 든다면 연극에서의 도덕성의 시비는 시대와 지역이 바뀌는 것에 따라 그 기준이 변하는 상대성을 본질로 한다. 더욱이 다양한 시각과 표현 양식이 제각기 동등한 관심과 권리를 주장하는 현대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하나의 관습의 틀로 예술 활동의 적법성을 판정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논쟁과 시비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해결할 수 없는 난제로 남는다.
현대연극의 소재와 표현양식의 변모 - 실험연극에서의 표현의 자유
외설 논쟁이 본격적으로 연극의 쟁점이 된 것은 표현의 자유를 가장 많이 구가하던 미국에서 연극 활동이 전통적 브로드웨이로부터 오프, 또는 오프-오프 브로드웨이로 확산되면서 실험정신을 실습하는 해프닝이나 환경연극이 등장하면서이다. 아르또와 브레히트, 그러토프스키의 이론 등에 바탕을 두고 세워진 미국의 리빙 디어터나 오픈 디어터, 퍼포먼스 그룹 등의 집단이 대표하는 실험연극에서는 도덕성의 일반적 적용보다는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구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노리는 효과도 관객이 편하게 앉아 극 내용에 감동하면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언어 중심에서 벗어나 신체의 표현 가능성을 개발한 몸짓들, 조명, 음악 등의 시청각 요소들을 이용해 관객들에게 충격을 가하면서 그들의 관습과 편견을 공격하여 기존의 믿어왔던 가치관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의 알몸은 실험연극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고 문명에 의해 강요되는 제도와 관습에 대한 반발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된다. 1968년에 공연된「현재의 천국: 문화의 혁명 Paradise Now : The Revolution of Cultures」에서는 배우들이 살아 있는 토템 기둥을 표현하기 위해 알몸으로 등장함으로써 배우의 (때로는 관객도) 알몸이 공연의 일부가 된 최초의 작품 중의 하나가 된다. 같은 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히피 뮤지컬「헤어!」에서도 알몸이 등장해 화제가 되었다. 1969년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퍼포먼스 그룹의「69년 디오니소스」라는 작품은 그리스 작가 유리피데스의 「바케」라는 희곡을 일련의 제의들로 재구성한 것인데 대부분의 장면들이 육체와 섹스, 자유와 억압에 관련되어 있어 알몸의 배우들의 다양한 몸짓이 화제가 되었다. 이 공연은 구속을 맹목적으로 떨쳐버리려 한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일단 표현의 자유를 더 넓힌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같은 해 공연된「오! 캘커타」와「체! Che!」또한 외설시비와 예술성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들이다. 케너스 타이넌이 제작한 「오! 캘커타」는 그의 말을 빌자면 '문명화된 남자가 문명화된 여자와 함께 문명화되고 에로틱한 자극의 밤을 함께 보내는 장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공연되자마자 호기심과 열광, 불쾌함이 섞인 반응을 받았는데 뉴욕의 영향력 있는 평론가 클라이브반즈는 심지어 '포르노그라피에 오명을 씌운 것'이라고까지 혹평을 했다.「체! Che!」에서는 미국의 대통령이 모자를 쓴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몸으로 묘사되어 있는 반면, 공산주의자 체 게 바라는 영웅시되어 있으면서 동성연애 행위를 포함한 무분별한 성의 행위들을 보여주어 결국 배우들, 작가, 기획자 등이 외설의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판결의 이유는 작품이 의도하는 정치적 풍자가 제대로 드러내지지 않은 반면 성적 묘사는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하나의 심각한 연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판결에 덧붙여 판사들은 얼만큼의 자유가 허용되는지 시험해보려는 소수의 상업주의에 물든 기획 자들에 의해 공공의 인내심과 도덕적 기준이 정해질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
위와 같은 일련의 논쟁과 판정기준의 애매성에 대한 시비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 이르러 나체 연기와 성적인 주제는 무대 위에서 잠재력 있는 소재로 자리잡아갔다. 그러나 과격한 실험의 물결이 지나간 지 사반 세기가 지난 지금 무대 위에서의 외설은 더 이상 유행하는 추세도, 관객을 불러모으는 확실한 보장도 되고 있지 않다. 다만, 실험의 물결이 지방연극에까지 골고루 퍼져 표현의 자유의 수위를 높이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최근까지 공연되고 있는 「오! 캘커타」는 연극계 내부에서 실험정신을 담은 아방가르드의 기수나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호기심 많은 관광객 등의 눈요기 감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며 그 한계에 도전하는 실험연극이 활발했던 미국의 추세를 살펴보는 것은 무대 위의 외설성의 등장과 변화에 대한 하나의 좋은 예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 기준과 표현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상대성을 고려한다면 요즘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설 시비는 한국사회 안에서 연극의 위치를 살펴보아야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연극에 대한 기대 - 외설적인 사회 속의 정숙한 연극?
