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행. 4 /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 돈황

찬란한 불교미술의 보고(寶庫) - 돈 황 막고굴




박 찬 / 스포츠서울 문화부 차장

이튿날 아침, 우리는 어제 못 본 교하고성(交河古城)을 보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투르판에서 서북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교하고성은 당(唐)이 고창성을 점령한 뒤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했던 곳으로 두 강물이 교차하는 30미터, 벼랑 위 황토지대를 파 건설한 동서 330미터, 남북 1천6백 미터의 황토성채다.

2200여 년의 역사를 가졌다는 교하고성은 고창성에 머무르고 있던 현장법사가 천축국으로 가기 위해 고창성을 떠났을 때 고창왕이 이곳까지 전송을 나온 곳으로 당나라 대에는 인구가 1만 7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14세기경 몽고군에 의해 파괴된 교하고성 역시 불교가 번성했던 옛날을 증명하듯 흙벽돌을 쌓아 만든 10미터 높이의 불탑과 불상부조, 사원지(寺院地), 종루(鐘樓), 고루(鼓樓) 등 불교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성문을 들어서면 바닥에 벽돌을 깐 길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길이 끝나는 곳에 광장과 큰 사원지가 있다. 이 사원지 주위에서도 많은 사지(寺址)가 발견돼 이 구역이 옛날에는 사원구역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광장 북쪽에 있는 사원지는 인도식 사원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 80미터, 동서 40미터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원의 남쪽 입구로 들어서면 광장이 나타나고 광장 한가운데 우물이 있다. 광장 좌우로는 승려들이 기거했을 것으로 보이는 승방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3층의 기단 위에 7미터 높이의 흙탑이 서있다. 이 탑은 흙벽돌을 쌓아 세운 것으로 서쪽 면(面)에서 아직도 감실이 있다. 감실 안에는 소조불이 부조돼 있는데 파손의 정도가 꽤 심한 편이었다.

투르판의 역사를 통해 보면 당나라 이전에 중국이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은 극히 적다. 중국이 직접 지배했다 해도 짧은 기간 동안 군사기지로 사용됐을 뿐이어서 문화적 교류는 오히려 실크로드를 따라 활발한 교역을 가긴 인도나 이란과 이뤄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곳의 불교사원이나 왕궁 등 유적들은 인도적인 것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들은 인도나 이란 양식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려진 벽화들은 중국식이 많다. 그것은 당나라 이후에 다시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진흙 단애의 천연요새 교하고성을 뒤로 하고 우리는 투르판 외곽에 있는 '카레즈'를 찾았다. '사막의 생명수'라 일컬어지는 카레즈는 지하수로(地下水路)로 천산기슭으로부터 약 30미터 간격으로 판 우물을 횡으로 연결한 수로다. 이 수로를 통해 천산의 눈 녹은 물이 손실없이 투르판 오아시스까지 공급돼 식수와 관개에 이용되고 있다.

이 지하수로는 사람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만들어져 항상 많은 양의 물이 흐른다. 우리가 본 카레즈는 관광코스 중 하나로 수로 중간을 끊어 수로의 물이 보이도록 해놓았다. 안내인에 따르면 투르판 분지에서 420여 개의 카레즈가 있고 그 길이만도 무려 3천 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호텔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한 후 우리는 투르판 교외에 있는 회교사원을 찾았다. 역시 관광코스중 하나로 이곳에 있는 '소공탑(小公塔)'은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높이 44미터의 소공탑은 '액민탑(額敏塔)'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청나라 건륭년간에 투르판 군왕이던 액민화탁(額敏和卓)이 반란군을 평정하고 그 기념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1777년부터∼1779년까지 2년간에 걸쳐 쌓은 이 탑은 흙벽돌을 원주식으로 쌓아올렸는데 점차 끝을 가늘게 해 하늘로 치솟아 보이게 했다. 탑면에는 체크무늬와 꽃무늬, 빗무늬 등을 새겨놓아 멀리서도 탐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이 사원은 현재도 매주 금요일이면 회교도들이 모여 예배를 올린다고 한다.

