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행. 1 /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양귀비의 전설과 진시황릉이 있는 도시




박찬 / 스포츠서울 문화부차장

서안(옛 長安)의 겨울은 짙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 12월 29일 북경으로부터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섬서성(陝西省) 성도(省都) 서안에 도착하니 추운 겨울 저녁인데도 공항 광장에 설치된 분수대에선 철모르는 분수가 하얀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본격적인 출발점에 도착했다는 점에서 한편 설레기도 했지만 웬일인지 서안시내로 향하는 우리의 기분은 오히려 착 가라앉는 것 같았다. 예쁜 처녀안내인이 나올 거라는 스루가이드의 말에 너무 기대를 걸었던 탓일까.

그러나 중국 인민해방군 대위 출신이라며 투박한 평안도사투리로 자신을 소개하는 조선족 현지가이드의 딱딱한 인사말을 들으며 어두워 가는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안개에 쌓인 서안의 풍경을 보는 우리는 갑자기 우울한 기분에 휩싸여 조용해졌다.

가는 곳마다 어여쁜 조선족 처녀 현지가이드가 나와 우리를 안내할 것이란 스루가이드의 말과 달리 무뚝뚝한 군 출신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하는 탓일까. 아니면 밤 안개에 젖은 차창 밖의 어두운 고도(古都)의 풍경 때문일까.

어두운 길거리로 수없이 무너진 집들이 스쳐간다. 옛집들을 헐고 새로 집을 지으려는 듯 거리마다 무너진 벽돌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중국은 예로부터 전(炰: 벽돌)이 발달해 불탑(佛塔)도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이 많다. 한중일 동양 삼국의 탑파를 보면 중국은 전탑(塼塔), 한국은 석탑(石塔), 그리고 일본은 목탑(木塔)이 주종을 이룬다.

어두운 안개와 무너진 거리의 풍경에 이유 없이 울적해진 마음은 그러나 숙소인 서안 건국호텔에 들어서면서 다시 활기를 찾는다. 마치 우리를 환영이라도 하듯 호텔 로비에서 현악 사중주단이 귀에 익은 클래식 소품을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안은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부터 한(漢)나라,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1천1백여 년 동안 왕도(王都)로 번영했던 유서 깊은 도시로 그 동안 '장안(長安)'이란 이름으로 불려왔다. 도시가 가장 번영했던 당나라 때부터 동서 9.5킬로미터, 남북 8,5킬로미터 규모에 인구 1백만 명이 넘는 대성곽 도시로 서방에까지 널리 알려졌던 국제도시다.

현재의 서안은 명(明)나라 때 축성한 높이 16미터, 주위 14킬로미터의 장안내성(長安內城)을 중심으로 한 구(舊)시가지와 교외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 시가지는 고도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고 성밖은 신흥공업지구가 형성돼 있다.

옛날 서안은 황성(皇城)으로 들어가는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중심으로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로 나뉘어 당나라 동쪽에 있는 나라에서 온 상인이나 외교사절들은 동시에, 서쪽(서역)에서 온 사람들은 서시에 살며 장사를 했다고 한다. 성문은 예전엔 동서남북 4곳이었으나 현재는 도시가 커지고 유동인구가 많아 18개로 늘어났다. 그러나 지금이나 옛날이나 서역을 가기 위해선 서문(西門)을 통과해야 한다.

서안은 이처럼 역사적인 도시인만큼 사적(史蹟)이 풍부하다. 남쪽 교외에 있는 64미터 높이의 자은사(慈恩寺) 대안탑(大雁塔), 42미터 높이의 천복사 소안탑(小雁塔), 양귀비와 당 현종이 사랑을 나눴다는 화청지(華淸地), 진시황릉, 그리고 지난 1974년 한 시골농부가 우물을 파다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진 진시황 병마용(兵馬俑), 비림(碑林), 신라 원측 스님의 사리탑이 있는 흥교사(興敎寺) 등이 그것이다.

서안에서의 설레는 첫 밤을 보내고 이튿날 가이드의 안내로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얘기가 전해오는 화청지와 진시황릉, 진시황 병마용, 그리고 당 고종이 그의 어머니 문덕황후를 기려 중창했다는 자은사 대안탑 등을 돌아봤다.

화청지는 주나라 때부터 있었던 3천년의 역사를 지닌 온천지로 당나라 말엽 당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눴던 것이다. 서주(西周) 때는 여궁(驪宮)이라 불렀는데 당나라 때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양귀비는 본래 현종의 아들 수왕(壽王)의 아내였으나 현종의 눈에 들어 그의 총애를 받았다. 며느리인 양귀비와 사랑에 빠져 몰락해간 현종, 그리고 현종의 지시로 스스로 자해해 죽은 세기의 미녀 양귀비와의 사랑얘기는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 러브 로망이다.

차가운 겨울 아침,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화청지에는 수많은 전각 외에도 양귀비가 사용했다는 욕지(浴池)와 일광욕을 하던 비하각(飛霞閣), 당 현종과 양귀비가 처음 만난 곳이라는 오간청(五間廳) 등이 있다.

오간청은 특히 1936년 12월 12일 공산군 토벌을 위해 서안에 주둔 중이던 장학량이 국공(國共) 내전의 중지와 항일(抗日)을 요구하며 독전 차 서안에 온 장개석을 구금한, 이른바 '서안사변'의 현장이기도 하다.

오간청에는 장개석이 당시 쓰던 침대와 책상 등 집기가 진열돼 있고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알려주듯 벽 곳곳에 탄흔이 남아있다.

