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굿적 제의극을 지향하는 무대 만들기
- 채희완의 연출활동과 방법
서연호 / 연극평론가, 고려대 교수
최근의 작품활동
서 : 우리 주변에서 마당극 마당굿 하면 금시 채희완 형을 생각하게 될 만큼 오랜 기간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연극활동을 해 왔습니다. 이번「칼노래 칼춤」의 공연을 계기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반갑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부산에 간 지가 몇 년째지요?
채 : 올해가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부산 경남 일원의 춤의 본고장이어서 전승지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해보겠다고 내려가서는 눌러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생활의 본거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부산대학 무용과 소속입니다.
서 :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는(10월 30∼11월 9일)「칼노래 칼춤」을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나로서는 오랜만에 채형의 작품을 본 셈인데, 전체적으로 마당굿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되었고 아울러 마당굿이 추구하는 연행방법이 매우 견실해지고 그 작품의 차원이나 연희자들의 기량이 높은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총연출을 맡은 채형이나 공연에 참가한 모든 분들 그리고 오랜 세월 한두레 활동을 해온 분들의 노고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채 : 지난 4월 우리 한두레 창립 20주년 기념으로 공연했습니다. 다소 보완해서 이번에 다시 문예회관에 올리게 되었는데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셨는지요?
서 : 막연하게 알고 있는데 한두레는 정확하게 언제 창립되었습니까?
채 : 1973년 5월 서울대 가면극연구회와 이대 민속극회 회원간의 합동 월례모임에서 '한두레'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3월「이종구작곡발표회」제2부 순서로 소리굿「아구」가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는데, 출연했었습니다. 4월에 탈춤반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한국문화연구 모임인 한두레가 젠센회관에서 창립된 것이지요.
서 : 격동의 20년 세월 속에서 한두레가 해치고 넘어온 살아 있는 역사를 실감합니다. 이번 공연은 현실적인 위치에서 민족의 실질적 삶을 기준으로 동학농민 전쟁을 되새기고 향후의 민족통일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조화 있게 부각시킨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문예회관 소극장의 마당판이 작품의 용량에 비하여 협소한 것이 우선 아쉬웠습니다. 전체 구조에서 볼 때 둘째 마당에서 동네 아낙들과 탈을 쓴 광대가족들의 대사의 분량이 많고 전달이 잘 안 되는 것이 취약점으로 보였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대사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을 위해서도 마임을 보다 많이 구사하는 편이 좋을 듯하고 대사들은 압축해서 더욱 익살스럽게 짜며, 암전 처리를 가급적 억제하면서 전통적인 마당구성의 형식을 통해 서사성을 높이는 한편, 넷째 마당의 청수무용은 보다 흙냄새가 나는 즉 투박하고 건실하면서도 정성스러운 여인들의 변화 있는 춤으로 보강되었으면 합니다. 개개인의 관점이나 욕심은 한이 없겠습니다만, 앞서 말한 대로 현재 상태로 놓고 볼 때도 마당굿으로서 전체적인 짜임새와 표현의 내실화와 차원 높은 의미추구를 조화있게 드러내고 있어 성공적인 공연으로 평가합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번 작품 이외에, 최근에는 어떤 공연을 했습니까?
채 : 금년이 동학 1백 주년 기념의 해여서「공부봉기 역사맞이 굿」에 민극협 산하 여러 단체가 참가하였고 제가 총연출을 맡아 진행했습니다. 그해로 따지면 음력으로 1894년 1월 11일쯤 되었던 모양이에요. 양력으로는 2월 중순쯤이고…… 그래서 금년 2월 26일, 27일 첫 횃불을 올렸던 고부관아 진격지, 말목장터, 만석보 등 현장에서 그날을 재현하는 공연을 했습니다. 6월에는 마산 앞바다에서「새웅맞이굿」을 총연출했지요. 10월 29일, 30일에는 금년도 동학 기념행사의 마무리로서 우금치에서「위령굿」을 했습니다. 당시 숱하게 죽어간 농민군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서 : 그 대동굿은 어떤 규모로 어떻게 전개된 건지요?
채 : 우금치에는 전에 군사정권시절에 만든 기념탑이 있어요. 위정자의 이름이 크게 새겨 있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서 새로운 조형물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지난 2월과 같이 민예총산하의 민극협이 분담하여 참가하고 오후 두시 공주시내에서 출발해서 우금치까지 5. 7킬로에 걸쳐 거리굿을 하면서 가고, 되돌아올 때는 공주교대 교정에 모여 열림굿을 시작해서 밤 9시부터 3시간 정보 본격적인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다음날에는 교정을 출발해서 1. 7 킬로 꽃상여 행렬을 지어서 다시 우금치에서 마지막 굿을 올리고 기념을 조형물을 준공했습니다. 그곳 주민들도 자연스럽게 참여하도록 굿판을 진행했습니다. 모두 성황을 이루어 주시고 위령제의 굿이 잘 되도록 도와주시어 감사하고 있습니다.
