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논단

미술작품과 미술행정의 역할




조광석 / 미술평론가

요즈음 미술계는 전반적으로 국내외적인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침체 현상의 원인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면 미술작품의 창조자 측면에서는 담고 있는 내용의 변화 없이 형식적 유사성을 추구할 뿐이고, 이들 주변의 미술작품을 수용 중개하는 미술행정의 측면에서는 그 역할은 소극적이고 폐쇄적이면서도 권위만 내세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측면에서, 미술작품에 대한 분류 즉,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등과 같은 구분이 요즈음 무너지며 새로운 복합적인 조형예술의 형식을 만들고 있다. 이것은 미술 내적인 문제로서, 이러한 분류의 무너짐은 어제오늘의 현상이 아닌 이미 금세기 초부터 서서히 싹튼, 미술작품의 사회적 가치기준의 변화와 미술작품의 소비체제의 변화에 동참하는 사회 전반의 병류 현상과 일치한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상품의 디자인 화와 예술작품의 상품화는 예술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전문화, 분업화를 추구한다. 그런데, 최근의 미술작품의 경향은 더욱더 전문적 한계를 초월하는 초 전문적 단계로 진행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표현형식의 단순함 또는 재료 사용의 한계를 의식하게 되어 작품에 함의된 사유 영역의 확대는 분업화, 전문화의 세분화를 통해 역설적으로 이종교배 현상, 즉 서로 다른 전문적인 성격의 작업을 서로 배합하여 또 다른 이종을 만든다. 이는 예술품의 제작이 단순히 기계적 생산이 아닌 작가의 정신활동으로 현대인의 사유체계를 반영하기 때문에 현실의 복잡한 현상들을 표출할 방법들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상황 ―소비사회, 대중매체사회, 정보사회, 전자사회, 고도기술사회 등 ―에 대해 명시적으로 후기모던 Post-Modern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현상의 다양성은 삶의 형태의 다양성을 나타내고 작가들은 그들의 제작의식에 공시성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작가들의 제작태도에서 양식의 많음은 순전히 문화 예술적 현상으로 판단될 수 없고 복잡한 사회의 출현으로 문화적 자료의 다양화와 방법의 다변화에 따른 작가의 대처로 심미적 인식의 변화와 실험성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을 여러 가지로 많음 그 자체로서만 받아 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외적으로는 다양한 형식을 선택할지라도 본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된 형식으로 전개될 필요성이 있다. 즉, 강조하자면, 지성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표현이 집약되어야 한다.

작가들은 작가들대로 자기의식으로 동시대적인 다양성을 추구하고 작품은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다양성에 대한 의식은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가 ? 항상 새로운 형식만이 그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 이미 존재하는 조형방법을 그대로 차용할 때 그 작품이 반영하는 것은 현재 이곳에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사유를 반영하는 공시성을 보여주게 되는가 ?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변은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작가들은 새로운 시도와 이미 보여진 형식을 차용하면서 다양한 작품 제작을 시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는 많은 작가들의 동시대성의 수용 태도에 한계가 있음을 본다. 또한 작품을 전시하며 미술품을 수용하고 대중(감상자)과 관계를 형성하는 미술기구(화랑, 미술관)의 전체적인 공조체제는 한편으로 기대해 볼 수 있는, 새롭고 독창적인 시도로서, 이러한 침체에 대한 극복보다는 어찌할 수 없는 벽으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현실은 미술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침체의 분위기로 이끈다.

미술계는 '미술의 해'라는 커다란 구호를 만들어 놓았지만, 지난 연말과 연초의 화랑 가와 미술관은 깊은 동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설 화랑을 비롯한 국립현대미술관까지 많은 단체전을 기획하였다. 이 전시들은 서로 유사한 작품들을 기획하여 철저히 보수적 양식주의의 예술의도를 반영하며 현실 상황을 정체로 이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사회 제도 내의 기구(화랑, 미술관)들의 현실적 역할은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 단편적 예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일련의 전시들―[젊은 모색 '94], [서울 국제현대미술제]―은 미술계의 오늘과 내일의 흐름을 어둡고 답답하게 이끌고 있음을 본다.