소공탑에 올라가 투르판 시가지를 조망한 뒤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많이 남아 투르판 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오늘 돈황으로 가게 돼 있었지만 돈황 입구인 유원(柳園)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선 아직도 10시간 가까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투르판 시장은 겨울철이라 크게 붐비지는 않았다. 시장에는 이곳 특산물이 많이 눈에 띈다. 겨울철이라 신선한 과일은 없었지만 대신 이곳 특산인 건포도, 건살구 등을 수북히 쌓아놓고 파는 가게들이 많다. 한 노점에서 유명한 겨울 '하미수박'을 팔아 모두 한 쪽씩 사먹었다.

각자 흩어져 이곳 특유의 위구르 단검 등 기념품을 사기도 하고 기차속에서 먹을 건포도, 건살구 등 먹을 것을 사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시장은 우리의 시골시장 풍경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나도 어머니와 아내를 위해 숄 두 장과 몇 가지 기념품을 샀다.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한뒤 오랜 시간의 기차여행을 위해 잠시 눈을 붙였다. 투르판역에서 01시 40분발 유원행 기차를 타기 위해 밤 10시경 투르팜호텔을 떠났다. 시내에서 투르판역까지는 58킬로나 떨어져 있어 버스로 한시간 반을 달려가야 한다.

밤늦게 투르판 시내를 벗어나 광막한 광야를 달리자니 차창 오른편쪽으로 휘황찬란한 불빛이 계속 버스를 따라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곳이 바로 투르판역이었다. 그러니 내내 투르판역을 오른쪽에 끼고 벌판을 달려온 것이다. 역은 사막 한가운데 있었다.

역에는 외국인을 위한 대합실이 따로 있었다. 대합실에는 우리팀밖에 없었다. 겨울철에, 그것도 밤늦은 시간에 다른 외국인이 있을 턱이 없다. 돈황을 가기 위해선 대개 난주에서 비행기를 타거나 서안에서 기차를 타고 가욕관이나 유원을 거처 오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역(逆)으로 돈황을 가고 있는 것이다.

기차는 예정시간보다 7분 늦게 도착, 35분이나 늦은 2시 15분에야 출발한다. 우리 좌석은 일반석과는 달리 4인용 침대칸이다. 유원까지는 1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낯선 곳에서의 기차여행이 모두들 설레는지 일행들은 쉽게 자리에 눕지 못하고 이칸저칸 모여서 술을 마신다. 차창 밖은 보나마나 광막한 광야이리라.

5일 아침, 기차는 여전히 고비사막의 탄가루를 뿌린 듯한 검은흙과 자갈만 뒤덮인 사막길을 달려간다. 가치는 오후 3시 20분에야 유원에 도착한다. 정확히 13시간만에 유원에 도착하는 셈이다. 유원에 도착하니 미리 돈황을 안내할 현지 가이드가 나와 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짐을 버스에 싣고 곧장 유원을 향해 떠났다. 오랜 기차여행의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다시 버스를 탄다. 유원에서 돈황까지는 140킬로미터, 버스로 2시간 30분 가량 걸린다.

유원에서 돈황으로 가는 버스길 양옆으로는 미니어처를 갖다놓은 듯한 높이 10∼20미터 정도의 조그만 산이 마치 큰 산맥이나 되는 듯 착각에 빠지게 하며 수킬로미터씩 계속된다. 아마 가까이서 찍어 그대로 풀 한 포기 없는 거대한 산맥을 촬영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아스팔트 포장길 양옆으론 여전히 탄가루를 뿌려놓은 듯 시꺼멓다.

마침 돈황에 눈이 왔는지 하얀 눈과 시커먼 흙의 조화가 이채롭다. 돈황지방의 연간 강수량은 45밀리미터에 불과한데 올해 들어 이미 눈이 한 차례 왔단다. 오늘 기온은 영하 15도, 한국을 떠날 때 사막지역이라 상당히 추울 것으로 생각해 단단히 꾸리고 왔는데 의외로 춥지가 않다. 한국보다 온도는 낮지만 건조한 기후 탓인 것 같다.

미니어처 같은 산맥 사이로 한참을 지나니 또 마치 한국의 공동묘지 같은 모래언덕이 끝없이 이어진다. 처음엔 무슨 묘지인줄 알았는데 가이드에 따르면 바람 때문에 생긴 모래언덕이라고 한다. 바람의 조화가 가는 곳마다 기기묘묘하다.