마당극 초창기 이야기
서 : 70년대 전반기, 마당극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나 과정부터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채 : 국가적으로 혹은 학자들 사이에서 탈춤이 발굴되고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초부터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대학가에서도 탈춤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높아졌고, 대학의 민속반 혹은 탈춤반에서 탈춤을 직접 실기를 통해 배우고 익히게 된 것은 60년대 말, 70년대 초부터입니다. 당시 민속극운동의 목표는 넓게는 우리 것에 대한 재인식의 차원이구요. 연극적인 측면에서는 우리 극에 대한 자주성, 주체성의 회복 혹은 우리 극의 유산이 현대극에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가의 탐색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극의 흐름을 재확인하고 전통과 현대극의 새로운 접목, 전통과 리얼리즘극 사이에 파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새롭게 극복해 보자는 것 이었습니다. 이 무렵에 공연된 김지하씨의「구리 이순신」,「금관의 예수」,「나폴레옹 꼬냑」, 윤대성씨의「너도 먹고 물러나라」, 오태석씨가 탈춤형식으로 공연한「스카펭의 간계」등은 우리 민족극운동에 예민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탈춤운동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흔히 이야기하는 민중운동차원, 민중 삶의 질적 개선과 탈춤의 민중성이랄까 삶의 문제를 어떻게 결부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었고, 또 일선 정치투쟁의 측면을 강조하는 분위기도 있었고, 그 다음에 새로운 연극운동, 더 넓게는 새로운 문예운동의 차원에서 활동을 한 흐름이 있었습니다.
서 : 채형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채 : 저는 민중운동, 민중 삶의 문제와 더불어서 예술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민중이 소유했던 것이 대학가 지식인에게로 전수되었는데 그것이 언젠가는 제 주인의 손으로 넘어가서 자생적인 경로를 밟게 하는 순서를 제공하는 여건을 만들어 주자는 입장하고, 그 당시에 같이 일해왔던 임진택, 김윤구, 김용범, 이종구, 이상우, 김석만 등 동료 선후배들과 김지하 시인을 중심으로 한 문예운동의 물꼬를 같이 터 보자는……각자의 개성껏, 노래로, 음악으로, 또는 춤으로, 마당극으로 진전의 폭을 장르별로 넓혀 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탈춤반으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 1975년 5월 22일, 오둘둘사건이라고, 서울대 탈춤반 중심으로 시위가 있어요. 교내에서, 그걸 계기로 해서 당시 서울 농대 4학년 김상진 학생이 할복자살을 했어요. 교정에서 할복자살을 하면서 유신정권에 대한 반대성명을 냈는데, 그 학생의 장례식을 대학가에서 해야지 않겠느냐, 그것을 탈춤반이 떠맡자, 그리고 그것을 새로운 시위양태, 문화적 시위운동의 방식으로 택하자 한 것이 오둘둘사건인데, 거의 일망타진 되었지요. 그 후 탈춤반은 찍히면서 음성화 되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 무렵 한두레라는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연행팀이라기보다는 앞으로 공부를 하거나 지속적으로 문화운동을 할 때 어떤 조직이 필요하지 않겠는냐해서 만들었던 건데 실은 성격이 애매하고 포괄적인 조직이었어요. 대학의 탈춤반들이 침체한 시기였고, 한편으로 연극반, 주로 이대 연극반을 중심으로 해서, 임진택씨가 연출한 몇 가지 신선한 마당극 실험작이 공연되면서 마당극의 실체가 선을 보였지요. 마당극의 한 양태로, 정태까지는 못 되지만, 한 양태로 일정 부분 자리잡게 되는데 제가 좀 참여를 했습니다. 안무라는 역할로, 전체를 구성할 때 의견을 내기도 하고…….
서 : 그 당시 작품 만든 과정이나 특징을 좀 정리해서 소개해 주시지요.
채 : 1973년부터 발단됩니다. 김지하 시인이 원주에서 스스로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기로 한「진오귀굿」이라는 농촌계몽극을 짠 일이 있습니다. 카톨릭 원주교구 주관으로 강원도 지역을 순회할 공연팀을 짰고 연습을 현지에서 하게 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김지하 시인을 정점으로 이쪽 계열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대학가로 치면 연극반과 탈춤반이 만나고 결합하는 계기가 되었고…… 실제로 순회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어서 작품을 서울로 가지고 와 오장동 중앙제일교회에서 임진택 연출로 12월 23일 밤에 실연했습니다. 고려대학의 탈춤반, 연극반 회원들도 참가했습니다. 그게 말하자면 마당극의 생각을 최초로 관찰시킨 공연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 후 그 작품 중에서 세 마리의 도깨비를 뽑아 마당극을 만들어 농촌지역을 돌기도하고 여러 팀이 나누어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말한 소리굿「아구」에는 이애주(여공 역), 채희완(여대생), 임진택(쪽발이), 김석만(청년) 등이 출연하였는데, 이 작품에서 마당극이 최초로 실내무대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색과 창작의 도정
서 : 20년 동안 채희완씨가 중심이 되어서 만든 작품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주시지요.
