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대를 잇는 예술가족. 1

한줄기 시정신에 수놓이는 시대의 빛깔




시인 : 김종해·김요일 부자 편

사회 : 홍보조사부장

사회 : 이 기획은 대를 이어가는 예술가들을 찾아서 그들의 예술과 삶을 조명하는 새로운 기획입니다. 그 첫 번째로 시인 김종해, 김요일씨 부자를 모셨습니다. 우선 두 분에게 각각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아버지와 아들의 문학세계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김요일 : 어린 시절부터 줄곧 아버지는 제게 커다란 산 그림자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습니다. 집에서나 회사에서나(같은 직장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다정하시고 재미있으신 편이고, 제가 자라면서도 매를 맞았다거나 커다란 꾸지람을 들은 기억도 별로 없는데도 '아버지' 하면 늘 어려웠고 무서웠던(지금은 덜 무섭지만) 그리고 큰산의 그림자 같은 위압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좀 어색하고 어려운데……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님께서는 1963년도 「자유문학」과 1965년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하셨습니다. 특히 경향신문 당선작 「내란」은 신춘문예 사상(물론 현재까지) 가장 파격적이고 난해한 실험 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초기 시는 대체적으로 혼란과 분화가 내재된 젊은 영혼의 부딪힘. 갈등, 치열함 등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70년대부터는 암울하고 어두운 현실사회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비판적이고 은유적인 메시지로 「인간의 악기」,「왜 아니 오시나요」라는 시집들에 녹아 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종해 시인은 잘 알려진 「항해일지」라는 연작시를 통하여 시인이면서 소시민인 개인이 바라본 황량한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했습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물론 세상도 조금 바뀌긴 했지만, 50대 중반이라는 연륜에서 오는 시 세계의 변화가 눈에 띄게 보입니다. 특히 이번에 새로 발간된 시집 「별똥별」을 읽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나 폭이 많이 넓어지고 부드러워진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젊었을 때의 치열함 같은 것들이 많이 배제되어 있지만 세상 밖으로의 초월이 아닌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 한복판에서의 깨달음이 시편 곳곳에 드러나 있습니다. 억지로 세상을 시속에 끌어들여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삶 속에 용해되어 자연스럽게 흘러 넘치는 시를 씁니다.

사회 : 그러면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의 분위기와 대개 자신의 일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싫어하는 경향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애로 사항은 없었는지요.

김요일 : 제가 초·중·고등학교 시절에 글짓기대회, 백일장 같은 데서 상을 타거나, 교지 등에 글이 게재되었을 때에도 아버님은 별 말씀이 없으셨어요. 제가 '시인이 되겠다'라고 마음을 먹은 게 중 3무렵인 것 같은데 그 다음부터 가끔씩 아주 이따금씩 제가 쓴 글들을 아버님께 보여 드렸어요.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읽으시고 그냥 "됐다" 그러고 끝이에요. 뭐 이거는 이렇게 고쳐라, 저거는 저렇게 고쳐라 그것도 아니고 그냥 "됐다" 하고 마세요. 제가 등단을 할 무렵이나 등단을 하고 나서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제가 1년여 동안 문예지에 작품발표를 안하고 있으니까 걱정이 되시는지 "장시에만 매달리지 말고 짧은 시들도 써서 종종 문예지에 발표도 하고 그래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사회 : 그럼 김종해 선생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신세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요일씨의 시 세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종해 : 시 예술에 있어서의 부전자전은 어느 정도 인정은 하죠. 그러나 그 시의 뿌리라든지 어떤 혈통이라든지 하는 면에 있어서는 돌연변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면 제가 갖고 있는 시 세계하고 김요일 시인이 갖고 있는 시 세계는 전혀 판이해요. 어떻게 판이하냐면 우선 형식면에서 파괴적이고 비시 적인 요소가 강하죠. 시가 너무 실험 시적이고 전위 시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의 내용 면에 있어서도 비약을 한다든지 속어·비어 같은 보통 시에서 쓰지 못하는 그런 것을 시어로 다루는 것을 볼 때는 제가 갖고 있는 시 세계하고 아들 김요일의 시 세계하고는 전혀 판이하다는 생각이죠. 물론 저는 그걸 바라죠. 시인으로서 개성이 같아진다든지 혈통과 뿌리가 같아진다든지 이런 건 전혀 바라지 않죠. 전혀 다른 개성, 자기가 갖고 있는 독특한 개성, 그런 시 세계를 완숙하게 갖고 있을 때 그때 이제 '시인'이라는 이름을 내가 붙여줄 수가 있는 거죠. 그러나 아직까지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시인으로서 자기세계, 일가를 이루지 못하는 시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김요일에 앞으로의 가능성, 앞으로 제자리를 찾아 좋은 시를 쓸 수 있고, 그런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 보는 것이죠.