유원을 떠나 한 시간반 가량 지났을까. 왼쪽으로 성(城)의 잔해가 길게 이어진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2000여 년 전 한나라시대에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기욕관에서 옥문관까지 설치했다는 길이 300킬로미터의 한나라 장성(長城)의 잔해라는 것이다.

유원에서 돈황까지는 우루무치와 기욕관을 잇는 사거리를 지나면서 곧장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그냥 핸들만 바로잡고 있으면 될 만큼 길이 곧다. 가이드는 3일 전 이미 한국인 관광객 20여 명이 돈황을 방문하고 유원을 거쳐 투르판으로 갔고 오늘도 배낭족 한 명이 같은 코스로 떠났다며 우리가 올해 돈황을 방문한 3번째 팀이라고 말한다.

돈황이 가까워 오면서 볼 수 있는 백양나무 숲과 함께 농경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돈황오아시스다. 나는 이번 중국여행을 하면서 오아시스의 개념에 혼란을 일으켰다. 어려서 한 그루에 조그만 샘물, 그리고 낙타나 한 마리 쉬어 가는 곳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서 확인한 오아시스는 어지간한 도시보다도 훨씬 크다. 그리고 옛날에는 오아시스마다 하나의 조그만 왕국이었다. 실크로드를 잇는 오아시스로(路)는 이같은 오아시스국가들을 잇는 길이었다.

돈황도 마찬가지다. 곤륜산맥의 기련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이뤄진 돈황오아시스는 온통 백양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다. 현재 인구는 12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12만 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도 물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큰 '오아시스'라는 얘기다.

어둑해져서 돈황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역시 쉴새도 없이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7킬로미터 떨어진 명사산(鳴沙山) 월아천(月牙泉)으로 떠났다. 월아천에 당도하니 미리 얘기를 해둔 듯 매표소 입구에 낙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우리 일행이 마지막 손님인 듯 차례가 돌아오지 않은 낙타들은 잠자러 간다.

월아천이 있는 명사산은 폭 20킬로미터, 길이 40킬로미터에 높이 1천600미터의 모래산이다. 그러나 월아천 부근은 높이가 고작 50∼60미터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고비사막에서 봐온 것과는 달리 이곳은 제대로 된 모래산이다. 여기서부터 그 유명한 타클라마칸사막이 시작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모두 한 마리씩 낙타에 타고 월아천으로 떠났다. 매표소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월아천까지 가는 길은 한마디로 낭만, 그 자체였다. 푸르른 달빛아래, 한 줄로 늘어서 가는 동안 낙타의 짤랑거리는 쇠방울소리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두 그윽한 분위기에 취해버렸기 때문일까.

그 옛날 대상(隊商)들이 한낮의 더위를 피해 교교한 달빛 아래 사막길을 이렇게 갔을 것이다. 푸른 달빛 아래 명사산의 모래먼지가 뿌옇게 일어난다.

그러나 월아천에 이르렀지만 유감스럽게도 월아천은 볼 수가 없다. 월아천 위에 있는 도교사원의 윤곽만 희끄무레 보일 뿐이었다. 월아천은 초승달 모양을 한 조그만 오아시스다. 이곳에는 물고기도 살고 있다고 한다.

월아천에서 다시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늦게 저녁을 먹은 다음 여독이 풀리지 않았음인지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난주로 나가는 비행기가 내일 낮 1시경에 있어 아침 일찍 일어나 막고굴을 봐야하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 마침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돈황에서 동남쪽으로 27킬로미터 떨어진 막고굴(莫高窟)로 향했다. 막고굴로 가는 길은 그 옛날 서역이나 천축으로 가던 스님들이나 대상들이 보았음직한 전형적인 사막길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명사산 동쪽 끝 단애가 보이는 곳으로 들어서자 예의 백양나무 숲이 보이기 시작한다. 막고굴 절벽까지 가로막고 있는 백양나무 숲 사이로 군데군데 북대굴(北大窟), 남대굴(南大窟), 등 불전(佛殿)과 굴들이 멀리서도 보인다. 사진에서 익히 보아오던 풍경이라 낯설지가 않다.

