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잇는 예술가족. 2 / 호른 주자 신홍균. 신현석

멋진 행복을 연주하는 호른 가족




사회. 장일범 / 월간「객석」 기자

어떤 직업이든 대를 이어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늘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부자가 같은 오케스트라에 나란히 앉아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면 그것은 감동의 차원을 넘어 쉽게 믿어지지 않는 사실일 것이다.

매일 아침 9시 여의도 KBS교향악단 연습실, 연습 시간이 돌아오면 아들 신현석은 호른 수석 주자인 아버지 신흥균 바로 옆자리에 앉는다.

"아들과 나란히 연주할 때 지휘자한테 혼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합니다. 예전에 남산 국향 시절 어떤 단원의 아들이 구경을 하고 있는데 바로 그 단원이 지휘자한테 마구 혼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아들도 마구 울어버리고 말았죠."

그러나 신흥균의 이야기는 겸양지덕에서 나온 말일뿐이다. 그는 이미 KBS의 전신 국향과 KBS에서만 도합 30년을 호른 주자로 뛰어왔다. 또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 모두 서울과 지방의 여러 오케스트라에 포진해 있을 정도로 국내 최고의 베테랑이다.

"음악가라는 이 험난한 길에 어떻게 아들을 동참시킬 생각을 했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아들이 결정한 일"이라고 대답한다.

처음 신홍균은 신현석에게 음악을 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매번 늘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아들 신현석이 호른을 배우게된 계기를 말한다. "제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처음 호른을 시키셨어요. 저는 이리저리 도망 다녔죠. 그러다가 동갑내기 친척 중에 아버지에게 호른을 배우는 노승희가 국민학교 6학년때 최연소로 육영콩쿠르 금상을 탔어요. 그 모습을 보고 셈이 많았던 제가 호른을 배우겠노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죠. 저는 어렸을때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던 어린 소년이 단 한번의 콩쿠르 참관으로 음악가의, 호른 주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신현석은 호른 주자로서 국내일류 코스를 밟아갔다. 예원, 예고, 서울대 음대를 거쳐 작년 11월 해군 군악대에서 제대한 이후KBS에 합격 지난 9월 2일부터 정식 출근하고 있다.

"자식 가르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실감했죠. 잘 안되면 안타까움에 주먹부터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게 하려면 당장 그만 두어라' 라고 소리지른 적도 있지요. 대학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손이 안 돌아가면 신홍균 아들이 와서 시험보았는데 못했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걱정되어 '이 부분만 20번해' 하고 소리지른 후에 밖으로 나온 적도 있었어요."

신현석이 아버지에게 배우면서 가장 많이 충돌했던 부분은 소리를 찾기 위해 많은 경험 즉 시행착오를 겪는 한이 있더라도 음악적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가르쳐 주셨지만 저는 기왕이면 모든 것을 다 체험하고 싶었어요. 방법도 제가 찾고요. 조금 만져보고 말면 속에 들어 있는 뜨거움을 못 느낄 것 같아서였죠. 요즘은 아버지와 음악으로 인한 다툼은 없습니다.

"아버지 신흥균이 처음 호른을 본 것은 일제시대였다. 그의 작은아버지는 마미나카이라고 하는 서울내 일본 백화점에서 문앞 인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 직장 상사가 호른을 전공했던 사람이라 그의 작은아버지는 그에게서 호른을 공부할 수 있었다. 해방된 다음 작은아버지는 군악대에서 「경기병 서곡」을 자주 불었다고 한다.

이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신흥균은 중학교 때 밴드부에서 알토와 유포니움을 배웠다. 고 3이 되어 호른 주자가 될 것을 결정, 서울 음대에 입학하게 된다. 학창시절 1학년 때부터 시간만 나면 연습에 몰두했던 그를 국향의 호른 수석이 눈여겨 보았고 당시 지휘자이던 임원식 선생이 그의 차이코프스키의「로미오와 줄리엣」중 솔로를 듣고 쾌히 승낙, 2학년인 1960년 2월 28일부터 KBS에서 엑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 이후 그의 대학 생활은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KBS에 연습하러 갔다가 다시 들어와 오후 수업, 졸업 때 까지의 시간표는 바리지 않았다. 다른 과목은 무사 통과했지만 빈틈없고 철저하게 출석을 관리하던 이성재 교수(현 문화예술진흥원장)의 악식론은 통과를 못했다. 결국 4학년 때 겨우 재수강, 가까스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졸업반 때 주위에서는 대학원으로 진학하라고 조언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더 이상 학업과 오케스트라 활동을 병행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에 그는 육군 군악대에 입대했다. 그는 한국 육군에 큰일을 남기고 제대했다. 지금도 육군에서 사용하고 있는 아침 기상, 일과 개시, 소등, 취침 나팔은 바로 그가 작곡한 것이다. 당시에 그가 지나치게 어렵게 작곡했기 때문에 많은 나팔수들이 틀리게 불기가 일쑤여서 이 곡 때문에 얼차레를 받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지금은 아예 3명이 함께 불고 있을 정도이다. 신흥균의 학창시절 재미있는 에퍼소드가 하나 있다.

학창 시절 연습벌레이던 그가 점심시간에 연습하고 있는데 현 예고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신경옥 선생이 자신이 연습하고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지금 학장님이신 현재명 선생님이 오수를 취해야 하는데 호른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시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신흥균은 동숭동 당시 캠퍼스 담을 돌아 서울대 병원쪽의 공터에서 연습을 했다. 며칠 후 학보에 서울대 에 입원해 있던 환자가 쓴 글이 실렸다. 나의 고통 나의 아픔을 저 호른이 대신 울어주는구나.'

