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 박물관을 찾아서. 1/ 참소리 축음기. 오디오 박물관
참 소리 흐르는 해변의 박물관
김종달 / 강릉 예맥 미술관장
생명은 소리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 소리는 인류의 시원이며, 이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그랬을 것이다.
소리는 듣기 싫은 소리부터 아름다운 소리까지 늘 우리 주위에 있어왔다.
그중 아름답고 그윽한 소리를 골라 음악이란 장르를 만들어 지금까지 연주하고 부르며 듣곤 하였다.
사물의 형상을 그림으로 남겨놓아 감상하듯, 아름답고 소중한 소리를 보관했다가 다시 들을 수는 없을까! 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소리의 보관방법은 문자와 악보밖에 생각할 수 없던 시절에…….
이러한 의식이 가중되던 때 발명왕으로 알려진 '토마스 엘바 에디슨(1847~1931)'이 1877년 12월 지금까지의 상상을 뛰어넘는 소리가 기록된 기기 '틴 호일 Tin Foil'을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았다. 이를 지켜본 관심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귀신이 든 상자'니 '에디슨의 마술'이란 말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소리를 간직하고 싶어했던 인류의 첫 꿈을 이루어낸 기록이며 첫걸음이기도 하다.
통신기자였던 에디슨은 무선통신의 음파를 기록하려고 무진 애를 쓰며 골몰하던 중 축음의 원리를 발견하게 된 이 '틴 호일'은 말 그대로 주석 박이다.
구리로 만든 원통형에 1인치마다 10줄의 홈을 파서 그 위에 얇은 주석 판을 씌운 뒤 이 원통에 바늘이 붙은 송화기를 연결하여 송화기에 소리를 내며 작동하면 소리의 떨림이 바늘에 전하여져 주석 박에 자국을 내게 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와 확성기에 재생바늘을 끼워 돌리면 기록된 소리가 되살아나는 방법, 즉 '소리기록장치(포노그래프)'의 기계를 발명해낸 것이다.
이어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을 거듭한 '오디오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에디슨 콘서트 Edison Concert, 1912'가 만들어졌다.
이 '에디슨 콘서트'는 음향기기의 원리와 기본구조가 완성되었다고 평가된다. 그후 더욱 발달에 발달을 거듭한 축음기들로 '에디슨 콘서트'와 같이 음질이나 형태 등으로 경쟁하던 '그라오픈' 축음기, 처음으로 원반이 만들어진 '베를리네' 축음기, 당시 링컨센터와 값이 맞먹는 '아메리칸 포노그라프'-이것은 각기 녹음된 12개의 왁스실린더가 내장되어 있어 한번에 듣고 싶은 음악을 선택하여 들을 수 있는 독특한 것이다.
또한 처음으로 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뚜껑이나 축음기 문을 열어놓은 정도의 차이로 소리의 크기를 조절함) 'EMG'나 그야말로 다양한 축음기가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와 동양에서는 인도, 중국, 일본 등에서 만들어졌다.
이것은 지금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이나 일부 층에서만 들을 수 있는 연주음악을 시와 때를 막론하고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시대를 열게 된 선구자적 유물들인 것이다.
이렇게 귀한 음향기기의 선조 들과 그 후예라 할 최첨단 음향 기기 들이 한곳에 모여 매일매일 소리의 축제를 벌인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과연 그것은 가능할까? 역사의 뒤편에서 생애가 마감된 그 유물이 어떻게 지금도 살아있을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예, 이미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
푸른 바다로 유명하고 소나무의 운치가 함께 하는 늘 해음(海音)을 토해내는 강릉의 바닷가 송정이다.
