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장르의 우리 영화들
오정국 /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새해 들어 설날 개봉을 겨냥해 시사회를 가진 한국영화는 3편이었다. 김성흥 감독의 [손톱]과 권칠인 감독의 [사랑하기 좋은 날],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이었다. 이들 영화는 모두 젊은 감독들의 야심작인데다 장르도 제 각각이다. 모처럼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관객들의 입맛을 돋구고 있다.
먼저, 김성홍 감독의 데뷔작 [손톱]은 우리 영화에서 보기 드문 스릴러물이다. 결과를 미리 암시하고, 그 과정을 즐기도록 하는 테크닉이 신선하고 긴박감이 넘친다. 도입부의 스피디한 전개가 관객들을 숨막히는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긴장은 증폭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가정이나 직장,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여고 동창생(심혜진)의 말 한마디에 굴욕감과 배신감을 느낀 여자(진희경)가 동창생에게 치밀하고도 지능적인 복수를 해나간다는 게 줄거리다. 결과는 이미 예측되어 있다. 단지 관객들이 그 과정에서 서스펜스를 느끼도록 하는 게 이 영화의 구성력이다. 물론 외국의 스릴러물보다는 긴박감의 속도가 떨어지지만 신인감독의 손에서 이런 의욕적인 작품이 나왔다는 게 고무적이다.
심혜진의 차분한 연기는 자로 잰 듯 정밀하다. 진희경의 연기변신 또한 볼만하다. 데뷔작 [커피 카피 코피]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최근 한국영화의 장면 중 에 불을 지르는 대목이 왜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것일까. [어린 연인]에서도 방에 불을 질러 그 연기가 문틈으로 새어나온다. [손톱]에선 거실에 불을 지르는데 사각의 기둥에 불이 붙어 있는 모습이 외국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장면이다. 목욕탕에서의 정사장면은 또 어떠한가. 한 가정을 파괴하기로 작정한 여자(진희경)가 동창생의 남편(이경영)이 목욕을 하는 욕실로 쳐들어가 한바탕의 정사를 벌이는데, 유리에 비친 그 장면은 이미 외국영화에 많이 나왔던 장면이다.
그리고 영화의 도입부에 나타나는 부부의 정사장면. 부부가 왜 낮 시간에 아파트로 달려가서 정사를 벌여야 했느냐는 점이 설명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부부가 저녁때 각각 어디론가 출장을 가야 한다는 등의 정황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 시간에 부부관계를 가져야만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설명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권칠인 감독의 [사랑하기 좋은 날]은 멜로물이다. 신세대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사실상 그 정서는 고전적인 정서였다. 멜로물이었지만 코믹한 대목이 많았다. 도입부의 야구공이 중반부에도 나오고, 그런 대목에서 관객들이 웃었다. 헌데 그 웃음이 정말 우스워서 웃었는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는지는 감독이 한번쯤 짚고 넘어갔으면 싶다.
또 스토리상 무리한 부분이 많다 이를테면 항공회사 여승무원(지수원)이 비행기에서 만난 손님(최민수)과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서는데 거기서 어떻게 고교시절 앨범을 펼쳐놓고 얘기를 나누게 됐는지 의아스러웠다. 이 앨범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여러 사건을 파생시키고, 또 관객을 웃기는데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그랬던 것만큼 정밀한 상황, 이를테면 테이블 위에 그게 펼쳐져 있어서 같이 보게 되었다든지 하는 상황이 제시되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이혼을 한 이유도 사실상 불분명하고, 남자 주인공이 이혼을 한 이유도 몇 마디의 말로 대충 넘어간다. 그럴 수 있다는 건 수긍이 가지만 영화의 리얼리티에 의해 관객을 더 큰 감동을 받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 영화 속의 광고가 너무 많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두 사랑의 재회. 그 장소와 시간이 텅 빈 그라운드의 전광판 불빛으로 새겨져 밤하늘을 비출 때 가슴이 뭉클했다. 또 참새 시리즈의 변주는 기발한 아이디어였고 그 대목에서 필자는 또 한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물살들이 파도처럼 쉴새없이 밀려와 마침내 온몸을 적셔 버리는 것과 같은 감동이었다.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은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관객들을 긴장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무엇보다도 힘이 있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영화 속의 사건이 관객들을 이끌어 간다. 작품의 주제는 '군신간의 파워게임'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조선조 역사의 한 부분을 물론 가공적 사건이지만,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한 게 아닐까. 물론 이와 유사한 주제가 있었으리라. 이 작품은 여느 작품과 다른 점은 바로 '파워게임'의 근거가 되는 이론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이미 알고 있듯이 이인화의 베스트셀러이다.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로 장편소설 한 권을 채웠다는 것이 놀라웠다. 문제는 작가가 책에서 이미 밝혀 놓았지만 움베르또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너무 어깨를 기대고 있지 않느냐는 점이다.
그 형식이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원작에 너무 충실했기 때문일까. 책을 둘러싼 의문의 죽음들. [장미의 이름]의 무대인 중세 수도원을 한국의 궁중으로 옮겨온 것은 아닌 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박종원 감독이 이번 작품을 하면서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의 흐름을 일부 바꿔볼 수는 없었는지……. 채이숙과 상아가 '서학교도'라는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와야 했는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원작을 미리 보거나 사전정보를 접한 뒤 관람해야 줄거리를 제대로 따라잡을 수 있지 않나 싶다. 게다가 원작에서 그대로 옮겨온 채이숙과 상아가 '서학교도'란 사실은 관객들이 '금등지사'를 둘러싼 의문의 사건들을 따라잡는데 혼선을 준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워크가 역동적이어서 화면이 살아 숨쉬는 듯한 느낌을 주 고 등장인물들과 캐릭터도 살아 있다. 최고의 권력자이면서도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계책을 부리는 정조 역의 안성기는 눈앞으로 화살이 날아들어도 눈썹 하나 까닥거리지 않는 강인한 이미지의 왕으로 부각된다. 이에 맞서는 노론의 총수인 좌의정 심환지 역의 최종원은 능구렁이 같은 노 정객의 풍모를 물씬 풍긴다. 꼿꼿한 성품의 이성적 인물인 정약용 역을 맡은 김명곤은 짧게 짧게 끊는 대사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원한 제국]의 셜록 홈즈 역을 해나간다. 영화의 나레이터이자 사건 연결의 중심 축인 29세의 규장각 대교 이인몽. 그 섬세하고 도 유약한 성격을 조재현이 잘 살려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선명하게 부각된 웅장하고도 장엄한 왕조의 모습. 감독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 고 9개월이란 촬영기간을 투입했고 제작 사는 12억 원을 투자했다. 의상제작비 1억 여 원. 수염 값만 1천여 만 원…… 물은 서서히 데워져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끓어오른다. 그것처럼 군신간의 갈등과 파워게임이 단 하루 동안의 사건으로 집약되어 폭발하는 [영원한 제국] 영 화 전편의 에네르기가 올해 우리 영화 곳곳에 흘러 넘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