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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배우들의 역동적인 무대




이정재 /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늘 그렇지만 이맘때쯤이면 '벌써'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신년 계획을 세운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나고 '달 갈이'가 시작됐다는 아쉬움 때문일까.

이 달 연극동네는 눈에 띄는 신작이 별로 없는 것이 특징. 연초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진 데다 소극장 연극의 장기화 추세가 두드러지면서 지난달 개막된 작품들이 대부분 달을 넘겨 공연 중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달에는 연극동네의 관심이 집중된 작품 두 개가 나란히 막을 올린다. 국내 뮤지컬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들인 대형뮤지컬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와 영화배우 강수연이 타이틀 롤을 맡아 출연하는 [메디아]가 그것.

내달 7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개막되는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조지 카우프만·모스 하트 공동작, 강영걸 연출)는 8억 원이라는 국내 뮤지컬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들인 초대형 작품. 브로드웨이의 대표적인 희극을 세계 최초로 뮤지컬로 개작한 이 작품은 연극배우이자 탤런트인 송승환씨가 제작자로 나서 1년여의 준비기간과 캐스팅에만 6개월이 넘게 걸린 대작이다. 모든 뮤지컬 넘버가 순수 창작 곡으로 만들어진 이 뮤지컬은 "영국의 대표적인 뮤지컬 작곡자 엔드류 로이드 웨버에 도전하겠다'는 포부를 숨기지 않는 가수 김수철의 뮤지컬 작곡 데뷔무대. 음악 제작에만 1억 원이 넘는 돈이 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품은 출연배우도 제작비에 걸맞은 초 호화판 멤버로 꾸며진다. 브라운관 톱스타 최수종, 엄정화가 타이틀 롤을 맡아 열연하며 연기와 노래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다는 탤런트 양희경, 가창력으로 인정받는 가수 권인하, 코믹연기에 타의 추정을 불허한다는 이정섭·권해효에다 서울예술단의 톱 뮤지컬 스타 이정화가 가세하며, 60∼70년대 한국 연극배우의 대명사로 불리던 김성옥씨가 영화배우이자 연극원 교수인 최형인씨가 공동 출연해 극의 무게를 잡아준다.

맡은 작품마다 빅히트를 기록해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는 연출자 강영걸씨는 "최고의 제작비에 걸맞게 최고의 완성도를 갖춘 최고의 작품을 선보일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내달 3일부터 16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메디아](김윤미 작·김아라 연출)는 월드 스타 영화배우 강수연의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작품. 오래 전부터 연극출연을 모색해온 강씨는 그간 창작극만을 고집, 여러 연출·기획 자들의 애간장을 태웠는데 마침 촬영예정이던 영화가 취소되고 작품이 맘에 들어 전격적으로 출연을 승낙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수연은 연습실에 누구보다도 일찍 나와 늦게까지 연습의 강행군을 계속해 '역시 스타는 뭐 가 달라도 다르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그리스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희랍신화-「메디아」의 줄거리와 하이네 뮐러의 삼부작 [황폐한 강변, 메디아 소재, 아르고 선원들이 있는 풍경]을 빌어 패러디 형식으로 연출 김아라와 작가 김윤미가 재창작한 이 작품에는 두 명의 메디아가 등장한다. 하나는 죽어버린 메디아의 혼(메디아 신)이며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아버지를 배신하고 친동생을 살해했지만 끝내 남편에게 버림받아 복수의 화신이 된 신화 속의 메디아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두 메디아의 화합을 통해 인간의 번뇌와 고통을 해결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축으로 한 이 극은 동양의 윤회관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현대음악가 임동창씨(38)가 피아노 건반을 뚫어가며 퉁겨내는 음악이 언어의 리듬감과 어우러지며 여성과 여장남자로 구성된 코러스가 일인 다역을 통해 극의 유희성을 한껏 끌어올린다.

또 이 달 들어 새로 막이 올라가는 작품으로는 극단 판(대표 최강지)의 [굿모닝 배뱅이](연우무대, 2월 1일∼4월 2일)가 눈에 띄는 공연. [로젤], [북회귀선], [다까포] 등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던 연출가 최강지씨가 각색,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서도소리 중 배뱅이굿을 소재로 한 놀이 극. 살롱 '하루'의 마담이 손님이 없어 혼자 술로 소일하던 어느 날 일주일만에 손님 한 명이 나타난다. 그는 빈털터리 거지백수다. 마담은 심심풀이 삼아 백수와 술판을 벌이고 백수는 부잣집 외동아들로 태어나 춤과 노래, 조선팔도의 명기를 찾아 유랑하면서 재산을 탕진한 자신의 신세타령을 늘어놓는다. 백수와 마담은 배뱅이와 박수무당으로 변신해 신나는 굿판을 벌이게 된다는 게 줄거리.