버스에서 내려 매표소 입구로 들어서자 카메라는 가져갈 수 없다며 맡기라고 한다. 그런데 카메라를 맡기려하자, 보관료를 내란다. 우리는 어의가 없어 우리가 타고 온 버스에 카메라를 두고 석굴로 들어갔다.

너무 이른 아침 이어서인지 열쇠를 든 막고굴 안내인의 손이 빨갛다. 버스 속에서 추위를 잊고 있다가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쨍' 하는 추위를 느낄 수 있다. 중국에 와 처음으로 느끼는 추위 같았다.

명사산 기슭에 있는 막고굴에 불교사원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중엽부터였다. 366년 전진(前秦)시대 낙준이라는 스님이 명사산에 서광이 비치는 것을 보고 굴을 뚫기 시작, 북위(北魏)와 수나라, 당나라, 청나라 때가지 1천여 개의 굴이 뚫렸다.

이 석굴은 현재 막고굴(莫高窟)로 불리고 있지만 원래는 사막의 높은 곳에 있는 굴이라는 뜻에서 막고굴(莫高窟)이라 불렸다고 한다. 높은 절벽에 굴을 뚫어 법당을 조성하고 승방을 만들어 예배와 수도를 했던 것이다.

'명사산'은 말 그대로 '모래가 울리는 산'인 것처럼 모래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우레소리처럼 들린다고 한다. '돈황부근 사람들에게는 단오날 이 산에 올라 액을 막기 위해 모래 위에서 미끄럼을 타는 풍습이 유행했는데 이때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미끄러지므로 그 우려퍼치는 소리가 마치 벼락치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기록도 있다.

이 명사산의 동쪽 1.6킬로미터 절벽 단애에 당초엔 1천여개의 굴을 뚫었지만 지금은 492개의 석굴만 어느 정도 제모습을 갖고 있다. 이 석굴들은 천년의 신비들을 아직도 간직하고 세계에 그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막고굴에는 원래 수만여 점의 불상과 수천 폭의 그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2천5백여 점의 불상과 1천 45폭의 벽화만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벽화만 떼어내 벽을 만든다 해도 5미터 높이로 무려 25킬로미터나 전개할 수 있다고 하니 그 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명사산 동면, 삼위산 절벽에 뚫은 이 석굴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왕원륵이란 한 도사가 이곳에 와 있다가 그 유명한 돈황고서를 발견하면서부터 였다. 16굴의 측실로 생각되는 17굴 장경동(藏經洞)에 있는 수많은 불경과 서화, 고문서들이 우연히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영구의 지리학자 스타인과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자 왕도사를 부추겨 이를 헐값에 사서 자기나라로 약탈해 간 후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과 러시아, 일본의 오오타니(大谷)까지 가세, 나머지 서화들을 경쟁적으로 약탈해 갔다.

특히 동양학에 조예가 깊은 프랑스의 펠리오는 귀중한 자료들만 대량으로 가져갔는데 여기에는 우리의 혜초 스님이 지은「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들어 있었다. 혜초 스님은 바다로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돈황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정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때 초고식으로 간추린 것이 바로 여기서 발견된「왕오천축국전」이 아닐까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리가 본 석굴의 부처들은 북위시대로부터 당나라 때까지 비교적 규모가 큰 것들이었는데 제작연대에 따라 부처의 모습과 벽화가 각각 달랐다. 돈황석굴은 왕모래가 진흙 등과 섞여 이루어진 역암이어서 불상을 조각할 수도, 그림을 그리 수도 없는 형편이다.

돈황의 불상들은 모두 나무와 갈대 프레임 위에 흙을 빚어 만든 소상(塑像)인데 당나라 측천무후가 조성한 94호 굴의 미륵불(높이 34.5미터)은 삼위산 자락을 이용한 것으로 유일하게 소상이 아니다.

지금은 모두 옛날 같지가 않다고 하지만 아직도 어둠 속에서 찬연한 모습을 하고 있는 부처와 벽화들을 보면 누구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2천여 년의 세월을 내려오면서도 그 모습, 그 빛깔 그래도 지켜온 선인들의 솜씨에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든다. 그리고 돈황 막고굴 벽면에 그려진 불화(佛畵)의 신비를 보지 않고선 그 아름답고 신비하고 다채로운 불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