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염한, 때로 난폭한, 퇴폐미의 카르멘
장광열 / 무용평론가
유럽무용 급성장, 취리히 메자르 발레단과 함께 스위스의 3대 무용단
최근 들어 세계 무용 계의 황금시장으로는 미국의 뉴욕을 비롯해, 프랑스의 파리, 그리고 일본의 도쿄가 꼽힌다.
'황금시장'의 기준은 메니지먼트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돈'과 연관된다. 그만큼 흥행 성이 있는 도시인가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들 도시 중에 파리와 도쿄가 들어간 것이 눈길을 끈다. 파리의 경우 클래식 발레보다는 분명한 자기색깔을 갖고 있는 안무가들의 다양한 모던 발레 계열의 작품이, 도쿄의 경우는 클래식 발레의 인기가 대단하다.
80년대 중반 이후 유럽 무용 계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미국의 현대무용에 다소 뒤쳐졌던 유럽무용은 재능 있는 안무가들의 독창적인 작업으로 늘 활기에 넘쳐있다. 미국 쪽이 경제적인 문제로 예술가들이 곤란을 겪을 때 프랑스의 무용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정책에 힘입어 놀라운 성장을 해왔다.
유럽에는 프랑스뿐 아니라 독일과 네덜란드 쪽 안무가들의 활동도 만만치 않다. 부퍼탈 무용단을 이끌고 있는 피나 바우어,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을 이끌고 있는 포 사이드, 함부르크 발레단을 이끌고 있는 존 노이마이어,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이끌고 있는 막시아 하이데 등 유명 안무가들이 모두 독일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댄스 디어터의 유리 킬리안은 그 천재성으로 관객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여기에 벨기에, 스위스, 핀란드, 스웨덴 무용단들의 성장도 최근 들어 괄목할 만하다. 곧 무용예술을 통한 창작활동의 열기와 수준은 이제 몇몇 강대국(?) 위주에서 벗어나 여러 면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적으로 다국적 무용수들로 이루어진 무용단들의 수가 늘어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세계 여러 나라의 직업무용단에는 아시아권 무용수들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 선두주자는 일본, 중국, 한국 무용수들의 직업 무용단 진출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중에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강수진과 스위스 바젤 발레단의 허용순, 미국 마사 그레이엄 현대무용단의 유영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외국의 직업무용단에서 중요한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는 주인공들이다.
바젤 Basel은 취리히 제네바와 더불어 스위스를 대표하는 도시이다. 우리에게는 바젤 음악원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바젤 극장에 소속된 극단과 발레단의 활동이 만만치 않음을 현지 취재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극장에서는 매월 정기적으로 월간으로 정보지가 발간되고 있었다. 발레단과 극단의 공연작품에 대한 안내뿐만이 아니라 안무자나 연출가, 무용수들과 배우들의 이모저모에 관한 얘기도 다루고 있었다.
공연 때마다 연일 객석이 메워지는 열기와 함께 정보 가이드를 통해 시민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극장측의 노력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마츠 에크 안무의「카르멘」에서 주역으로 열연
취리히무용단, 베자르 발레단 등과 함께 스위스를 대표하는 3대 무용단으로 꼽히고 있는 바젤 발레단은 모두 40여 명의 단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허용순은 입단, 현재 주역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
1994~1995년 시즌에 바젤 발레단은 예술감독인 유리 바모스의 작품과 객원 안무가로 초빙 괸 닐스 크리스테와 마츠 에크의 작품들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드라마 발레를 추구하며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안무 구성이 특징인 유리바모스는「호두까기인형」,「코펠리아」등 클래식 발레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과「스파르타쿠스」등을 안무한 헝가리 태생의 무용수 출신이다.
나는 6월 초순 이곳을 방문, 바젤 발레단이 공연하는 두 개의 작품을 관람했다. 닐스 크리스테 안무의「인너 무브 INNWEMOVE」와 마츠 에크 안무의「카르멘」이 그것으로 허용순은 「카르멘」에서는 주역으로「인너 무브」에서는 같은 비중의 6명 주역 무용수중 한 명으로 출연, 바젤 발레단에서의 그녀의 비중을 알게 했다.
3천 석의 객석은 꽉 찼다. 외국의 어느 공연장에 가든 볼 수 있는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부부들이 공연 전에 로비에서 간단한 음료수를 들며 담소를 나무는 모습도 정겨웠다.
3명의 남성 무용수와 3명의 여성 무용수가 등장하는 닐스 크리스테 NILS CHRISTE 안무의「인너 무브」의 무용수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신체의 흐름이 일품이었다. 40여분 동안 계속되는 이 작품은 흔히 현대무용에서 보는 빠른 스피드의 춤보다는 팔과 상체를 이용한 곡선 적인 동작들이 많이 가미되어 있었다.
6명의 무용수들은 때로 솔로로, 때로 2인 무로 춤의 대형을 변화시키면서 무대 위로 강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허용순은 솔로에서는 유연한 상체의 움직임으로 2인 무에서는 힘있는 동작으로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었다.
1부「인너 무브」에서 초반에 엄청난 힘을 쏟아냈던 허용순은 15분 휴식 후 2부에서 계속된「카르멘」에서 폭발적인 에너지와 요염한 연기, 감성적인 춤으로 그녀의 진가를 한껏 발휘했다.
「카르멘」의 안무자 마츠 에크 Mats Ek는 스웨덴의 컬 베르그 발레단에서 활약하다 어머니 컬 베르그와의 의견차이로 지금은 자유롭게 여러 컴퍼니의 객원 안무자로 활동하고 있는 정견으로 컬 베르그 발레단과 함께「백조의 호수」와「지젤」을 새롭게 해석한 안무로 충격을 던져준 바 있다.