1991년 전국 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통령상을 수상한 박정욱씨가 박수무당 역을 맡고 1981년 백상예술대상 신인상 수상한 관록의 연기자 김민희가 배뱅이 역을 맡아 열연한다.

이밖에 지난달 개막이래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으로는 극단 산울림(대표 임영웅)의 [거미 여인의 키스](마누엘 피그 작·채승훈 연출)과 극단 사하(대표 송종석)의 [권태](알베르토 모라비아 작·송종석 연출), 극단 봉원패(대표 박구홍)의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가 꾸준히 좋은 흥행성적을 기록중이다.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극단 산울림의 현대해외명작 시리즈 2탄 [거미여인의 키스]는 남미의 대표작가 마누엘 피그의 원작 소설을 무대화한 국내 초연 작으로 매스컴의 호평과 관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이 달 26일까지 연장공연에 들어갔다. 동성애와 게이 문제를 소재로 인간의 근원적인 사랑과 우정을 다룬 이 작품은 1976년 소설로 발표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고 1984년 영화화되어 몰리나 역의 월리엄 허트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1992년엔 뮤지컬로 각색, 1993년 토니상 7개 부문을 수상한 화제작이다.

호모인 몰리나와 정치범 발렌틴이 한 감방에 수용된다. 현실적 인간과 혁명적 인간이란 극히 이질적인 성격으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의 가치를 얘기하며 서로의 벽을 허물고 극적인 합일을 이룬다.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에서 호연한 안석환이 게이바를 직접 찾아가 익힌 호모연기로 극을 맛깔스럽게 단장해주며 [불의 가면],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등에서 주목받는 연기를 펼친 남명렬이 완숙한 앙상블을 펼친다.

인간소극장에서 4월말까지 장기공연을 선언한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주찬옥 작·김동수 연출)는 주찬옥·박구홍 인기드라마 작가 부부가 중심이 돼 지난여름 창단 한 극단 봉원패의 창단공연 작.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지난 1990년 TV드라마로 방영돼 시청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페미니즘 드라마를 연극으로 재구성한 것. 인기드라마의 첫 무대화라는 점에서 공연 전부터 관심을 모았었던 이 작품은 다섯 명의 여자가 겪는 사랑과 이별, 결혼과 죽음 등 일상의 얘기를 섬세한 여성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출연 배우 전원 이 여성 연기자로 구성된 이 작품에는 서주희, 박현숙, 김현아, 박상아 등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는 탤런트가 네 명 출연한다. 원작의 분위기를 살려내기 위해 특별한 연극적 장치 없이 액자형 구성을 취한 데다 브라운관 스타들이 그대로 등장하는 이 작품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분위기와 감성적인 언어로 특히 영상매체에 익숙한 젊은 여성의 호응을 얻어내면서 주말이면 만원 사례를 기록중이다.

극단 사하의 [권태](충돌소극장, 26일까지)는 [로마의 휴일]로 잘 알려진 이태리 문단의 거성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대표작. 몰락한 화가 스테파노와 모델 세실리아의 성적 광태를 치밀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권태라는 이름의 병리를 통해 서구문명의 위기를 진단한다.

화가 스테파노는 언제나 권태롭다. 어느 날 아래층 노 화가의 모델 세실리아를 만나고 그녀의 끈질긴 유혹에 직면한다. 끝없는 성적 욕구와 집착에 시달리며 스테파노는 세실리아에게 끌리는 마음을 부정해보지만 결국 욕망에 굴복한다. 스테파노는 권태에서 탈출하기 위해 세실리아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그녀의 육체를 탐닉하지만 이번에는 집착과 소유욕이 그를 괴롭힌다는 게 줄거리. 과장 없이 담백한 연출로 극을 솜씨 있게 요리한 젊은 연출가 송중석의 재치가 김영선, 강수정의 하모니 연기와 어울려 꾸준히 젊은 관객들을 유혹하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