연극에서 외설에 대한 시비를 대할 때 예술이냐, 상술이냐, 혹은 검열이냐, 자율이냐의 논쟁의 한가운데서 서둘러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기보다는 우선 문제 제기의 논리성과 핵심을 짚어보아야 한다. 문제가 되는 연극들은 본격연극을 자처하면서 배우들이 나체로 등장하고 성적 묘사가 '일반 국민 정서'의 허용치를 넘었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공연예술로서 타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외설인가? 요즘 한국사회에 범람하는 외설문화의 정도와 범위를 볼 때 문제가 되는 작품들의 표현정도는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다. 소수의 성인들이 마음먹고 표를 사고 극장 안에 들어가 앉아야 볼 수 있는 소극장에서의 공연이 그보다 훨씬 영향력의 범위가 넓은 대중매체보다도 더 까다로운 기준에 의해서 센세이셔녈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불공평한 감이 있다.
여성들의 성의 상품화가 만연하는 한국사회에서 눈만 돌리면 도체에 무차별적인 성의 묘사가 범람하고 있다.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길거리를 다니면 볼 수 있는 극장 간판의 최대한 과장된 성애 묘사, 성인용으로 구분되어야 할 스포츠신문의 만화와 기사들, 심지어 온 가족에게 노출되는 일간지에 실리는 연재소설들의 구체적인 삽화를 동반하는 외설적 에피소드들, 잡지나 신문의 선정적 광고들,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전자오락들 등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자극을 하고 있는 가운데서 유독 연극만이 정숙한 예술이기를 주장하는 듯한 이 논리는 연극의 특성과 한국사회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연극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연극이 영화나 TV 등의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점은 동일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체험을 교류하는 독특한 매체라는 데 있다. 연극 관람의 경험은 그 어떤 매체의 감상보다도 친밀하고 즉각적이며 생생하다. 그러므로 연극은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거나 특정 효과를 도출해내는 가장 효율적인 매체로 이용되기도 한다. 마당극이나 민중연극, 실험연극 등은 연극의 이러한 매력을 활용하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에 반해 연극의 친밀성은 성적으로 자극적인 공연일 경우 그 영향력의 깊이가 훨씬 더 깊고 리얼하며 같이 보는 관객들의 반응에 의해서 개인에게 미치는 자극성이 더욱 상승한다. 실험정신과 그에 걸맞은 작품성의 유무에 상관없이 선정적인 장면이 포함된 공연이 문제가 되는 것도 이러한 연극 매체의 특성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연극은 19세기까지 유일하게 대중적인 공연매체였다가 20세기에 들어서서 영화와 TV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 이후 특정 관객을 대상으로 예술성을 탐구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서양식의 연극이 영화의 소개와 거의 동시대적으로 도입된 한국에서는 악극과 신파극을 제외하고는 대중에게 친밀해질 수 있는 기회가 충분치 않았다. 더욱이 서양의 연극을 수입한 주체들이 해외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중심이기 때문에 연극의 아주 대중적인 모습부터 예술까지의 폭넓은 면모가 골고루 활용되기보다는 특정인들이 이끄는 고급예술이라는 인상이 가장 강한 지도 모른다. 당국이나 매스컴이 영향력의 범위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의 외설시비에 대해 민감한 이유는 아마 연극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다른 매체에 대한 것보다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장치 - 미학적인 복지정책
연극이 예술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그러한 주장을 가장 환영할 사람들은 연극인들일 것이다. 그러나 연극을 예술로 지키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종합예술로서의 연극은 경비와 산출의 관계로 보면 상당히 비경제적인 분야이다. 설사 장기공연을 할만큼 관객이 들어도 극장을 얻지 못해서 공연을 중도에 포기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관객의 입장료에만 의지해서 예술활동을 유지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연극을 진정 순수예술로서 유지하고 싶다면 문화정책을 관장하는 당국과 사회에 책임이 있는 단체들의 지속적이고 넉넉한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진지한 연극을 하고 싶어도 우선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기 위해' 상업성이 짙은 선정적 연극을 한다는 핑계가 사라지게 된다.