사회 : 그러니까 아버지로서….

김종해 : 아니 아버지로서보다도 시 쓰는 많은 젊은이들에게도 줄 수 있는 그러한 기대감이죠.

사회 : 저는 두 가지로 생각을 하는데 하나는 김요일 시인 같은 경우 그가 하는 작업들이 김 선생님은 완숙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김 선생님이 우리나라 그 서정적 전통에 아주 뿌리 깊이 두고 계시는 관점에서 보는 시각인 듯 하고, 몇몇 평론가들은 김요일씨의 시 세계 특히 폭력적 언어사용과 같은 형식 파괴적인 기법을 새로운 감성으로 새로운 세계관으로 자리잡았다고 판단하고 있는데요.

김종해 : 아니 그것보다 예를 들어 김요일에게서 나타나는 비시 적인 요소, 실험 시적인 요소, 전위 시적인 요소를 저도 충분히 인정은 하죠. 왜냐하면 30~40년대의 시인 이상의 난해 시·모더니즘 적인 시를 저도 좋아했고 그리고 제 경우도 신문 문예사상 유례없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그런 시를 썼거든요. 그래서 저는 현재 젊은 시인들이 형식을 파괴하고 전통을 극복하려는 그런 것을 굉장히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하거든요. 그런 면에 있어서는 김요일의 시가 지향하고 있는 것, 파괴적인 요소, 그런 데에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긴 하지요. 그러나 아직은 자기 목소리로 자기 집을 짓지 못했지 않았느냐, 바로 그런 거지요.

사회 : 그럼 여기서 가업의 승계 문제로 넘어가죠. 부자가 출판업을 같이 경영하시는 그 부분에 대해 얘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김종해 : 예, 저도 처음에는 사회자께서 부전자전, 또 대를 잇는 가업을 이야기하셔서 시를 두고, 시 예술을 두고 하는 얘기인지, 혹은 출판업을 승계 하는 그런 사업을 두고 하는 것인지 처음엔 얼떨떨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시 예술을 가업으로 결코 보지 않지요. 시 쓰는 행위, 시 예술은 가업이 아니죠. 그러나 출판업 같은 것은 가업이라고 볼 수 있죠. 제가 경영하는 문학세계사에 아들이 나와서 출판 관계 일을 돕고 있지요. 물론 아들이 또 하나 있습니다. 지금 박사 준비하고 있는 둘째 녀석이 있긴 한데, 가업을 두고 볼 때 김요일은 출판업에 대한 센스가 있더군요. 그래서 출판업에 대한 소질을 장남이라 서가 아니고 센스가 있는 아들에게 가르쳐 주어서 내가 갖고 있는 닫혀 있는 부분을 넓은 시각으로 좀더 확장하고, 좀더 넓혀서 우리 출판계에 문화사적 좋은 가치를 생산해 갈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와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 : 김요일씨는 아버지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까?

김요일 : 글쎄요. 처음에는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도 예전의 아버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아버님께서 닦아놓으신 반석 위에서 출판 일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닦은 새로운 터전 위에서 '나만의 빛깔과 취향'이 담긴 출판사를 꾸려가고 싶었는데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여하튼, 출판은 평생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만 아버님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사회 : 아버님의 출판 경력은 상당히 정통적인 것으로 지금 출판계에 잘 알려져 있어요.

김요일 :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사회 : 최근 김종해 선생의 시 세계가 아버님의 세계인데 아까 김요일씨가 말한 대로 관조의 세계와 그 너그러움 같은 것들은 많은 부분이 혹, 아들로서의 김요일씨가 튼튼히 받쳐주는 데서 열리는 세계가 아닌가 싶어요. 그 부분 좀 얘기해 주시죠.

김종해 :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시 쓰는 것에 대해서 나는 처음부터 반대했어요.

