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대를 잇는 예술가족. 3 / 연극인 전무송. 전현아

젊은 세대, 진심으로 존경받는 원로




사회·이혜경 / 연극평론가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 「번데기」에서 삼촌, 조카 사이로 한 무대에서 공연해 화제가 된 배우 전무송, 전현아 부녀를 만난 것은 가로수 잎들이 초가을 해살을 받아 보도 위에 싱그러운 모자이크를 만들어냈던 맑은 토요일 오후, 예술의 전당 앞 커피 전문점에서였다. 음악과 커피향내가 어우러진 실내에서 두 사람의 연극을 시작하게 된 동기, 배우 수업 과정, 한국 연극에 대한 생각 등을 듣다보니 세대의 차이만큼이나 지나온 길과 가는 방향이 다른 점이 재미있었고, 또한 부녀의 개별적인 경험들이 한국 연극사의 굵직한 매듭들과 맞물려 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1985년 미국의 대표적 연극잡지「The Drama Review」 겨울호에서 김우옥(현 연극원 원장)은 전무송을 6페이지에 걸쳐 소개하며 '연기속의 인간성 Moo-Sung Chun:Humanity in Acting' 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배우보다는 인간이 먼저 돼야한다고 생각하며 30여 년 동안 올곧게 연극무대를 지켜온 전무송의 성품과 연기를 단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이다.

현실적인 계산보다는 이상과 원리에 충실하려는 그의 면모를 보여 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 "저는 인천 출신이에요. 7남매의 장남으로 집에서는 명문 제물포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법대에 가기를 원하셨는데 인천 중학교 재학 중 길영희 교장선생님께서 우리 나라가 잘 살려면 공업이나 농업을 해야 한다는 말씀에 감명을 받아 인문계 진학을 포기하고 기계공고에 갔어요." 실망한 그의 부모는 3일간 그를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단다

1961년에 공고를 졸업하고 학교 추천으로 인천 기계 공작창에서 일을 하다가 그는 자기 안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끼'가 속절없이 소모되고 있다는 것을 어느날 깨닫는다. "저녁 교대 시간에 쇠를 선반에 끼워서 깍다가 바닥을 보니 깍여진 쇠조각들이 땅에 떨어져 녹슬어 있는 모습이 보여요. 문득 그 쇳조각들이 꼭 나같더라구요. 내가 여기 깍여서 녹슬고 있구나. 깍아 만들어진 물건들을 보고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하지 않고 왜 땅에 떨어진 조각들을 보았는지…….

바로 직장을 그만두고 그는 연극을 배우기 위해 한양공대 연극영화과 1기에 지원해 수업료 면제 장학생으로 뽑히지만 등록금이 없어 포기하고 충무로 배우학원에 다니다가 체계 없는 공부라 그만두고 인천으로 내려가 서울신문 인천지사에 취직한다. 사무와 신문배달. 수금 등의 궂은일을 하던 그는 어느날 처음으로 연극 한 편을 보게 된다. "당시 인천지사장이 시조작가셨는데 그분 따님이 마침 드라마센터가 개관하면서 직원으로 입사를 했어요. 내가 자꾸 연극 얘기를 하니까 어느날 개관기념 공연 표 두 장을 주시는 거예요. 첫날 와서 딱 보니까, 그땐 김동원 선생이 누군도 모를 땐데 왜 그 드라마센터에 사이드 스테이지 있잖아요? 거기서 칼 하나를 들고 검은 햄릿복장을 하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데 막 전율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날은 꿈꾸는 듯 보고 집에 갔다가 다음 날 또 왔어요. 근데 다음날 보니까 햄릿이 달라요. 나중에 알았지만 그분이 최현씨인데 아, 목소리가 참 좋고 김동원 선생과는 다른 멋이 있더라구요.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부러워하는데 지사장 따님이 프로그램을 줘요. 거기 보니까 아카데미 1기생을 뽑는다는 광고가 나서 시험을 보겠다고 하니까 지사장님이 평소 안면이 있던 유치진 선생께 연락 드려 보겠다고 하시더 라구요."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치밀하게 짜여진 한 편의 연극 같은 과정을 겪고 전무송은 드라마센터에 입학하여 좌절과 기쁨이 교차하는 연수과정을 거치면서 유치진과 오사랑 등의 보살핌 속에서 연극의 원리를 배운다. "1964년 9월 극단 드라마센터가 창단되면서 「마의태자」를 했는데 그때 평이 좋아서 나를 데려가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면 그들을 야단쳐서 돌려보내고 유치진 선생님은 '무대에 제대로 서서 말을 제대로 할려면 70년이 걸려' 하시면서 타이르곤 하셨는데 그땐 그 말씀이 섭섭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옳은 말씀이에요. 그분은 또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 고 하셨어요."

