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개방 논의 앞서 규제만이 최선의 태도인지
-전자게임, 영화문화현상
김명환 /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일본 것' 이라는 이유만으로 규제를 받지는 않는다
지난 10월의 국정감사에서 한 국회의원이 일본대중문화 개방 스케줄을 담은 「일본 대중문화 대응방안」이라는 문체부의 문건을 공개함으로써 일본 문화 개방이 여론의 관심사로 다시 한번 떠올랐다. 이 자료는 광복 50돌을 맞는 1995년 8월을 전후하여 문화적 이해와 협조를 다지기 위한 '한·일 영화주간', '한·일 만화교류전' 등 문화주간 행사를 실시한 뒤 1996년부터 1, 2년간의 실험단계를 거쳐 분야별로 단계적 개방 계획을 실천해 나가며, 위성방송이 본격화하는 1998년 이후에는 일본 대중문화를 전면 개방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비록 문체부장관이 "확정되지 않은 문건이며 정부의 입장도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이번 파문은 일본대중문화 개방 시비를 또다시 일으켰다.
언제나 일본 대중문화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공식적으로 빗장을 여는 게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한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 논의의 주된 대상은 일본 영화와 일본 가요다. 이 두 가지가 현재 정부에 의해 '공식 수입'이 규제되고 있을 뿐 나머지 분야의 일본문화들은 사실상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외국의 문화상품들과 똑같은 차원에서, 내용이 문제가 없다면 '일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륙불가의 규제를 받지는 않는다.
영화와 가요를 문제삼는 이 두 가지가 대중적 파급효과, 특히 어린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구로자와·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등 세계적 화제가 된 작품들은 일본의 '영화'이므로 정식 수입이 안되고 일본문화 특유의 폭력성이 엿보이는 만화영화나 잔인한 상황이 묘사된 비디오게임은 수입이 허용되는 이상한 경우가 일어난다. 작년에 수입된 만화영화 비디오 1백20편 중 일본에서 '정식' 수입된 것이 79편이나 되는데 이것들이 과연 영화나 가요에 비해 부정적인 영향이 덜한지 생각해 볼일이다.
때문에 필자는 일본 대중문화 전면개방이 옳으냐 그르냐의 진부한 논의에 앞서 현재의 이같은 당국의 규제 방식이 최선의 태도인지부터 점검해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나 가요에 관해서도 그렇다. 지금 합법적으로 일본 영화를 국내에서 보거나 가요를 듣기는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파라볼라 안테나를 통한 일본 위성방송 시청이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위성방송 수신가구 숫자가 50만 명으로 추산될 정도로 늘어났으니 한 가족의 숫자를 5인으로 잡아도 무려 2백50만 명쯤이 일본 영화와 일본 가요를 수시로 보고들을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일본의 상업 채널들이 위성을 통해 방영하는 질 낮은 오락프로그램류들은 영화나 가요보다 몇 배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게 분명한데도 역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위성방송을 통해 시청할 수 있게 돼 있다.
또 비디오게임을 보자. 게임기는 업계 추산에 따르면 3백만 대가 보급돼 있고 전체 시장 규모는 올해 1천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디오 게임기와 게임 프로그램은 일본제라고 해서 금지되지는 않으며 내용 심의에 통과만 하면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팔린다.
일본 캡콤사가 제작한 「스트리트 파이터」같은 게임은 어린이들 사이에서 고전이 됐고 이미 각 컴퓨터 게임기 업체들은 많은 일본 게임을 앞다퉈 들여다 판다. 전자게임을 '장난감'처럼 여겨서 영화나 가요보다 느슨하게 규제하는지는 몰라도 게임은 얼마든지 일본 문화의 부정적 측면을 청소년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매체다.
가령 작년 청소년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일본 비디오게임 「쿠니오군열혈축구」를 보자. 이 게임은 쿠니오가 이끄는 일본 축구팀이 세계 각 나라 팀과 싸우는 내용의 스포츠게임인데 여기에서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단 한국 축구팀은 일본 축구팀에 맥을 못 추고 거의 매번 패배한다. 배경과 자막도 모두 일본 것임은 물론이다.