사회 : 김요일씨의 얘기는 반대가 없었다고 했는데…….

김종해 : 아니, 그러니까 얘기를 들어보시죠. 아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시에 대한 남다른 재능 같은 걸 저는 보고 있었습니다. 가급적이면 언어예술, 언어문화권에 아들을 갖다 묶고 싶었는데 김요일은 처음부터 아버지가 있는 언어문화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게 있었거든요. 반발이랄지 반항이랄지 음악을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부분에서도 아들과 아주 많은 갈등이 있었죠. 그래 그러면 네 재능을 보고 난 다음에 네가 하고자 하는 방향이 음악, 성악 쪽이면 그렇게 하자, 그래서 오디션을 다 받아봤어요. 그래서 이미 성악 하는 걸로 결정을 내렸어요. 음악 쪽으로 이미 결정이 났는데 한 이태 뒤에 돌연 또 음악을 포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아들에 대해서 자기가 초지를 세우게 되면 이 초지를 이룩해내는 끈질긴 집념을 사고 싶었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네가 문학하는 것을 나는 반대한다. 음악을 완성하고 네가 이룩하고자 하는 것을 이룩한 다음에 그때 문학으로 돌아오는 것은 좋다. 그래서 극구 만류를 했었죠. 그러는 사이에 틈틈이 문예지 같은 것을 보면 최종심 같은데 김요일 시가 올라오면 일부러 모른 척했어요. 김요일 이름으로 투고를 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지만 처음에는 제 이름으로 하지 않고 동생 이름으로 투고해서 당선통지서가 오면 동생이 시상식에 참석해서 대리 시상을 해오고, 또 둘째 녀석이 형 대신에 술이 취해 오는 거예요. 둘째 녀석에게 왜 그렇게 술에 취했느냐 물으면 그 애는 거짓말 못하니까 사실은 형이 문예현상에 투고해 가지고 당선됐는데 거기 갔더니 나보고 전부 술을 권해 가지고 취했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김요일이 작품 쓰는 걸 알았죠. 그래 김요일의 작품을 보니까 작품도 좋아요.

김요일 : 제가 문제도 많이 일으켰죠. 가출도 여러 번 하고…….

김종해 : 그래요. 가출도 여러 번 했죠. 그러나 그게 아버지나 가족에 대한 반발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한 갈등이고 방황이고 혼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거예요. 그래서 가출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대화를 위해 수소문해서 찾아갔어요. 같이 가출하고 있던 친구 집 그리고 또 다른 현장, 무슨 음악실에서든가 거기서 D. J를 하고 있더군요. 도망가는 아들과 다른 친구 하나를 숨을 헐떡이면서 쫓아가 결국 잡았어요. 그런 경우도 있었는데 김요일의 경우는 내가 볼 때 자기와의 갈등이 끝나 있었고 그런 싸움 속에서 자기 가치를 아직도 찾지 못하는 방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아버지의 설득과 대화가 이루어졌었고 그 대화로써 자기 자리로 찾아온 거예요. 찾아와서 결국 문학도 하게 됐고 또 문학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그 작품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간섭을 일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모든 예술은 자생적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사회 : 제가 알기로는 아버님도 70년대 초반 시극운동에도 많이 참여하셨고, 요즘에도 뜸하기는 하지만 '공연예술과 시와의 만남', 그런 부분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 걸로 압니다. 김요일씨도 퍼포먼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걸로 알고 있고요. 극장예술과의 만남, 활자매체를 벗어난 실험성 같은 것에 대한 의견과 김종해 선생님이 시극 운동하시던 때의 얘기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요일 : 시라는 것은 문자로써만 쓰여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무대 위에서 공연을 통해서 시극을 한다든지 시 퍼포먼스를 한다든지 하는 것도 활자화된 시를 조금 더 새롭고 재밌게 관객들이나 대중들에게 전달해주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시인 스스로 자기의 활자화된 시를 놓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시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시인과 관객이 함께 하며 느끼는 짜릿한 전위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지 활자를 벗어난 예술창작으로서의 무대활동은 아닌 것입니다.

사회 : 아드님이 하시는 퍼포먼스를 보셨는지요?