인간성을 우선으로 하는 배우로서의 좌우명을 그에게 깊이 새긴 유치진은 그후 전무송이 군대에 있을 때에 그를 수소문해서 방첩대 후원의 연극에 참여시킨다. 그러나 1969년에 제대하고 돌아온 그를 기다린 것은 그가 그때까지 애써 이루어 놓은 연기관을 졸지에 무너뜨려야 하는 도전이었다. "제대할 무렵 유덕형씨가 돌아와서 동랑레퍼토리 창단을 하는데 유덕형 워크숍을 보니까 연기는 안하고 이상한 체조 같은 것만 하는 거예요. 무슨 연극이 기승전결도 없고, 마치 이조시대에 살다 갑자기 현대로 넘어온 느낌이더라구요."

우리 나라 연극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고 평가되는 동랑레퍼토리 안에서 기존에 익힌 사실주의적 연기술과 유덕형, 안민수가 들여온 실험연극의 개념 사이에서 갈등을 하던 시기에 유덕형의 한마디 충고는 자신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다. "하루는 덕형이 형이 불러서 이번에 「생일파티」공연에서는 스탠리를 하라는 거예요. 자신 없어서 못하겠다고 실랑이를 하니까 '니가 백날 맨발로 뛰어봐라, 리차드 버튼 따라갈 수 있겠니?' 그래요. '근데요?' 하고 퉁명스레 물으니까 '리차드 버튼이 백날 맨발로 뛰어봐라. 너를 따라오나.'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 동안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거나 낼 수 있는 소리를 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흉내내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배우로서 새로운 자신감을 얻게 된 그는 1975년에「태」,「초분」,「하멸태자」 등에 출연하여 미국, 네덜란드, 불란서 공연 등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976년에는 「하멸태자」로 뉴욕 오비상 연기 부문에 후보로 오른다

연기자로서 연극의 새로운 개념이나 스타일에는 자신을 적응시킬 줄 아는 전무송이지만 틀에 짜인 체제나 매너리즘에 젖은 연기생활에는 체질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1975년에 이호재랑 국립극단에 들어갔는데 1979년에 나왔어요. 원래 조직 같은 걸 싫어해서 극단에 있는 동안에도 공연과를 한번도 안 갈 정도였는데 당시 목적극만 하는 데는 더이상 못 있겠더라구요." 전무송은 그후 산울림에서「고도를 기다리며」장기 공연에 들어가 불란서 아비뇽 연극제에 참여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드라마센터 아카데미 8기인 후배 최종원과 호흡을맞춰「북어대가리」「색시공」등을 올린 극발전연구소를 창단했다.

연극을 하고 싶기는 한데 연극을 본적도 없고 마땅한 방도나 후원이 없어서 수년을 낭비하고 우여곡절 끝에 배우수업에 입문한 아버지에 비하면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들어가 연극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한 딸 현아는 배우훈련의 지름길을 달리는 듯하다. 그러나 그녀의 연극수업은 훨씬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년간 열렬히 연애하시다가 1970년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아버지 작품이 올라갈 때마다 한번도 빠짐없이 공연을 보셨으니까 저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연극을 듣고 자란 셈이지요. 아버지가 연극을 하시니까 엄마가 생계유지를 위해 일하셨는데 아버지는 집에서 저를 봐주시다가 시간이 되면 절 데리고 연습장에 가시곤 했어요. 연습실에서 연극대사를 들으며 놀고……. 드라마센터에 열연동산 연못이 있죠? 거기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어요. 그때 본 작품이「태」,「초분」등이었어요. 그 작품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해서 지금도 그 정도 수준의 연극을 보아야 마음이 편해요"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이 하고 싶었던 전현아는 별로 탐탁해 하지 않는 부모님의 눈치를 보고 음악을 하기 위해 성악에 열정을 쏟기도 하다가 한때는 연극을 하려면 셰익스피어를 공부해야할 것 같아서 영문과를 지원할 수 있는 인문고등학교를 가려한 적도 있었다. "아버님께서 고민을 하시다가 그렇게 해서 친구들과 입시경쟁을 하고 틀에 박힌 생활을 하기보다는 조금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음악공부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셔서 국악고등학교에 갔어요. 어머니도 은근히 제가 음악을 계속하기를 권유하셨구요. 2학년 때 산조를 배우니까 한국 음악의 맛을 조금은 알게 되어서 성악보다는 국악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사실은 연극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도 국비 고등학교니까 의무적으로 서울대 국악과를 지망했는데 낙방을 했어요. 다행히도. 그래서 다른 생각할 것 없이 재수해서 동국대 연극과를 갔지요."