채 : 「아구」이외에 이애주의 춤판「땅끝」(1974. 6), 무용극「예언」(1975. 5) 등에 출연하였고 「미얄」(1978. 6)을 연출하게 되었습니다. 연출이라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공동창작방식으로 만들어졌지요. 오둘둘 오후 상황 때문에 동교동 연습실에서 비밀리에 공연했습니다. 농촌 출신의 여중생이 도시 빈민이 되고 매음을 하게 되는 과정을 탈춤 미얄에 비유하여 만든 것입니다. 「예수」(1978. 12)는 서울 제일교회에서 공연한 것으로, 안병무 교수와 한명학 교수의 광대 예수론이나 하비콕스의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아 민주예수상을 그려 보았습니다. 지배자들의 잔치와 가난한 사람들의 잔치를 대비시키고 예수가 가난한 잔치에 참가한 것이 불온집회를 주도한 죄로 조작되는 내용입니다.
서 : 김민기씨의「공장의 불꽃」이 그 무렵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채 : 저는 '현장학습순례'라고 하는데, 그 당시 김민기씨가 공장, 광산, 농촌 등지를 돌아다니며 일을 했고, 그 체험을 토대로「공장의 불빛」이라는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이 노래들을 토대로 노조핍박 사례를 극화한「공장의 불빛」(1978. 12∼1979. 2)을 제일교회와 오류동 미가엘 수녀원에서 공연하게 되었지요. 병력이 출동해서 교회를 포위한 상태에서 공연이 진행되었는가 하면, 공연이 끝난 후 이른바 불법음반이 나왔지요.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두레와 연우무대가 분리됐습니다. '뜨는 것'은 연우가 하기로 하고, '안 뜨는 것'은 한두레가 하기로 하고…….
서 : 비밀연극, 지하연극, 집회연극 일부 지상의 무대로 관객을 찾아 올라온 것이군요. 연우무대의「장산곶매」는 크게 주목을 받았지요.
채 : 드라마센터에서 한「장산곶매」(1980. 3)는 한두레와 연우무대의 합동공연이었습니다. 저는 안무를 맡았습니다. 80년 초 '서울의 봄'을 맞아 가지고 한두레는 두 달 동안 신나게 활개치다가 5월 이후 다시 음성적인 조직으로 변신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시기 서울대 총연극회에서 공연한 임진택씨 연출의「녹두꽃」과 유해정(본명, 유인열)씨 연출의「노동의 횃불」은 아주 비장한 위기를 극화한, 저에게 중요한 시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밤하늘의 별처럼」(1981. 4)에 참가했습니다. 경기도 원당 숲속에서, 다음에는 친구의 무용학원을 빌려 가지고 비밀공연했습니다. 해고 노동자 두 사람이 인질극을 펼치다 경찰과 대치 끝에 자살하는 내용이죠. 백억 불 수출의 이면상을 그렸습니다.
서 : 「강쟁이 다리쟁이」라는 대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름이 특이해요?
채 : 1984년 10월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했습니다. 경남 영산의 어린이놀이 명칭이지요. 한편은 모래로 둑을 쌓고 다른 편은 물을 이끌어다 둑을 부수고 하는……그해 물난리가 나고 둑이 무너져 온 마을이 없어진 사건이 났는데 그 둑을 쌓게 된 것은 전두환씨네 선조를 기념하기 위한 사업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었고해서, 마을 사람들의 원성을 토대로 만든 겁니다.
서 : 작품 이야기는 한없습니다만 그밖에도 어떤 작품에 참여했는지요?
채 : 박종만이라는 택시운전사의 자살을 소재로 한「뛰뛰 빵방」(1985. 1 애오개회관)을 공연하고 부산으로 주거지를 옮겨서 극단 자갈치와 함께 공연했습니다. 복지원사건을 다룬「복지에서 성지로」(1987. 10), 철거민을 다룬「철새 공동체」(1988. 5), 현대중공업사건을 다룬「주먹밥 주먹손」(1989. 6), 신발업계를 다룬「민주 꽃 신바람」(1989. 12), 관주도의 축제를 다룬「영축산들 배지기」(1990. 4), 삼량진 쓰레기사건을 다룬「뒷기미병신굿」(1990)등이 부산에서 한 것들입니다. 다시 한두레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1987년 이후인데 주로 노동극을 했지요.