김종해 : TV로 봤어요. 현장에 가진 않고 TV로 나오는 걸 봤었는데 상당히 공감이 가더군요. 공감이 간다는 것은 '시는 반드시 언어예술이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을 나도 갖고 있으면서도 영상으로, 행위예술로 또 다른 시의 공간을 더 넓혀 나가는 것, 그것은 아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전에 1979년 제가 민예 극장과「현대시를 위한 실험무대」에 그 당시의 중견시인들과 함께 시극활동을 했었죠. 지금은 중진 시인들이 다 되어 있습니다만 그 무렵 시극을 했던 중견시인들의 무대에 올려졌던 시들이 언어만으로는 충족하지 못하고 무대 위에서의 몸짓이라든지 또 소리라든지 또 다른 효과로, 또 다른 영상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시의 공간을 좀더 넓힘으로써 효과적으로, 극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예술의 전파 행위가 아니냐, 그런 생각을 했었죠. 그 무렵에 벌인 시극운동이 우리 시사에는 어떻게 기록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의욕적인 시 예술활동을 했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 : 새로운 시의 전달 방식을 찾는다던가, 표현방식의 새로움을 찾는다던가 하는 것들은 두분 이서 갖는 공통적인 관심이 무엇인가 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요일씨의 삼촌이 되시는 시인 김종철 선생님 얘기를 빼놓을 수 없군요.

김종해 : 김종철 시인도 60년대 시인이죠. 60년대 출발한 시인인데 그 무렵 제가 〈현대시〉동인활동을 하고 있었거든요. 김종철 시인은 〈신춘시〉동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60년대 <신춘시>동인을 벌였던 시인들이 대부분 현실에 민감한, 어느 정도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던 그런 시인들이 많았던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무렵에 순수시, 참여시 양극단의 논쟁이 아주 뜨거웠을 때인데 신춘시가 그 무렵에 참여 쪽에 기울어져 있었고, 제가 몸담고 있던 현대시는 순수 쪽에 몸담고 있었던 거죠. 김종철 시의 출발은 물론 순수 쪽이지만 그러나 그후 참여 쪽으로 기울어져있었죠. 70년대 파월, 월남전에 직접 참전을 했었죠. 물론 시인으로서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있었고, 거기 김종철 시인이 쓴 시들을 읽어보면 전쟁에서의 비극적인 회의, 인간을 죽이고 죽는 그런 참담한 얘기가 생생하게 체험으로 담겨져 있어서 좋은 시의 소재에 시인이 직접 이렇게 몸을 덜질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고요. 최근의 김종철 시는 못에 관한 연작시, 그것도 못 이야기이면서 인간에 관한 얘기거든요. 못이라는 사물이 사물 자체로써만 보여져 있지 않고 모두가 인간의 신앙과 함께 구도자적인 그러한 종교적인 갈등 문제가 다뤄져 있고, 그리고 못 하나 하나에 인간의 피가 흐릅니다. 그래서 그 김종철 시인의 못에 관한 연작시를 읽으면서도 역시 시인이 시를 쓸 때 사물에도 인간의 피가 흘러야 되겠구나 라는 것을 동생에게 배웠죠.

사회 : 김요일, 김종철, 김종해 세 분 선생님이 이뤄나가는, 각자 독특한 개성, 독특한 테마, 상이하면서도 같은 점들, 그 다음에 모두 출판업에 종사하신다는 점. 퍼포먼스라든가 새로운 방식의 개발, 이런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들이 오늘 모시게 된 그런 이유가 된 것입니다.

방향을 바꿔서 김요일씨는 아버님과 어떤 세대차이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는지요?

김요일 : 아니, 그런 점은 별로 없고요. 가장 많이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는 경우가 사소한 신문기사 하나를 놓고, 물론 정치적인 기사죠. 정치적인 기사 하나를 놓고도 그 이야기가 1~2분이면 끝날 이야기인데 서로의 의견,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30분, 1시간 어떤 때는 2시간까지 가기도 하죠.