이런 게임이 자칫하면 어린이들에게 한국에 대한 열등감과 일본에 대한 맹목적 선망을 조장할 것은 뻔하다. 또「용호의 권」(R 어뮤즈먼트사) 등의 폭력게임은 피가 튀거나 몸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장면을 담고 있기 일쑤다.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화, 비디오게임
합법적으로 국내에 수입되지는 않았지만 「제독의 결단」이라는 일본 게임은 2차 대전을 배경으로 주변국 주민이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장면, 종군위안부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 나와 일본 현지에서도 물의를 빚고 있었다. 이같은 일본 게임이 선풍을 일으키자 국민학생 대상의 어떤 잡지는 심지어 게임화면의 일본어를 모르는 국민학생들이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さけ=술'이라는 식의 간이 일본어강좌를 지상에 싣기도 할 정도였다. 물론 뒤늦게 정부가 올해 초부터 일본 게임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일본어가 자막으로 등장하거나 폭력 선정적인 내용은 봉쇄한다고 했으나 음성적으로 수입된 일본 게임들은 얼마든지 판치는 게 현실이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빗장을 열든 말든 관계없이 일본의 대중문화는 이미 느슨한 단속을 틈타고 우리 사회곳곳, 특히 젊은이들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이제는 일본 대중문화를 우리가 왜 막아야 하는가에 관한 입장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일본문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대개 세 가지 종류다. 즉 첫째로 일본이 식민통치의 가해자라는 국민감정이 아직도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일본 문화가 다른 외국문화보다 잔혹성과 선정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고, 셋째로 우리 영화나 가요 제작자들은 일본문화가 개방됐을 때 예견되는 시장잠식을 우려해 반대의 목청을 높인다.
이중 국민감정의 문제는 아직도 중요한 변수이기는 하지만 그저 '일본 것이니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기에는 다른 분야에서 너무 많은 일본 문화들이 상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정신대 문제 등이 아직도 한일간의 현안으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국민감정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일본의 만화책, 게임, 만화영화, 연극, 뮤지컬 등이 합법적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선보이는데 영화와 가요만은 무조건 안 된다는 말을 하기가 참 어렵게 돼가고 있는 셈이다. 또, '시장을 빼앗길 우려가 있으니까 안 된다'는 이야기는 일본뿐 아니라 모든 외국 대중문화 시장개방과 국내 문화산업육성의 일반적 문제와 연결되는 쟁점이다. 얼마든지 논의의 여지가 있는 문제지만 '일본문화'의 개방 논의의 특수성과는 좀 거리가 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적 문제는 일본문화가 갖고 있는 잔혹성과 선정성의 문제에 눈돌려 이를 어떻게 거를 것인가를 생각하는 일이라고 본다. 필자는 일본 전문가는 아니지만 일본의 문화, 특히 대중문화들 속에는 우리로서 고개가 갸우뚱해질 정도의 잔혹·선정성이 있다고 여긴다.
가령 영화의 경우 선정성에서 문제되는 것은 일본의 이른바 '로만 포르노'다. 일본은 한해 약 2백여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사실 이중에서 2시간 안팎의 영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극영화는 80여 편에 불과하고 나머지 1백여 편이 1시간 안팎의 로만 포르노다. 이 영화들은 '치모가 드러나는 헤어누드는 안 된다'는 일본의 검열기준에 맞춰 제작한 것이어서 미국이나 유럽의 본격 포르노그라피보다는 덜 지독하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로만 포르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베드신의 적나라함보다도 대부분 변태적인 성행위를 담고 있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일본의 유흥가에서 흔히 쓰이는 약어인 'SM' 즉 새디즘과 매저키즘sadism masochism이 문제이다. 또 일반 극영화의 경우 시대극과 현대극이 있는데 시대극에서는 사무라이들의 피 튀기는 칼부림이 나오기 예사다. 이것은 우리 정서에 안 맞는 부분이 많다.
느슨한 우리의 태도는 정비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필자가 일본을 방문해 만화영화 「드래곤 볼」의 제작 관계자들에게 "「드래곤 볼」이 한국 청소년에게 해독을 끼치는 만화영화로 시비에 올랐었다"고 했더니 "「드래곤 볼」은 일본의 만화영화 중 아주 순한 만화영화에 해당한다"며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폭력적인 묘사에 관해서도 일본과 우리 국민이 느끼는 정서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제는 '일본 대중문화는 일본 것이니까 무조건 안 된다'는 입장보다는 '일본 대중문화 중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것들은 철저히 규제돼야 한다'는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라도 일본영화든 가요든 내용이 괜찮으면 허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여러 가지 걸림돌이 아직도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선언'만 해놓고 음성적 루트로 온갖 저질 문화들이 판치도록 할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해 좀더 정리를 하자는 것이다. 가령 '공식적'으로 일본 가요나 영화는 우리 나라에 수입되고 있지 않은 것이기에 공식적인 어떤 심의 장치도 없다는 모순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질대중문화(이것은 그저 도덕주의자들의 기준에 맞춘 '저질'이 아니라 우리의 법률 심의규정에 명백히 어긋나는 것을 뜻한다)의 음성적인 유입에 대해서는 단속이라도 좀더 실효있게 하자는 것이다. 일본 스스로가 한국을 포함한 외국문화를 그렇게 아무 것이나 호락호락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눈여겨본다면 느슨한 우리의 태도는 정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일정한 유예기간을 거친 뒤에는 장르를 불문하고 '내용'을 심사하여 걸러서 받아들이는 시스템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기왕에 제시된 것처럼 영화의 경우 예술영화-영화합작-일반극영화수입상영 등의 순으로 가요의 경우 음반수입-공연허용-방송허용 등으로 (물론 철저한 내용 심의를 거쳐) 단계적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시점을 언제로 할 것인가는 여전히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