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고대문명의 진수가 자리한 곳
이희수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인더스문명으로 통하는 관문은 파키스탄 최대의 교역도시 카라치이다. 이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 거리의 수쿠르 시에 내린 뒤 다시 자동차로 2시간을 달려 인더스문명의 요람지인 모헨조다르에 닿았다. 인더스를 호흡하고자 했던 오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45도를 웃도는 뜨거운 햇살 아래 아직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벽돌 한장한장에는 잊혀졌던 또 하나의 인류문명의 실체를 밝히려는 거대한 인간의 집념이 어려 있었다.
모헨조다르는 신드 지방말로 '죽음의 언덕'이란 뜻, 인더스 문명의 중심 유적지인 이 곳에 인류 최고 문명이 감추어져 있다. 우선 붉은 벽돌집이 끝없이 펼쳐지는 5천여 년 전의 아담하고 웅장한 고대도시의 모습이 시야를 채웠다. 벽돌집은 모두 규격화된 2층 민가들로 정비된 도로를 끼고 사방에 도열해 있었는데 아래층은 욕실과 창고로, 위층은 부엌과 거실로 사용된 것 같았다. 약 8만의 인구가 거주했다고 추산되는 도시 군데군데에는 대규모 공중목욕탕, 석관을 사용한 지하배수시설, 시장 창고와 우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는 인더스 사회가 동일한 삶의 형태와 일정한 도구를 사용한 고도로 정비되고 통합된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신전만이 발달하고 국왕과 소수의 지배 엘리트 및 대중 사이에 계급 의식과 경제분화가 뚜렷했던 특성을 갖고 있다. 이에 비해 모헨조다르는 민가가 발달하였고, 전체 도시민이 평준화된 풍요로운 생활과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문화를 소유했음을 알 수 있다.
벽돌은 길이 28cm, 폭 14cm, 높이 8cm의 규격품으로 공장에서 대량으로 구워 만든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모헨조다르 도시 건설에만 1억 장 이상의 벽돌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발굴이 진행중인 인근 고대도시와 아직도 숨어있는 400여 개의 인더스 벽돌도시를 생각하면 그 수와 규모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직 벽돌 공장터가 발굴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앞선 벽돌 제조기술과 대규모 주택건축 능력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유적지 주변 마을에서는 문화재 관리당국의 단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도 모헨조다르의 벽돌이 주된 건축 자재로 토담집을 장식하고 있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남루한 옷차림으로 가난에 찌들어 있는 현대 토착민의 생황보다는 고대 모헨조다르 사람들의 생활이 훨씬 풍요로웠을 것이라는 일행들의 한결같은 탄식이 공감으로 다가온다.
1억 인구의 절대빈곤과 문맹, 이것이 화려한 인더스 문명의 후예들이 지고 있는 멍에이다. 전통사회의 여인들은 아직도 14세에 결혼해서 평균 8명의 자녀를 출산한다. 거기다 일부다처제까지 존속되고 있으니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당분간 피할 방도가 없을 것 같다. 인구의 조절과 적절한 여성교육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파키스탄 문화성의 아흐마드 나비국장은 힘주어 강조하였다.
인더스문명의 발견은 우연한 일이었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통치 아래 있던 하라파 부근에서 철도 부설 공사를 하던 중, 수많은 돌인장과 벽돌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고고학자들은 이 유물들을 단순히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문명의 일부로 간주해 버렸다. 그후 1920년과 1922년에 영국의 고고학자 존 마셜에 의해 하라파와 모헨조다르에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면서 인류 고대문명의 진수가 역사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지난 70년간 세계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유네스코가 주관이 되어 체계적인 발굴과 복원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현존하는 유적지 하부에 훨씬 고대의 또 다른 도시문명이 묻혀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지하 유적의 와전한 발굴은 기존 유적들을 파괴해야 하는 문화적 도덕성과 맞물려, 어쩌면 영원한 인류의 수수께끼로 남을 지도 모른다.