[젊은 모색 '94](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우리는 전체적으로 작품제작의 다양성을 이끌고자 시도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여러 가지 모양들뿐이었다. 실제 24명이라는 서로 다른 성격을 추구하는 젊은 작가들을 한 장소에서 공통된 주제 없이 다양한 미래를 전개하는 작품들을 모으기는 쉬운 일이 아닌 점도 이해한다. 그러나 주체자의 잘못된 관점에서 몇 가지 이 전시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들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은 무엇인가? 주체자는 '무엇(what)'이라고 말하면서 '자연', '인간', '인간의 내면세계', '자연과 인간 삶의 배후에 있는 실체적 힘' 등 때문에 다양한 특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 작가들은 무엇 때문에 작품을 하는가 ? 이런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작품제작을 하는가 ? 또한 이러한 주제들이 작품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가 ? 그들에게서 전망되는 것은 무엇인가 ? 어떤 작품은 전통적인 형식을 취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형식적 실험성은 갖고 있지만 내면의 빈곤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주체자가 말하는 '어떻게'는 다만 '우리 시대의 표현의 여러 다양성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들 작품에서 재현되는 주제는 이미 기존의 작가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다루어져 왔고, 그 문제의식은 작가 개개인의 고유의 조형체계로 확립되지 않은 것들이다. 사고의 평범함, 제작형식의 낡음은 관람자에게 무엇을 보라는 것인가 ? 즉 작품을 통해서 시각적 즐거움이나 내면의 읽을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전시회는 적나라하게 펼쳐놓는 것만 아니다 전시의 주체자는 이미 선정해 놓은 작품들을 해석하고 그것들을 재구성함으로써 전시 주체자의 의도를 구현하여야 한다. 그것은 작품들의 올바른 해석과 전시 방법에서 고도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한다. 작품의 전시는 적당한 배치가 아니라, 관람자가 전시장에 들어가서 나갈 때까지의 파악될 수 있는 흐름을 구성하고 주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기획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전시회는 미숙한 전시 기획, 전시 구성, 전시 방법 등이 드러남으로써 젊은 작가들의 위상을 오히려 약화시키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1월 중순까지 있었던 [서울 국제현대미술제]는 더욱 절망적이었다. 현대미술관측은 주최자가 '현대미술관'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책임전가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전시회를 찾는 관람자는 우리의 현대미술의 실상으로 보고 있고, 그런 점에서 미술관의 사회 교육적 역할의 중요성을 반영한다.

이 전시에서는 많은 외국작가들은 이미 소개되었거나 심지어는 60년대 작품, 바로 앞의 [까르띠에 재단 소장전]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이 다시 천거되었다. 결과적으로도 이 전시에서 추구하는 국제 현대미술의 개념을 설정하지 못한 채 [서울 국제현대미술제]는 주최자의 무성의와 계획의 졸속함을 드러내면서 우리 미술계의 동면을 방치하고 있다. 전시회를 조직하는 데 있어서 이제는 단순히 작품들의 소개가 아닌 정돈되고 체계적인 형식을 통해 관객의 의식에 영향을 주고 또 통제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의 이 미술관에서 주도된 많은 전시의 미숙함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상식 이하의 전시방법, 전시홍보의 미약함, 전시 도록은 특정인들에게만 배포되고, 일반 관람자는 전시 이후에 자료로 볼 수 없는 등등, 미술관의 사회 교육적 역할은 무시되어 왔음을 주지하여야 할 것이다. 서구의 많은 현대미술관들이 그 나라의 미술들을 주도하듯이 우리의 현대미술관은 적어도 다른 상업 화랑들에 비교가 되는 전시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때, 지금까지의 국립현대미술관의 역할을 다시 한번 의심하게 한다.

비슷한 시기의 서경 갤러리의 [95 떼뜨누벨전]은 앞의 전시와 비교가 된다. 이 전시는 상업갤러리에서 주관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신인들을 발굴한다는 취지는 지금까지의 화랑들의 상업주의를 벗어나 우리들에게 참신한 미술활동의 활성화를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이 전시도 문제점이 다른 각도에서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의욕이 있었지만 작가의 선정에서 대학 중심으로 일부 특정 대학은 제외시켰으며, 전시의 구성에서도 구태의연한 동양화, 판화, 조각, 서양화의 분류는 현실적으로 미술의 장르를 잘못 인식하고 있으며, 이런 분류에의 전시회 구성은 다시 일상적인 감수성에 의한 전시회로 사라질 위험이 있다. 또한 이제 미술대학을 졸업하게 되는 작가들임에도 기성 흐름에 상당한 민감한 작품들에 혼탁 되어 몇 명의 신선한 작품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즉 옥석의 구분이 잘 안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95 떼뜨누벨전]은 화랑의 상업적 이윤추구와는 별개의 화랑의 진보적 태도와 젊은이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측면을 보여준다. 앞의 미술관과 비교했을 때 관료적이며, 모순적 경향은 우리의 미술관에 아직도 의례적으로 작용되며, 현실적으로 미술계의 침체를 극복하는 데는 관행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미술행정의 역할은 미술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지성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표현이 사회변화에 대한 객관화의 기본형식의 결과이면서, 미술 작품들은 단순히 미술내의 현상뿐만 아니라 미술 외적인 많은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작가와 감상자 사이에서 조정과 작품의 올바른 해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