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시심을 일궈 도시속으로 수확의 마차를…
- 창작과 비평사, 민음사, 문학과 지성사에서 발간된 시집들
임순만 / 국민일보 문화부 기자
낙엽이 돌아가고 나서 산허리가 허허로워진 계절에 풍요롭게 출간되고 있는 시집들이 반갑다. 오랫동안 작은 시심을 일궈 이 삭막한 도시속으로 수확의 마차를 끌고가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천양희의「마음의 수수밭」, 김준태「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 강제일「바닷가 사람들」, 나희덕「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는 창작과 비평사에서 낸 시집들이다.
하일지「시계들의 푸른 명상」과 정은숙「비밀을 사랑한 이유」는 민음사에서 나왔다.
김영인「푸른 강아지와 놀다」, 김기택「바늘 구멍 속의 폭풍」, 이진명「섬에 돌아가는 날짜를 세어보다」, 송찬호「십년 동안의 빈의자」, 조정권「신성한 숲」, 황인숙「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임동확「벽을 문으로」, 채호기「슬픈 게이」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시집이다.
「마음의 수수밭」은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속상한 일들로 인해 길을 떠나고, 이 여정에서 마주친 생생한 삶들을 노래한 시집이다. 삶과 숲과 계곡을 헤매는 발걸음이 직소포 동해 원근리 소로봉들에 닿아서 절창으로 터져 오른다.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저녁만큼 서툰 것이 여기 또 있다/개밥바라기 별이/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보다/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몇번 머리를 흔들고 산속의 산/산위의 산을 보다. 신을 올려다보아야/한다는 걸 이제 알았다. 저기 저/하늘이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푸른 것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몸속에 들어와 앉는다/내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시「마음의 수수밭」전문)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은 우직하고 순정한 기개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이 시집의 전편을 흐르는 마음은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 통치하리라'는 구절로 집약할 수 있는데 역사의식 위에 고향에 대한 애정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겹쳐 질긴 아름다움을 맛보게 한다.
'봄이 오면 고향에 가겠네/밭고랑마다 노오란 유채꽃이 첫사랑을 앓아대던/그 나비떼들의 고향으로 가슴 부벼 가겠네/흰 무명적삼 할머니의 구부러진 등에 업혀/발가락 꼼지락거리며 왠지 모르게 울기를 자주 했던/아, 그 찔레꽃 내음새도 파르라이 온몸을 휘감아오던/산 넘어 강 건너 먼 고향으로 가겠네/할머니의 무덤위에 반짝거리는 그런 풀잎사귀로/마음에 쌓인 도회지의 티끌을 털어내기도 하다가/마음 속에 부딪쳐오는 조약돌들도 곱게 어루 만져주겠네'(시「조그마한 그리움의 노래」전문)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는 텃밭에 배추 씨앗을 뿌려 유순한 푸른 싹들이 움터오는 것을 보여주듯 삶이 놓여있는 자리들을 따스하게 응시한 시집이다. 그의 언어들에 의하여 삶은 물기로 촉촉해진다.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 들이/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밤에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마지막 한방울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저리도 눈부신가요/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향기 같은 것인가요/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시「찬비 내리고」전문)
정은숙 첫시집「비밀을 사랑한이유」는 기혹하게 세상을 견디면서도 사과상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자의 마음을 노래한 시집이다. 자아와 일상이 격렬하게 분열하면서 터져나오는 그의 시는 곧 잘 반칙의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그러나 견딘다.
'오라. 긴 목을 가진 자는 모독을 견딜 수 있다/빛이 있음에 및어진 어느 오후, 멀리 보이는 산을 두고/목을 꺾는다. 옛노래로 잠꼬대를 하며/한숨 자도 될 평화의 시간/목을 꺽는다. 근심으로 세워진 나의 나라여/말들을 구걸하며 바삐들 제 집을 찾는구나/나에게서 독향을 맡는 자는 삶을 이해하고 있다'(시「내 몸에서 독향이」중에서)
「바늘구멍 숙의 폭풍」은 섬세한 세부묘사로 사물의 가려진 부분과 삶에서의 숨어있는 사실을 밝혀내는 시집이다.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는 예민한 육체인 마음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미세한 먼지처럼 보다 그 결들의 아름다운 이미지 속에 웅크려 있는 시심을 만나게 한다.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그물이 물결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무드러운 물결은 팔다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바람과 햇빛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두뇌는 뼈다귀처럼 남아/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시「멸치」중에서)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는 일상의 갈피마다 정제된 아름다움을 붙어넣은 정갈하고 평화로운 시집이다. 엄청난 현실의 벽들이 순한 그의 눈길 앞에서 무력하고 무력하다.
'까치발을 하고 담장가에 매달린 한 아이는 사랑스럽다. 까치발이 높아야 얼마나 높겠으며 길어야 얼마나 오래일 것인가. 아이는 맨소매 옷을 입는 여름날에도 털장갑을 끼는 겨울날에도 담장에 매달린다. 까치발을 하고 한 세상을 엿본다. 보고 싶었던 것, 듣고 싶었던 것, 알고 싶었던 것이 모두 있기라도 한 걸까. 거기에 무엇이'(자서 중에서)
' 이 병 여기서 얻었으니 이 몸/여기다 말뚝 박고 떠나가리라/너희들 병 세상에 다 나누어/주고도 그 병에 괴로울 때/돌아와 이 말뚝에 묶이거라/사람들은 울면서/말뚝을 박고 떠나갔다/말뚝에 묶인 도둑의 목에서는/끊임없이 흰 피가 흘러내렸다/가뭄의 땅 어디에 그렇게 지치지 않고/흐르는 물이 숨어 있었던가/먼 길을 가는 사람들은 엎드려 마른 목을 축였다/물은 사람들의 입에서/입으로 세상 끝까지 흘러갔다/마침내 예언은 실현된 것인가/이 기적을 보려고 멀리서도/순례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이제 이땅에도 오랜 역병이 그치고/해마다 풍년이 들리라/빙 둘러섰던 사람들 피 뿌린 땅을 밟으며/다시 되돌아갔다'(시「피 뿌린 땅을 밟으며」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