마당굿의 새로운 진로
서 : 우리의 마당극은 자유로운 언론의 표현행위가 차단되고 제재되었던 시기에 현실의 구조적인 모순과 현장적인 진실성과 민중의 응어리진 꿈을 신명나는 놀이형식으로 과감하게 표출시켜 왔다는 점에서 연극사적으로 주목되는 업적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회적인 전형성에 집착하다 보니 개개인의 삶에 대한 진실의 추구가 아주 소홀해진 것도 사실이지요.
채 : 손쉬운 방법으로 제가 생각해 보았던 것은 지나치게 인물의 전형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전형의 세분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개별적인 것을 다시 전형화 하는 방식으로 다시 출발해야지요. 인물뿐만 아니라 사건도 전형화 시켜 가지고 뻥 때리듯이 가는 방식도 있겠지만은 사소한 사건, 보잘 것 없는 사건을 어떤 식으로 전형적인 표현까지 건져 올릴 것이냐 여기에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서 : 그런 방식으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작품은 무언지요?
채 : 자갈치 아지매와 그 딸을 주인공으로 해서 오늘날 부산의 현실과 인간적인 삶의 문제를 추구해 보고자 한「날개라 아침 갈매기야」(1992. 10)를 들 수 있습니다. 자갈치 시장 사람들의 끈질긴 대물림에 대하여 면밀하게 생각해 본 제 총연출작입니다.
서 : 「날거라……」나「칼노래……」를 보아서도 마당극은 분명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느낌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심각한 침체기가 아니가 합니다.
채 : 민족극운동협의회 소속된 단체들이 자그만치 33개입니다. 그 동안 현실대응력에만 치중했고, 지도부 중심으로 작품을 만들어왔으며, 개개인의 삶을 놓친 것들이 많아서 요즘같이 변화하고 대중화되어 가는 시대에는 방법자체에 설득력이 약합니다. 하향 평균화되는 경향이 보여요.
서 : 그렇다면 앞으로의 새로운 방향이나 방법은 어떤 겁니까?
채 :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지금 각 지역에 분산되어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탁월한 기량을 가진 분들을 재규합하여 대표팀을 만들어 가지고 제대로 된 마당극을 만들어 보자, 그것이 마당극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불식시키는 길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문제는 직업화가 가능해야 마당극이 살아 남거든요.
서 : 건강하고 줄기찬 문화운동의 의의와 역할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단체든 자체 비용만으로는 어렵고 세금 혹은 사회적 지원이 절실합니다. 역시 직업화에 뒤따를 정신적 타락도 경계해야 하거든요.
채 : 저는 마당극이 프로시니엄무대 즉 제도권 연극계로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두보 역할을 하는 사람이 김석만씨, 김민기씨 등입니다. 저로서는 큰 굿을, 여러 장르를 통합해서 시간도 길게 하고, 장소도 이동산대극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소의 변화를 가지면서 우리의 연희 원천을 살릴 수 있는 재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대부분 전통극에서 보여지는 자연과의 교감, 혹은 우주의 기를 받고 자연과 인간이 합쳐져서 생동하는 그런 판이랄까요…… 생동하는 유기적 판, 상징적으로 말한다면 극에서 굿으로의 역설적 회귀가 필요하지 않느냐. 단순한 굿적인 요소를 갖는다기보다도 한 사회나 인간이 접촉하고 있는 여러 다면적 상황들이 같이 어울려서 유기적인 통합으로 갈 수 있는 연극양태들을 개발하자는 것이 제 뜻입니다. 현대판 굿적 제의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 : 현대는 이른바 '작은 굿'들이 너무 범람하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큰 굿'은 필요합니다. 아니 필요가 아니라 창조되어야 합니다. 제작자들이 스스로 '큰 굿'이라고 주장하는 양태가 아니라 시민들이 진정 바라고 찾는 '큰 굿'이라고 주장하는 양태가 아니라 시민들이 진정 바라고 찾는 '큰 굿'이 시민들의 심성을 바탕으로 창출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굿을 위한 공동체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 가는 것이 무서운 장애이기는 합니다만 그럴수록 상대적으로 공동체적 에너지를 회복하는 운동이야말로 절실한 시대적 과제이지요.
채 : 저는 그것을 명절날 고향 찾아가는 회구심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삶의 양태가 아무리 달라지더라도 근원적인 회귀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개인적인 능력만으로는 이 일을 할 수 없고 사람들이 모여져야 할 것 같습니다.
서 : 민극협의 활동과 한두레의 창작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매우 희망적으로 여깁니다. 언제나 애써오신 채희완 형 건강하세요. 장시간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