제대한 후 KBS에서 활약하던 그는 1970년 대만에서 열린 뮤직캠프에서 호평을 받고 임어당의 초청으로 대만 문화대학 음대에서 호른 전임으로 교편을 잡는다. 그래서 지금도 대만에는 그의 제자들이 많다.

3년을 머무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KBS교향악단의 호른 주자 정윤민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나 한잔 했다. 우리 모두 기다린다. 빨리 돌아오라" 지휘자 홍연택선생에게 호른 진용이 매일 혼나고 있다는 전갈과 함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 눈물을 펑펑 흘리며 가방을 싼 신흥균은 집으로 한국으로, KBS로 돌아왔다.

KBS에 부수석으로 돌아온 신홍균은 1년 후 수석으로 승격했고 20년간 부동의 수석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제 신홍균에게 가장 힘든 일은 아들 신현석의 연주가 있는 날이라고 한다. 레퍼토리는 자신이 이미 모두 연주했던 곡들, 따라서 어떤 곳이 힘들고 어떤 곳이 클라이맥스인지는 눈을 감고도 알고 있게 마련이다. 아들 연주회에 가면 자신이 더 떨림을 느낀다. 아들의 몸과 음악 그리고 객석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몸이 움직인다고.

"아들을 가르치는 것도 어렵지만 아들의 연주를 앉아서 보은 더 어렵군요."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호른 주자로 그것도 훌륭한 오케스트라의 호른 주자로 만든 공로는 어머니에게 많은 부분 돌려져야같다.

어머니 이수자씨는 허정 내각 수반 시절 1961년에 작곡상 받았던 작곡가 지망생이었다. 신흥균은 클라스 메이트인 부인과 알고 지내다가 이수자씨의 졸업 작곡발표회에서 연주를 해준 인연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1965년 결혼한 부부는 자녀는 둘만 낳아 잘 기르겠다고 다짐했고 현재 컴퓨터계에서 뛰어난 인재로 꼽히는 장남의 뒤를 이어 1968년에 태어난 차남이 신현석이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쳤기 때문에 신현석은 어려서부터 피아노 소리가 들려야 잠을 잘 수 있는 정도였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연습, 레슨시간에 들어왔던 호른 소리를 통해 좋은 소리, 나쁜 소리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들이 동요를 부를 나이에 그가 흥얼거리고 다녔던 것이 호른 협주곡이었다. 어렸을 때 들어두었던 경험들은 신현석으로 하여금 곡을 빠른 속도로 익히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자신이 고등학교 때 못했던 목관 5중주단을 결성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고 1때 신현석이 롱쿠르에 나가 1위를 했을 때 아버지 신흥균은 당시 목관 각 파트별로 수석한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와 반강제적으로 목관 5중주를 결성하게 했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후에 이들로 하여금 동아콩쿠르 금상도 타게 했음은 물론이다. 또 당시 목관 5중주 5명 중3명이 지금 KBS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으니 그는 실로 재목들을 알아본 것이었다. 신홍균이 이들에게 강조했던 것은 "음악에는 다방면이 필요치 않다. 한 우물만 퍼라" 였다.

신현석은 KBS교향악단 오디션에 재수해서 붙었다. 그런데 첫 번 오디션에 떨어졌던 이유 중 하나가 지금 그의 부인 때문이었다는 것이 재미있다. 심사위원 중 한사람이 신현석보다 부인 박은영에게 점수를 더 주어 신현석은 0,7점 차이로 오디션에서 낙방했었다고 한다. 신현석의 부인 박은영은 현재 계원예고에 출강하고 있는데 역시 아버지의 호른 제자였다.

아버지 밑에서 제자와 제자로 만난 두 사람 "여제자를 아들방에 가서 연습하게 했더니 동갑인 두 사람이 서울대에도 나란히 입학하고 둘이 연애가 되어 결혼까지 하더군요. 처음엔 선생님하고 부르던 것이 이젠 아버님이 되었어요.' 흐믓하게 웃는 신홍균.

요즘 신현석은 4∼5시면 당산동 집에 돌아와서 동갑내기 아내와 함께 2∼3시간 동안 연습한다. 신흥균은 농삼아 부인에게 이런 말도 한다. "여보, 당신도 도, 솔만 소리낼 수 있으면 우리 가족은 호른 4중주도 할 수 있어요."

신흥균은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관악기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면서 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악기를 들고 빈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마침 주인이 다가오더니 악기의 모양새를 보고 호른을 부느냐며 자기 조카가 빈필하모니에서 호른을 분다고 한참 자랑하러니 기분이 좋아져 당신의 오늘 저녁은 무료라고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피아노, 바이올련, 첼로 주자만 음악가인줄 알고 나머지는나팔 분다고 표현하니 솔직히 그들의 인식이 부러웠다고 한다.

"우리 집안은 저 때문에 호른가족이 되었지요" 친척 조카들 중에 부천시향의 노승희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84학번 이지원, 서울대 1학년에 다니고 있는 이현주, 예원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김효정 등 신흥균에 의해 호른 숲을 이뤄가고 있다. 작은아버지에 의해 처음 이 집안에 시집 온 호른이 이제 신홍균의 가족을 '호른 가족'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하고 있다.

"나는 아들에게는 좋은 선생님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들이 손자를 낳아 준다면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될 자신이 있습니다. 손자에게 가장 좋은 선생님은 바로 할아버지일 테니까요."

신흥균의 아들 신현석과 며느리 박은영 부부 사이에서 3세가 태어난다면 이 집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른 가족으로 명성을 떨칠 것 같다. 머지않아 3대가 같이 불어대는 멋지고 행복한 세계최초의 호른 오케스트라 공연을보게 될지로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