출세해서 집안을 일으키기 바라던 그의 부모 세대가 '딴따라'라는 통념 때문에 연극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의례적이라 하겠지만 배우생활을 몸소 한 전무송이 딸의 연극사랑을 탐탁치 않게 여긴 것은 왜였을까 궁금하다. "불확실한 분야라서 그랬지요. 내가 지나온 길을 되풀이할 텐데 그 노력으로 다른 일을 하면 편하게 살 것을 굳이 이 길로 온다니까." 그러나 기어이 연극을 택한 딸의 의지가 꼭 싫지만은 않은 듯하다.

20대가 넘어서야 연극 한 편을 겨우 보았던 아버지와는 달리 우리 연극계 중심에서 자라나 일찌감치 연극에 대한 눈이 트이고 아버지가 쌓아놓은 인맥을 물려받는 것은 대를 잇는 예술인이 누릴 수 있는 특혜이리라. "다른 친구들은 어려워하는 연극계 어른들이 제겐 어려서부터 모두 알던 분들이니까 쉽게 인사드릴 수 있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러나 반면에 그 친구들이 연극을 10편 보는 동안 저는 100편은 보았을 테니 더 잘해야 하고 또 아버님 그늘을 벗어나 한 개인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전무송의 딸보다는 좋은 배우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버지와 딸 두 사람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연극에 대한 열정 하나로 수많은 고난을 견뎌 오면서 다듬은 사고의 깊이와 폭넓은 경험을 하지 못한 채 너무 편하게 배우가 되었다는 데서 같은 배우로서 딸이 느끼는 시셈은 있지 않을까? “다행히 아버지께서 먼저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내가 시작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허영심에서 한 거고 너는 어려서부터 목표를 갖고 한 거니까 너와 나는 시작부터 차이가 있다라고요. 스스로 낮추어서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이나 우울한 고민은 없어요."

두 사람의 차이는 대중매체인 TV에 대한 의견에서도 두드러진다.“1979년에 국립극장을 사임하고는「만다라」라는 영화를 찍고 TV에도 나가봤는데 연속극은 정말 못하겠더군요. 나태해지고 습관적이 돼서. 그래서 연출한테 사정을 했지요. 내 역 좀 빼달라고. 그랬더니 연출이 이상해 하면서 말해요. '다른 사람은 더 많이 나가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는데 당신은 왜 거꾸로 사느냐?' 고‥‥‥‥.”

아버지가 TV출연이 무대 연기자를 매너리즘에 빠뜨리기 쉽다고 보고 자제하는 데 비해 어려서부터 TV에 익숙한 세대답게 딸은 대중매체를 연기자의 새로운 기회로 보고 있다. "어른들은 무대위에서 바로 서고 말을 제대로 해야 영화나 TV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외람될지 모르지만 지금 현실은 연극계에 다른 획기적인 일들이 있어야 발전하고 활성화할 것 같은데 매스컴이 그런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한 생각의 타당성과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기 위해 전현아는 SBS 탤런트시험에 응시에 합격한다.

연극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최근의 활동까지의 30여 년에 대한 이야기와 약삭빠르게 세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약점(?)을 신나게 이야기하던 전무송의 표정이 요즘 연극하는 젊은이들의 태도에 화제가 이르자 갑자기 안타까워진다. "우리 때는 서로같이 뒹굴면서 진지하게 연극을 했는데 요즘은 그런 것 같지 않아요.물론 기술적 수준은 전반적으로 우리보다 낫지만 연극을 왜 해야 하느냐 연극을 통해 관객에게 무엇을 전할 거냐에 대한 진지한 생각들이 부족한 것 같아요. 연극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끈기있게 하는 사람이 드물고 따라서 잘 만들어진 연극도 드물고 그러면서 관객만 탓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요즘 연극을 하는 젊은이 중에 하나인 전현아의 우리 현실에 대한 인식은 좀더 낙관적이다. "지금 러시아나 여러 나라로 연극 유학간 친구들도 많고 한국에서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많으니까 앞으로 재미있고 의미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을 것이라고 믿어요. 저는 근본적으로 번역극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 국악을 하면서 우리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았기 때문인가 봐요. 물론 외국 작품들 중에서 교과서적인 작품들은 배워야 하겠지만 우리 것을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은 고등학교 때부터 했어요. 그래서 사물놀이, 판소리 등도 열심히 배웠구요. 우리 관객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위해 계속 노력해야겠죠.” 신세대로서 주체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자질까지 성악과 국악수업을 통해 갖추고 있는 모습이 야무지다.