예로부터 신라의 화랑들이 문무를 연마하며 풍류를 함께 하던, 그래서 호연지기를 키웠던 그 땅에 세계의 유명한 축음기들이 거의 다 모여 있는「참 소리 축음기 오디오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앞에서 얘기했던 축음기의 시조인 '틴 호일 Tin Foil, 미국 1877' 축음기의 완성판이라 불리는 '에디슨 콘서트 Edison Concert, 미국,1912'. 세계 유일로 당시 값이 엄청났다던 '아메리칸 포노그라프 American Phonograph, 미국, 1900', 스테레오 기능을 처음 가졌던 '울트라폰 Ultraphon, 독일, 1920', 하프 형식의 현악기 모티브의 '클링조르 Klingsor, 독일, 1907', 축음기의 황제' HMV 202와 HMV 511, 영국 1920', 축음기의 여왕 '멀티폰 MULTIPHON, 미국, 1905-1908', 모양이 아름다운 '바네스 W.H. Barnes, 영국 1923', 소리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EMG, 영국 1920' 종이나팔 음향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이엠진 익스퍼 주니어 E.M.Gine Expert Junior, 영국, 1931' 등과 '베를리네' 축음기부터 만들어진 SP원반들 10여만 장 등, 최첨단 오디오 장비까지 세계 16개국에서 만들어졌던 900여 점을 수집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또한 축음기 이전에 만들어진 쇠로 만든 떨림판을 수동으로 돌리며 소리를 내는 '뮤직박스'까지 그야말로 인류가 소리 보존을 위해 헌신하며 노력했던 축음기의 95%나 되는 종류의 전부가 모여 있는 셈이다.
이 박물관은 이토록 귀중한 소장품을 인류의 문화유산답게, 후대에게도 그 기능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아주 잘 정리하고 있다.
연건평 200여 평의 건물 1층에는 제1전시관과 관람객의 휴식을 도와주는 휴게실이, 2층에는 전시관, 3층에는 제3전시관과 시대별, 종류별로 그 특징을 들을 수 있는 감상실 등으로 이루어졌다.
'박물관의 전시품은 죽어 있다', '유물의 생명이 끝난 전시품은 지금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라는 일반인의 의식을 불식하게 하기 위하여 관람 중 필요한 것. 더구나 호기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소장품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친절하며, 자세한 안내를 박물관 측은 늘 배려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역사의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하며, 계속 사용되는 기기 들을 세심하고도 정성어린 마음으로 관리하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감동으로 채워 놓기에 충분하다.
평소 축음기나 음악에 관심이 없거나 지독히도 싫어했던 사람들도 이곳을 찾아오면 잠깐의 인내 후엔 소리의 역사가 지금가지 전해오게 된 동기와 그 발전의 모티브를 보면 감격할 것이다.
그만큼 살아있는 박물관이 사회적, 교육적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되는 셈이다.
이 소중한 공간의 박물관을 하루쯤이면 대략 볼 수 있지만 볼수록 흥미를 더하게 되므로 며칠 동안 여유롭게 관람한다면 금상첨화이겠다.
더욱이 위치가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변가에 있어 시끄러운 소음공해나 환경오염이 전혀 없는 지역이고 교통 또한 편리하여 더욱 좋은 곳이다.
게다가 인근에는 경포대와 경포호수, 해수욕장과 울창한 송림이 있어 산책을 겸할 수가 있고, 유서 깊은 오죽헌과 강릉시립박물관, 조선시대의 격조 높은 반가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선교장 박물관 등 천하의 명소들이 연이어져 있는 곳이다. 그런데 축음기 하나 만들지 않았던 우리나라에 어떻게 세계적인 희귀한 명품들이 그것도 서울이나 대도시가 아닌 한적한 동해안 소도시 강릉에 자리잡게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거짓말일 것이다', '모조품이겠지', '미국이나 유럽 혹 아시아 중 일본이면 모르겠다', '그래 일본도 어림없다' 등의 말과 웬만한 것은 모두 모아 박물관을 만들고 남의 나라 이민족의 것을 수탈해서 만드는 서구라면 가능한, 가능해도 쉽지 않은 이 신화적인 일을 치른 뒤에 숨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는 훌륭한 교훈일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 정부가 나서서 세계적인 박물관 하나 만들어 보자고 해서 해낸 일도 아니고 사회적 지도인사나 내노라하는 재벌이나 학자나 이 일에 관계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 주인공은 강릉지역의 중소건설업체를 경영하며 박물관장인 손성목(52)씨, 그는 말한다. "14세 때 처음 축음기를 대했고 10년간은 축음기에 가까이 가기 위한 준비기간이었으며 그 뒤 30년은 축음기를 찾기 위해 지구의 이 나라 저 나라를 헤맨 기간이었습니다"라고…….
손 관장은 열 네 살 때 외삼촌댁의 고장난 축음기를 수리하면서 축음기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의 태엽을 감아 돌리던 고장난 축음기가 며칠 밤을 세운 뒤 제소리를 내게 된 것을 보며 너무나 신기해하던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때 밤을 세웠던 열정은 그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어디 축음기가 있다는 소리만 들어도 찾아가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하며 애정을 굳히며 많은 지식을 쌓게 된다.