인더스 강줄기를 따라 모헨조다르의 유물이 잘 전시되어 있는 카라치로 향하면서 나는 강물 속에 녹아 있는 파키스탄을 느껴보았다. '청정의 땅'이란 의미를 가진 파키스탄의 역사는 흔히 인더스 강물 속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더스 없는 파키스탄의 문화는 상상할 수가 없다. 인더스 강은 인간의 숨결이 닿지 않는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3천km의 젖줄이다. 카라코룸산맥에서 발원한 어린 물줄기는 펀잡평원에 이르러 처음 인간세계와 조우하고, 다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흘러가면서 신드평야를 적셔 하라파와 모헨조다르라는 인류 최고의 문명을 발아시켰다. 문명의 물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간다라에선 그리스, 인도, 불교문화를 서로 하나 되게 하였고, 카라치에 이르러 비로소 이슬람을 꽃 피우고 아라비아 해로 흘러 들어감으로써 긴 문명 항해의 임무를 끝낸다.
카라치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단연 형형색색의 차량들이었다. 차들마다 모두 원색으로 어지럽게 치장한 채 곡예하듯 고층빌딩사이를 질주하고 있다. 버스는 더욱 가관이다. 사람을 싣고 간다기보다는 사람이 보스에 벌떼처럼 매달려 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삭막한 도시생활에서 가난에 찌든 서민들에게는 그들의 예술적 욕구를 분출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동차를 꾸민다. 원색 바탕에 코란이나 좋아하는 글귀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장식을 단다. 유치한 색조라든가 혼란스러운 치장들은 아무래도 좋다. 그것은 물과 초원이 있는 고향을 등지고 도시라는 거대한 착취자에 대항하는 그들만의 진솔한 애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저속을 뛰어넘는 위대한 민중예술인 셈이다.
습관대로 카라치 국립박물관에서 좀더 많은 시간을 갖고 인더스문명과 대화를 해본다. 인장, 채도, 장식용 구슬, 토용, 석상 등이 눈길을 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석판과 구운 점토판에 정교하게 음각된 수많은 인장들이다. 인장에는 '►'자를 포함한 각종 부호 및 동물그림과 함께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를 연상케하는 일종의 발전된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4백여 개의 문자가 찾아졌으나 지금까지 그 판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인더스문명의 소유자들이었던 드라비다족의 언어, 종교, 역사 등은 아직 미궁에 빠져 있다. 이집트 상형문자의 신비를 푸는 실마리를 제공했던 '로제타 스톤'의 발견같은 우연을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통치권과 관련된 유물로는 정교일치 사회의 수장으로 보이는 석상이 있다. 가는 눈을 뜨고 턱수염과 콧수염을 가지런해 다듬고 머리를 잘 빗은 채 머리띠를 리본으로 묶은 형상이다. 이를 통해 모헨조다르 사회에서 중앙집권적인 소수의 엘리트 사제 지배층이 존재했고, 면도를 위한 정교하고 날카로운 금속도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힌두교에서 숭상하는 시바신의 조형인 링가와 요니 신상과 암소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인더스문명이 인도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교역에 있어서도 채도, 금은 세공품, 구리, 청동제식기 등의 분포로 미루어 그들이 해상과 육상으로 서아시아 지역, 특히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교역의 폭을 넓혔으며, 멀리 나일강 유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인더스 하구 신드지방의 면화는 서아시아에 섬유혁명을 가져다 주어 지금도 서아시아 일대에서는 면화가 '신두', 그리고 면제품이 '신두니안'으로 불리고 있다. 실제로 기원전 2300년경 후기 하라파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초의 조수간만식 조선소 유적이 인도 서북구 로탈 해안에서 발견됨으로써 인더스인들의 조선술과 항해기술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모헨조다르나 하라파 도시 문명이 보여준 인장의 형태와 사용, 채도의 제작술, 대규모 건축기법 등은 종래의 학설과는 달리 인더스문명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같은 시대이거나 시대적으로 앞서고 있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피력되고 있다. 더욱이 모헨조다르의 멸망이 기원전 1500년경 아리안족의 침입 이전에 이미 인더스 강 하구의 융기로 강물이 범람해 도시가 수몰되었다는 새로운 고고학적 연구에 근거하고 있다. 각자의 상반된 관점과 접근으로 나타난 문명발생의 독자성과 멸망, 선후문제야말로 부단히 역사학도를 채찍질하고 고뇌하게 하는 과제의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