귀에 익은 음악과 함께 막이 오르자 나에게 비쳐진 첫 장면은 그 동안 보아왔던「카르멘」과는 확실히 달랐다. 검은 바지에 검은 셔츠 차림의 남성들의 모습이 우선 그랬다. 세일리아를 무대로 한 병사들의 모습에 익숙한 보통의 「카르멘」과는 확실히 달랐다.
마츠 에크는 이야기의 전개를 노련하게 돌려놓았다. 그는 카르멘을 창녀이자 도둑으로 설정했다. 오페라나 소설 속에서의 카르멘은 감성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혹적이며, 믿을만하지도 못하고, 초인적이고 자주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마츠 에크는 카르멘을 강하고 자유롭게 살면서 아무 것에도 매어있지 않은 인간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츠 에크는 또 돈 호세를 이야기를 설명해 나가는 내레이터로 설정했다. 그러나 작품이 진행되면서 마츠 에크가 설정한「카르멘」은 메르메의 소설 속에 나타나는 카르멘과 아주 판이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토리나 의상 등에서 절충적인 효과를 노리는 듯 보였다.
이 같은 마츠 에크 식의 설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카르멘이다. 그녀에게 공연의 성패가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의 초점은 카르멘에 맞추어져 있었다. 종반부에 내레이터 역의 돈 호세가 카르멘을 죽이는 설정은 있었지만 투우사 에스카밀로나 시골처녀 미카엘라는 춤 적인 구성을 위해 등장하는 역에 불과했다.
마츠 에크가 허용순을 카르멘으로 캐스팅한 것은 안무가다운 통찰력에 기인한다. 허용순은 요염한, 때로 난폭한 퇴폐 미의 카르멘을 기막히게 소화해 냈다.
카르멘의 상징인 붉은 색 레이스의 드레스를 입은 허용순의 도약은 허공 위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가 빚어낸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작품의 종반부에 카르멘은 어깨가 드러나는, 등이 움푹 파진 금색의 롱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다. 시가를 피어 물고 뇌색적인 몸짓으로 남성들을 유혹한다. 빠른 춤보다는 유연한 상체와 허리를 이용한 그녀의 움직임은 카르멘이 갖고 있는 여러 성격들을 암시한다.
마츠 에크의 안무는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춤동작과 연기, 여기에 꼭 필요한 상황설정만을 했다. 기본적인 스토리를 토대로 무용 예술이 가진 춤 적인 부분들을 과감하게 삽입시키는 놀라운 구성력을 보여주었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열광했다. 카르멘을 외쳐대며 부라보를 연발했다.
허용순은 우선 뛰어난 감정 연기를 보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심리상태를 실감나게 연기했다. 시종 극을 이끌어 가는 춤 적인 기량에서나 움직임을 받쳐주는 체력적인 면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후 분장실에서 만난 허용순은 그러나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다져진 탄탄한 기량과 체력은 프로무용수로서의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기인한 것임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거쳐 프랑크푸르트발레단에서도 활약
인천 태생인 허용순(30)은 유니버설발레단에서 활동하는 문훈숙, 현재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하는 김인희 등과 동기생, 선화 예고 2학년 때 이들과 함께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서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선생에게 사사했다.
다른 친구들이 한국으로 귀국,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으나 허용순은 독일로 건너가 그곳 직업 무용단에 입단, 프랑크푸르트발레단에서 3년, 스위스 취리히무용단에서 2년 동안 활동하다가 지난 1988년 스위스 바젤 무용단에 입단했다.
유연한 춤과 연기력이 일품인 그녀는 이 발레단의 고참급 무용수였다.
분장실 위 극장 전용의 레스토랑에서 그녀와 마주앉았다.
"한 달에 20여 회 정도의 공연이 있어요. 유리 바모스 감독이 부임한지 4년밖에 안되었으니 내가 우리 발레단의 선배이지요(웃음). 클래식 발레보다는 모던 계열의 작품을 많이 공연하고 유리 바모스 외에도 유럽의 유명 안무가들이 객원 안무를 해 다양한 무용스타일을 접할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즐겁습니다"
최근 유럽에 적을 둔 무용단의 활동은 클래식 발레보다는 자유롭고 기발한 상상력이 동원된 모던 발레 계열의 작품이 더 많이 공연된다고 전하는 그녀는 동양계 무용수들의 진출이 전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인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있는 수진이는 제 후배이지요.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서도 같은 선생님에게 배웠고요. 슈투트가르트 까지는 비행기로 5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두 사람 모두 빡빡한 공연 일정에 쫓겨 자주 만나지 못해요. 생일 때는 꼬박꼬박 카드를 교환하며 안부를 묻지요."
학창시절에 너무 어렵게 발레를 공부했던 터라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회를 만들고 그런 시간을 즐긴다고 귀뜸 해 준다.
예술감독인 유리 바모스는 "현재 우리 발레단의 단원 38명의 무용수들 중 동양계 무용수들이 8명 있다. 그들은 서방의 무용수들보다 유연하고 훨씬 더 집중력이 강하다. 그러나 감정표현 면에서 다소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러나 허용순의 경우는 예외다"라면 그녀의 재능을 칭찬했다.
「카르멘」의 안무자 마츠 에크는 "허용순은 동작이 크고 에너지가 넘치며, 동시에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며 그녀를 캐스팅 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그 동안 그녀는 유리 바모스의 「루피도」,「스파르타쿠스」, 폴 테일러의「에스플라너드」,그리고 윌리엄 포 사이드의「스텝 텍스트」에서 주역 무용수로 출연했었다. 클래식 발레보다는 모던 발레계열의 작품을 더 선호한다는 그녀는 앞으로도 유명 안무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표현영역을 넓혀 나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