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학의 진면모를 천착하는 것은 이제부터의 일
-문학분야의 개방 현상
김광림 / 장안전문대 교수
아직 가시지 않은 일본 혐오증의 잔재
근래 일본문화의 수용문제가 정책당국이나 문화계에 하나의 이슈로 등장해 있는 것 같다.
다른 선진국 문화는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일본문화만큼은 선뜻 받아들일 생각을 못한다. '글쎄'하는 입장이 대부분이고 수용 적극론자는 거의 없어 보인다. 심지어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 월간「현대시학」에서 연속 기획물로 「시적 상상력과 인접 예술」을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그것의 일본 편과 필자가 새로 시작한 「일본시단산책」이 같은 지면에 게재된 적이 있다. 그러자 모 지방 시인이 대뜸 친일적이 아니냐는 항의를 제기해 왔다는 편집자의 말을 듣고 아직도 가시지 않은 일본 혐오증의 잔재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 식민지 36년간의 질곡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게 분명하다. 지금도 친일문학을 들먹거리는 판국이니 골수에 사무친 원한이라도 있어서일까, 해방된 지 반 세기가 되었는데 아직껏 반일감정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피지배적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왜색하면 무조건 혐오하고 타기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70년대 중반쯤의 일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와타나베 교수와 가까이 한 적이 있다. 일본시인 기타가와 옹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그는 경성제대(저울대 전신)를 나온 한국통이었다. 이조교육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한때 재일 한국문화원의 기관지「한(韓)」을 편집한 일도 있다. 그가 이순신 장군 전기를 일역 출판하여 우리 나라 문화훈장을 받은 일도 있다.
그가 내한했을 때 가야산 해인사, 옥산서원, 속리산 법주사, 여주에 있는 영릉 등을 함께 여행한 적이 있다. 경내를 걸으면서 나는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마음 한 자락을 털어놓았다.
'우리 나라 젊은 세대는 일본 하면 무조건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자 그도 이렇게 실토했다. '우리 나라 젊은이들은 한국 하면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실상 일제 식민지하에서 일본인한테 '게다'짝에 채이고 따귀를 얻어맞은 것은 일정시대를 산 기성세대이다. 그래도 이들은 일본을 바로 보고 이해하려하고 있는데 해방후의 신세대들은 간접적인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일본 하면 덮어놓고 싫어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일본 젊은 세대의 선입관도 문제이다. 그들의 전세대가 한국을 지배했다고 해서 일단 우리를 무시하려는 시각 또한 뭔가 크게 잘못된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피차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똑바로 보고 정당한 평가를 하지 않는 한 양국간의 갭은 좁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상호간의 이해증진을 위한 첩경으로의 문화교류
여기에서 상호간의 이해증진을 위한 첩경으로 문화교류를 생각해 본다.
일본의 대중문화가 이 땅에 얼마나 침투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데 기웃거릴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위 일본의 전통문화는 특수성은 있어도 보편성이 희박해서 어떨지 몰라도 구미 선진국의 것을 받아들여 토착화시킨 대중문화는 마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금년도 노벨문학상이 일본작가 오에에게 돌아가자 출판사가 앞 다투어 출판을 서두르고 있다. 이미 그의 책을 낸 일이 있는 출판사는 먼지 낀 책을 털어내고 다시 찍느라 법석이다 그의 책 만해도 몇 가지가 진작 나와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육」,「성적 인간」을 비롯해서 장편 「짓밟히는 싹들」이 그것이다. 그러고 보면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다의 소설은 얼마나 많이 번역됐을까 싶다.
그 밖에도 많다. 마구잡이로 번역된 이시자카의 작품들, 그리고 미우라의「빙점」같은 소설은 이 땅의 독서계를 풍미하다시피 했다. 할복자살한 미시마의 대표작들도 소개된 걸로 알고 있다.
필자가 손을 댄 것만 해도 몇 개가 있다. 엔도의 「예수의 생애」,「그리스토의 탄생」을 비롯해서 이시카와의 장편소설 및 아쿠다가와상 수상작품 등이 그것이다.
최근 어느 출판사에서는「일본현대문학선집」을 준비중인 모양인데 앞으로 일본문학의 수용이 활발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본격 문학 수용의 문제는 번역이다
나는 일본의 대중문학보다 본격문학의 수용을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문제는 번역이다. 얼마나 좋은 역자를 가졌느냐가 문제이다.
일본의 번역문학은 메이지시대부터의 일이지만 우리의 번역문학은 60년대에 들어서서 활기를 띠었다. 이 빈약한 전통을 가지고 얼마나 소화해 낼지는 두고봐야 알겠지만 수용태도가 확립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의 진전으로 간주할 수 있다.
시에 있어서는 거의 황무지에 가깝다. 어쩌다 간헐적으로 소개되고는 있지만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소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는 산문과 달라 폭넓게 독자를 확보하기가 어렵고 게다가 시 분야에서는 아직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타나지 않아 관심이 덜한지도 모른다.
다만 근년에 작고한 박현서 시인이 「일본현대시선」(청하)과 「일본현대시평설」(고려원)을 펴내 일본의 주요 현대시인들의 면모를 대충 일러준 바 있다. 이에 가세하여 교포시인인 다께히사(한국명 강정중)가 「일본여성시선」(문학세계사)을 펴낸 바도 있지만 정작 일본현대사의 진면모를 천착하는 것은 이제부터의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다 산발적으로 시지에 소개되는 시인이나 작품을 보면 일본 신시 초기나 전근대적인 인물이 태반이다. 위즈워드나 쉘리를 다루듯이 감정이입에 충실한 시인들을 들먹이고 있다.
필자는 아직 한 권도 일본시인들의 앤솔러지나 시인 소개를 묶은 일은 없지만 개인 시집은 더러 낸바 있다. 출판사가 기획한 「현대세계시인선」 속에 들어가는 일본시인 역시집이 그것이다. 하나는 열음사가 펴낸 다무라의 「사천의 날과 밤」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원 시리즈 속의 시라이시(가즈코)의 「등줄기가 아름다운 남자」이다.
이밖에도 한두 권의 개인 역시집이 더 있긴 하지만 일본 현대시단에의 적극적인 어프로치는 극히 최근의 일이다. 즉 월간시지「현대시학」에 내 딴에는 본격적인 시인론을 전개하느라 「일본시단 산책」을 시작했다. 이미 다른 지면 즉 계간 「현대시사상」이나「문학예술」에 작품과 함께 몇몇 시인들의 시세계를 소개한 바 있지만 평소 필자가 주목하고 관심해 온 시인들을 일년 남짓 다뤄나갈 생각이다.
조금 분에 넘친다 싶은 생각이 없는 바도 아니지만 감히 나서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일본현대시연구자 국제네트워크」가 「소화시인론」(유정당)에 수록할 「촌야사랑론」을 내게 맡겨 온 데서 비롯된다.
진작 논술한 바 있는 기타조노, 싱카와, 시라이시 등은 이번 산책에서 제외하고 전전의 시인으로 니시와키, 무라노, 기타가와, 가네코, 오노, 구사노, 미요시 등을 꼽고 있다. 전후의 시인으로는 다무라, 요시오카, 아키야 등과 민주일세대인 다니카와, 하세카와, 요시노 등을 짚어나갈 생각이다.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다뤄온 일본현대시를 좀더 체계적으로 골격을 세워보려는 것이 이번 「현대시산책」의 의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