김종해 : 아니 그 얘기는 김요일이가 갖고 있는 진보적, 혁신적 사상 혹은 이념 그것하고 그 다음에 내가 갖고 있는 보수적인 진보, 보수적인 혁신 그러한 사상 혹은 이념과의 마찰이라 할 수 있죠. 그러나 그 이외의 인간과 세상을 보는 관점은 비슷해요. 나는 '민중'이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지만은 다중(多衆)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다중을 위한 이념이라야 되고 다중을 위한 주의라야 되지 않겠느냐는 내 의견과 아들이 갖고 있는, 새로운 세대가 갖고 있는 진보를 위한 진보, 진보를 위한 혁신, 그것과의 갈등과 상충, 그것 때문에 아마 많은 얘기가 논쟁거리가 되고 있었던 거죠. 이번「별똥별」거기에도 보면 아들에 관한 시가 나옵니다.「면회」라든가 하는, 내가 시 제목을 잠깐 잊어버렸는데, 아들이 운동권 학생들과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 거죠. 면회를 간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은 아들이 유치장 속에 갇혀 있긴 하지만 그러나 유치장밖에 있는 나도 또 다른 유치장에 갇혀 있다. 세상이 모두 창살로 되어 있고 나도 갇혀져 있다. 자유로운 인간은 어느 곳에도 없다. 아들을 바라보는 순간 그런 것을 느낀 것이 「면회」라는 시에 그려져 있죠.

사회 : 나는 그게 없다는 게 상당히 자유스러운 아버지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참 즐겁기도 하고 우리 의도하고 빗나갔기도 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앞으로 손자가 크면 이런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또 다른 새로운 시인이 탄생하리라는 예측 같은 건 안 갖고 계신 지요?

김종해 : 제 생각입니다 만은 물론 전통이라는 가풍의 고유한 빛깔이 있는데, 그 빛깔은 가풍 그대로의 빛깔로 남아있기보다 그 정신은 그대로 전승되되 그 빛깔은 시대에 따라서 점점 달라지고 변형되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제 손자가 다시 또 그러한 가풍으로서의 정신을 이어받게 될 때 앞으로의 빛깔과 모양은 진보와 혁신 그 이상으로 달라지겠지만 정신만큼은 줄곧 연결되거나 이어져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죠.

사회 : 아버님 시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가 있다면 무슨 작품입니까?

김요일 :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등단 작품인 「내란」과 서정적이면서도 암울한 현실에 대한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는「가을문안」,그리고 「항해일지」연작 시편 등을 좋아합니다.

사회 : 그럼 아버님은 김요일 시중에 특별히 마음에 드신 시가 있습니까?

김종해 : 전에 나온 김요일 시집「붉은 기호등」유와 같은 실험적이고 전위 시 스타일의 시들보다는 등단할 때 「세계문학」에 발표됐던「온라인으로 전해져 온 아침의 소식」아주 투명하고 명징해서 그 작품을 보고 저도 빙긋이 웃었어요. 괜찮았거든요. 저놈 이제 뭔가 쓰겠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사회 : 부자간의 정서적 교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드렸던 질문인데, 이런 아버님의 명징한 세계에 대한 사랑, 김요일씨도 아버님의 서정계열을 좋아하시는군요. 두 분의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요일 : 지금, 첫 시집을 내고 아주 난감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시를 비롯한 모든 예술은 창조라는 새로움의 바탕 위에서 씌어져야 하고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새로운 창조는 그 시대의 새로운 정서를 창출하고 새로운 정서는 새로운 문화를, 새로운 문화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첫 시집「붉은 기호등」은 나름대로 그러한 몫을 성실하게 해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첫 시집 발간 이후 「붉은 기호등」과는 또 다른 '낯설고 새로운' 작업을 하기 위한 메모를 하고 버리고, 메모를 하고 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사회 : 최근 상재 하신「별똥별」이후에 선생님 시 세계에 대한 작업 계획 같은 걸 좀 얘기해 주시죠.

김종해 : 「별똥별」시집 내고 난 다음에 아직 한 줄도 못 썼어요. 진공상태죠. 진공상태에서 빨리 벗어나 제가 써야 될 시, 앞으로 새로운 집을 세워야 되는데…… 압축된 언어로 쓴 시, 물론 서정시죠. 서정시로서의 선 시적인 시편들, 그러면서도 저의 욕심이긴 하겠지만 아주 명징한 시, 누가 바라봐도 투명하게 어떤 울림이 담겨져 있고 어떤 메시지가 전달 될 수 있는가 라는 그런 익은 시를 쓰고 싶은데 역량이 모자라니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사회 : 오늘 좌담 대문에 바쁘신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