일본을 통해 들여온 신극의 전통 속에서 익힌 유치진 중심의 사실주의 연극에서 유덕형, 안민수등 미국 유학파의 새로운 연극으로 충격을 받았던 아버지에 비해 해외에서 들어오는 도전을 보는 딸의 반응은 당당하다. "이번 일본 사계 극단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니까 별다른 것이 없어 보이던데요. 공연 조건이 저희보다 훨씬 좋다는 것은 속상하고 부러웠지만 배우들의 기량은 우리가 뒤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일찍부터 배우수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고 「번데기」와 같은 창작 뮤지컬을 많이 후원하면 우리도 그만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30여 년을 연기에 전념해 온 전무송은 이제 막 프로의 세계에 들어선 딸에게 어떤 개인 레슨을 하고 있을까? “나는 예술인으로서의 자의식은 싫어요. 제3자가 보면 내가 하는 일이 예술일지라도 나와 가족에게는 생활이에요. 연극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나늘 일상적인 것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요." 배우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깊고 넓게 키우는 것보다 더 든든한 자산은 없을 것이고 그런 것을 대물림할 수 있는 것은 가족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할 때 더 효과적일 것이다.

딸이 옆에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특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번 「번데기」를 같이 하면서 제가 아버지의 특성을 많이 갖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작품 분석이나 인물 선정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가지 않고, 연출의 해석이 충분히 공감이 갈 때까지 기다린다든지, 발성을 정확히 해서 대사 전달을 분명히 하려고 노력한다든지 하는 것이 다 아버지의 습관인데 제가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더군요." 자식은 의식적으로 부모에게 반발하고 무의식적으로 모방한다든가.

얼마 전 우리 나라에 소개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연극쟁이」가 생각났다 스스로를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연극배우 브르스콘이 가족을 이끌고 공연을 다니면서, 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딸,아들을 경멸하며 독재자로 군림하는 이야기. 아버지가 배우이기 때문에 계속 개발된 성품 중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점은 혹시 없을까? "오히려 항상 재미있으세요. 또 그런 면 때문에 연극을 하신 게 아닌가 하는데 순진(?)하시고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낮에 집에 계시면서 제 친구들이 오면 떡볶이도 해주시고 해서 친구들이 부러워했어요. 가끔 낮잠만 주무시는 것 같아서 친구들에게 창피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아버지가 주무신 것이 아니고 작품이나 인물 분석을 하고 계셨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게 이해되니까 기뻐요." 수입도 넉넉하지 않고 예사로운 직업도 아닌 연극인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고 스스로 자책하는 점은 없을까? "아이들에게는 별로 미안한 것이 없어요. 내가 불교신자라서 그런지 나는 사람이 각자 자기 삶이 있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고 생각하니까. 다만 부모님께는 죄송한 점이 많지만 그것도 제가 좋은 배우로 성공하면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

그가 여러 가지 힘든 상황들과 화해하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비단 종교의 영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30여 년을 어렵사리 연극에 몰두하며 지내면서 배우이기 전에 생활인으로서 화목한 가정을 끌어온 전무송. 거기에는 '세상을 거꾸로 살려 하는' 그를 이해하고, 딸 전현아의 말대로 "이게 내 행복이려니 하고 섬겨온" 부인의 헌신과 화목한 부모 밑에서 건강하고 영리한 연극인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아이들(아들도 현재 서울예전 연극과 1학년생)이 있는 가정에서 나오는 힘이 가장 컸으리라. 아버지의 대를 이어 배우의 길로 들어선 딸과 아들에게는 기분에 휩싸이기 쉽고 덧없는 명성에 속기 쉬운 연극과 방송계에서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스승 유치진의 가르침을 고지식하게 마음에 새기고 건전한 생활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앞세운 그의 삶 자체가 그가 쌓아온 인맥. 배우로서의 기술의 전수보다 더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전무송, 전현아 부녀와의 인터뷰를 끝내며 작년 여름 브로드웨이에서 인상깊게 본 연극 한 편이 생각났다. 영국 출신 여배우 린레드그레이브가 공연한 모노드라마 「나의 아버지를 위한 셰익스피어 Shakespeare for My Father」. 영국의 정통파 배우로 1959년 왕실 기사 작위까지 받은 그녀의 아버지 마이클 레드그레이브의 생애와 에피소드들을 셰익스피어 희곡 장면들을 발췌해 추억하는 그녀의 진솔한 연기에 관객들이 향수와 감흥에 젖어 따뜻한 박수를 보내던 공연이었다. 이제 우리 연극계에도 젊은 세대에게 진심으로 존경받는 원로들이 든든히 전통을 만들어가고 거기에 기대어 새것을 모색하며, 선배들의 노고와 업적을 순수하게 기릴 수 있는 젊은이들이 대를 이어 나오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