그러던 중 첫 수집의 동기가 되는 20대 중반 경 중동러시가 시작되던 때 건설의 현장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 보관되어 있던 축음기의 정보를 듣고 접근을 하였다. 그때는 아주 계획적인 접근이었는지 당시 책임자에게 술 몇 병을 쥐어주고 수집에 성공, 그 길로 공항으로 가 한국으로 공수하게 된 것이 효시란다. 술을 마시거나 술을 가지고 있어도 처벌을 받는 회교국에서 그것도 메카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술로 협상에 성공한(?) 일화는 주위사람들이 미루어 짐작하건 데 손 관장의 뱃심은 보통이 아닐 것이다.
손 관장은 그때를 '도망치듯 꽤나 마음졸였다'고 회상한다.
그때의 수집 품은 EMG 축음기로 종이로 만든 멋진 나팔관과 문을 여닫아 소리의 볼륨을 조절할 수 있었던 흑단으로 1920년대에 영국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 이후 전세계의 축음기의 소재를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게 된다.
주로 각국에 있는 축음기 애호 모임인 '그라모폰 클럽 Garrmophon Club'을 통하여 정보를 입수, 수집하게 된다.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은 세계 유일의 기종인 아메리칸 포노그라프의 경매가 이루어진 브라질에서의 일이다.
수십 차례의 번복을 거듭한 끝에 낙착이 되었을 때 거의 파김치가 된 그에게 각국의 수집가들은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후 그들로부터의 정보는 대단한 것이었고 지금은 그들과 아주 돈독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손 관장의 열정은 그 이후 더욱 폭발할 듯 치솟아 지구 어디까지도 날아갔던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이 자랑하는 에디슨 박물관에도 없는 에디슨이 발명한 기종이 이곳 한국에 있게 된 것이다.
금년 6월에 전세계에 2대밖에 없으며 축음기의 여왕이라 불리는 '멀티폰 Multiphone'이 경매된다는 정보를 듣고 미국 라스베가스로 갔다. 15년 전 라스베가스에서 2대중 1대가 경매되었고 이제 그 마지막 기회가 온 것이었다. 물론 그 치열함이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한달 전 통관되어 박물관에 도착한 그 '멀티폰'을 바라보며 더욱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이제 몇 남지 않은 명품들도 뒤늦지만 모두 이곳에 도착하게 되리라고…….
그 동안 억척스럽게 사업도 했고 축음기의 수집도 억척스럽게 했다.
그래서 얻은 것은 이제 축음기의 역사가 거의 모두 안식된 이 지역은 소리의 성지가 되었다. 이제 수집·보관만이 아닌 살아 숨쉬며 미래를 준비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손 관장과 박물관 측은 실행하려고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의지와 열정만인 소리의 성지에 대한 주위의 무관심은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라는 것이 늦지만 지금의 지배적인 생각들이다. 이제 제2의 소리 종합박물관이란 대명제 아래 손 관장의 청사진은 자못 흥미의 차원을 넘어선 사명감이 넘치는 계획이다. 현재의 200여 평의 박물관으론 전시와 감상의 공간으로써는 절대부족이다. 축음기와 오디오에 좀더 관심을 갖고 싶어도 모든 게 부족할 뿐이다. 역사를 간직한 민족과 나라만이 이후의 시공, 즉 미래를 지배할 수 있다는 평범한 사관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현재의 고리를 만드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교훈이다.
그 노력의 첫발은 음악도서실, 음악캠프장, 세미나실과 유스호스텔을 겸비한 숲과 호수 바다가 함께 하는 풍요로움이 가득한 건평 만여 평을 준비하는 그것이다.
더욱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역사도 같이하는 소장품들도 상당한 분량으로 준비를 갖춰놓고 있어 소리와 영상, 예술과 과학을 함께 연구하며 개발하는 시청각 종합박물관으로 발돋움하여 진정한 성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3층 감상 실에서 맨 마지막 영상음반이 최첨단 장비로 보여주는 것은 이 박물관이 나아갈 길의 예고이고 목표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갑니다. 그러나 소리는 남습니다"라는 손 관장의 말이 귓가에 계속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