또한 연극에 대한 지원은 연극인들에게 인심쓰듯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 진정 연극이 인간, 삶, 사회에 대해 진지하고 진실 된 의문을 던지며 우리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믿는다면 연극에 대한 정책과 후원은 국민에 대한 책임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보장제도나 의료보험제도의 운용 동기와 같은 맥락에서 좋은 연극을 보고 의미 있는 예술을 감상할 기회를 갖는 것은 국민의 권리라는 관점에서 문예정책은 수립되고 운용되어야 한다.
예술과 외설의 애매한 경계 - 연극인과 관객들의 몫
연극의 본질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 가치와 의미가 만드는 이들과 보는 이들간의 관계 설정과 상호 수용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기준을 정해서 외설과 예술을 구분한다는 것은 예술의 특성에 어긋난다. 더욱이 오랫동안 삶의 구석구석에 공권력의 압력을 느껴온 우리나라에서 공연 사전 심의가 폐지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외설시비가 인다고 해서 다시 당국의 개입을 고려한다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더 크다. 당국의 고민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특정 연극이 관객의 물리적인 안정과 건강에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당국이 대신해서 관객의 선택을 제한할 수는 없다. 앞으로 물질의 풍요와 감각적 자극이 인간의 삶에서 더욱 큰 부분을 차지하는 후기 산업사회로 우리나라가 진입할수록 연극을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주제와 표현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므로 지금 공권력이 개입한다면 그 범위는 계속 확장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때로 문란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여도 예술의 특성 - 상대적 자율성 -에 기대어 좋은 연극을 만들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오히려 관에서 담당해야할 역할일 것이다. 연극을 하는 이들에게는 예술가로서의 긍지와 책임을 느끼도록 해주고 보는 이들에게는 좋은 연극을 식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줘야 한다. 우리의 연극인들은 절망적인 공연 여건에 짓눌려서 대부분 자조적이고 우울하며 실의에 빠져 있다. 연극이 좋아서 하고는 있지만 지쳐 있고 힘이 없다. 진지한 열정이 있는 연극인들에게 공연 기회가 골고루 가지도 않는다. 초중고 교육과정에는 좋은 연극이나 관객을 만드는 교과과정은 하나도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연극을 보면서 마음의 감동을 받고 삶을 보는 시각이 변하는 감격을 경험한 적이 없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들이 분명히 느끼는 것은 헛헛하다는 것뿐이다. 그런 관객들이 일시적인 여흥을 주는 자극적인 오락이 연극의 재미라고 믿기 전에 연극인들은 좋은 작품으로 그들의 기대치를 높여주어야 하고, 한번 연극을 본 관객들이 계속 극장을 찾을 수 있도록 관객을 재생산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연극에서의 쟁점도 외설이냐 아니냐보다는 잘 만들어진 연극이냐 아니냐의 토론으로 변할 것이다. 또한 연극의 이름을 빌어 상업적인 흥행을 하려는 이들의 속셈이 드러나고 그들을 예술가로 과대평가 해주는 이들이 없어질 것이다. 그 안에서 평론가들이 담당해야 할 몫은 진지하게 만드는 이들을 격려하며, 부족한 부분은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관객들이 좋은 연극을 선택하도록 도와야 한다. 연극의 주제나 표현 양식에서 오는 논쟁은 연극인의 손으로 해결하고 정리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책임은 연극인이라 자처하는 모든 이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