화청지에서 멀지 않은 진시황릉으로 가는 길 양편에는 석류나무와 감나무가 특히 많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서안의 시화(市化)가 석류꽃이란다. 이곳 석류는 시지 않고 달콤해 우리도 한 움큼 사가 지고 내내 버스에서 먹었는데 물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또 감나무가 많아 곶감이 많이 생산되는데 한국에서 수입해 가는 곶감은 거의 모두가 이곳 서안에서 생산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밖에 구릉 구릉으로 이어진 서안 인근의 산야(山野)에선 고사리가 많이 나오는데 한국에선 중국에서 수입되는 고사리를 백두산이나 연변 등 동북 3성(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에서 들여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곳 서안에서 가져가는 것이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진시황릉 가는 길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다. 화청지를 출발해 안개를 해치며 20여 분 달리니 화청지 뒷산인 여산(驪山)으로 이어진 화산(華山) 줄기 산자락에 또 하나의 산처럼 우뚝 솟은 진시황릉이 나타난다.

중국 곳곳에는 모두 11개의 진시황릉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가짜 능(陵)이다. 근처에 있는 병마용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고, 또 죽으면 고향에 묻히는 섬서성 사람들의 전통에 따라 진시황도 이곳에 묻혔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안지역에는 주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 72개의 왕릉이 있다. 주나라부터 당나라까지 황제의 수는 모두 73명인데 당나라 측천무후가 그의 남편인 당 고종과 합창했기 때문에 능이 72개라는 것.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발굴되지도, 일부러 발굴하지도 않고 있다.

진시황릉은 능에서 동쪽으로 1.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병마용을 포함해 주위 6.2킬로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지하 궁전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병마용을 보면 과연 광대한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 달에서 유일하게 보인다는 인조물인 만리장성을 쌓고 삼황오제(三皇五齊)를 다 합해도 자신만 못하다하여 스스로를 '처음으로 황제'(始皇帝)라 칭한 진시황의 묘에 어울리는 일급의 작품이다.

병마용은 4개의 굴로 돼 있는데 4개의 굴에서 모두 8천 개의 병마(兵馬)가 발굴됐다. 이중 병정은 모두 6천 개. 죽은 황제의 사후를 지키기 위해 흙 속에 38명씩 4열 종대로 늘어선 이 근위군단은 178센티미터의 똑같은 키에, 그 하나 하나가 얼굴표정에서 머리모양까지 모두 다르게 만들어져 있다.

6천이라는 숫자도 놀랍지만 천 개 모두의 표정을 달리해 만든 집념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특히 지휘부인 3호 갱의 병마용은 채색까지 돼 있어 지금도 명령을 내리면 곧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늠름한 모습이다.

이들 병마용은 모두 동쪽 방향으로 포진하고 있는데 그것은 진나라가 통일한 6국이 모두 동쪽에 있어 그들의 반란을 대비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현재 병마용은 4개굴 중 1호 굴과 3호 굴만 개방돼 있다. 1호굴 한쪽 켠 에서 항우가 병마용 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병마용 들이 지닌 무기는 진짜 무기였다고 한다)를 가져가면서 파괴했다는 부서진 병마용 들을 한창 복원하고 있었다.

그 옛날 병마용을 조성하는 데는 모두 70만 명이 동원됐다고 전해지는데 진나라가 망한 뒤 석 달에 걸쳐 불태워졌다는 아방궁과 함께 진나라의 국력이 과연 어떠했는지 병마용을 보면 대략 가늠해볼 수 있을 듯하다. 현재 병마용 내부에선 촬영이 금지돼 있고 대신 슬라이드를 팔고 있다.

'서안에 오면 눈이 커지고 입이 커진다'는 말이 있다. 또 '죽은 사람이 산 사람 먹여 살린다', '사람 대가리 흙 대가리만 못하다'란 말도 있다.

천년고도였던 탓으로 왕조 때마다 중국의 미인들이 모두 서안에 모여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피를 받은 서안 처녀들이 '너무 예뻐' 눈이 커지고 진시황 병마용을 보면 그 장대한 규모에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서안미녀들이나 병마용을 보면 그럴 듯 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죽은 사람이 산 사람 먹여 살린다'는 말은 중국의 유물유적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그들의 선조 들이 남긴 유물유적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이 뿌리는 돈이 엄청나 이를 빗댄 것이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서안은 겨울철인데도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사람 대가리 흙 대가리만 못하다'는 말은 몇 년 전 진시황 병마용에서 한 사람이 토용(土俑)의 머리를 훔쳐 달아났다가 붙잡혀 사형을 당하고 난 뒤부터 생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안 지역의 유적 중 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이 있다. 서안 근교에 있는 흥교사(興敎寺)가 바로 그곳이다.

서안 동남쪽 28킬로미터 지점. 섬서성 장안현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있는 이 절은 삼장법사 현장스님의 5층 사리탑과 그의 두 제자인 규기와 신라 승 원측(圓測)의 3층 사리탑과 영정, 그리고 그들이 번역한 각종 경전들이 모셔져 있다.

12월 31일 아침 일찍, 일행이 비림을 돌아보기 위해 호텔을 나가기 전 나는 일행과 점심식사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스루가이드만 대동하고 흥교사를 향해 떠났다.

안개 자욱한 서안 시내를 벗어나 시골길로 들어서자 쭉쭉 뻗은 백양나무 가로수들이 안개에 젖은 시골풍경과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