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의 사람들. 1

조명도 작품이해가 중요합니다

- 이우영, 무대조명의 한평생




서연호 / 고려대교수, 연극평론가

외국잡지 사진 통해 '명암의 세계' 발견

: 문예진흥원에서 발행하는 「문화예술」지에서는 지난 1994년도에 「한국 연극의 미래를 여는 사람들」이라는 기획으로 그동안 주목받아 온 연출가들의 활동을 저와의 대담을 통해 소개한 바 있습니다. 금년에는 같은 맥락의 기획으로 연출가를 제외한 무대예술가들의 활동과 작업과정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그 첫번째 순서로 이렇게 이우영(1937년 4월생)씨를 모시게 된 겁니다.

: 조명 분야에서 저보다는 유능한 분들도 많고 젊은이들도 많은데 ..........

: 현재 국립중앙극장 무대과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계시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 중책보다 우리 주변에서 보기 드문 무대조명예술가라는 점에 비중을 두고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우리 국민들이 무대조명을 예술로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후진성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그동안 이우영씨가 이룩해 놓으신 업적에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정말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쁘기 한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무대조명을 위해 평생을 다 받쳤지만 남은 인생도 후진양성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다는 각오로 하루하루 지냅니다.

: 무대조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 50년대 후반 20여 세의 나이에 저는 무역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시공관에서 「원술랑」을 보던 중에 처음으로 불빛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극장을 전전하면서 더욱더 열심히 조명을 관찰하였지요. 아시는 대로 베비 라이트에 렌즈를 끼우거나 깡통을 이용해서 조명기를 만들어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1962년 국립극장 조명실 임시직으로서 제 조명 인생은 시작되었습니다.

: 당시의 시공관은 대구에서 환도(1957년 6월)한 국립극장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1962년 3월에 그 건물이 국립극장으로 정식 재개관 되었지요. 그러니까 국립극장 명동시절과 함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군요. 처음 누구로부터 기능을 배웠습니까?

: 당시 무대책임자셨던 전희영 선생이 제 스승입니다. 선생은 일제시대부터 조명을 해오신 분으로 생존해 계신다면 80세 정도이고 한국 조명예술의 선구자인 동시에 저의 새로운 인생을 열어 준 분이기도 합니다.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는 한 작품이 끝나는 그날 밤에 새 작품의 무대장치를 세우고 조명기를 설치하고 이튿날 오전에 총연습을 하고 오후에 바로 개막하는 눈코 뜰 겨를이 없이 바쁘고 피곤한 데다 박봉에 지쳐서 몇 차례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 전희영 선생은 물론 선구자임에 틀림없겠지만 선생의 지도만으로 혹은 당시 국립극장의 기술 수준이나 기자재만으로 이우영씨가 만족할 수 없었을텐데 무대 조명의 새로운 개념이나 방법을 어떻게 찾아내셨습니까?

: 조명에 관한 서적을 백방으로 찾아보았지만 구할 수 없었고, 시간이 나는 대로 영화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명동 중국대사관 골목에서 서양사진 잡지를 찾아냈지요. 잡지에 실린 사진들의 명암 분석을 통해 조명의 시각, 각도, 농도, 입체화 등을 스스로 구체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어요. 말하자면 제 독학의 방법이었지요.

60년대의 조명 체험과 발견

: 명동시절에는 계속 임시적으로 작업했습니까?

: 임시직에서 중간에 고용직으로 채용되었고 1973년 11월 장총동 국립극장에 올라오면서 정식으로 별정직이 되어 현재까지 봉직하고 있습니다. 명동시절 제 조명 공부에 도움을 주신 분들 이 더 있는데, 차기봉 선배님(70세 정도)과 고천산 선배님(KBS 퇴직), 그리고 무용가 조택원 선생을 들 수 있지요.

: 조택원 선생과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됐습니까?

: 그때만 해도 해외에 나가는 것이 무척 어려웠고 또 누구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조명에 관한 참고서적을 계속 찾고 있던 중 조택원 선생이 일본에 다니시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 간절한 소망을 털어놓았습니다. 선생은 오히려 반기시면서 「조명 데이타 북」을 사다 주셨지요. 무대조명, 상업조명, 교통조명 등을 종합적으로 설명한 책인데 제 공부에 처음으로 학술적인 지침이 된 겁니다.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잇고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 자신의 조명플랜에 의해 공연된 첫 작품은 무엇입니까?

: 1969년 육완순 선생이 국립극장에서 안무한 「흑인영가」, 「황진이」등으로 기억도니蝥데, 그때 박용구 선생이 신문에 저의 조명에 대하여 자상한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새우젓 독으로 디머를 만들어 쓰던 시기인데 조명이 작품을 살려 주었다는 요지였지요.

: 국립극장 기록에 의하면 1970년 3월 「인종자의 손」을 공연할 때 이우영씨가 처음으로 조명책임자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 기록일 것이고 명동시절 작품 하나하나마다 애로와 고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 작업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밤을 새워도 다 못하지요. 60년대에는 색지가 귀해서 주로 방산시장에 가서 과자 싸는 반짝 종이를 사고 거기에 물감을 염색해서 조명기 앞에 끼우고 사용햇습니다. 국립극단에서 「산불」(1962. 12)을 공연할 때는 마지막에 대숲을 태우는 장면의 효과가 문제였지요. 각목으로 틀을 짜서 세우고 그 안에 엷은 천을 가늘게 잘라 여러 줄로 밑으로 내려 드린 후에 바닥에서 붉은 조명을 비추니까 그 천빛이 마치 불이 타오르는 듯이 보였습니다. 이진순 선생의 연출은 이 장면 때문에 더욱 돋보이게 됐습니다. 국립극단에서 「만선」(1964. 7)을 공연할 때는 달빛과 바닷물결의 효과가 숙제였지요. 달빛을 내는 기재가 없어 둥근 가로등을 구입해서 공중에 매달아서 충분한 효과를 낸 후 암전을 시키면서 10미터 높이의 그 등을 제거 했습니다. 커다랗게 물통을 짜서 바닥에 비스듬이 거울을 깔고 물을 채운 후 통을 서서히 흔드니까 거울에 반사되어서 호리존트에 비치는 물결이 영낙없는 파도로 보였습니다. 장종선 선생의 무대미술은 이렇게 해서 더욱 조화를 드러내었죠. 국립극단에서 「북간도」(1968. 3)를 공연할 때는 눈오는 장면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눈기계가 있었지만 1백볼트의 전기에 맞지 않아서 난관에 봉착하게 됐습니다. 청계천에 있는 조명기제작소를 찾아가 호소를 했더니 뜻밖에 그곳 직원인 송정구씨가 무료로 제작해 주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단독 기업의 사장이 되신 송정구씨에게 그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답니다. 이해랑 선생 연출은 이렇게 해서 더욱 돋보이게 됐지요.

: 현대적인 조명기가 태부족이던 시절의 비사가 많군요. 국립극장 이외의 단체 공연에도 참여 하였지요?

: 지금도 여건이 퍽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조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워낙 적어서 다른 단체의 작업에도 많이 참가했습니다. 신협의 공연인 「갈매기떼」(1963. 6)와 「학 외다리로 서다」에서는 무대 위의 조명기 바톤이 떨어지려는 것을 4층 조명실에서 발견하고 단숨에 뛰어 내려가 막을 내리고 무사히 고친 일도 있습니다. 만약 그대로 두엇더라면 공연하던 몇명의 배우가 사망하고나 크게 다쳤을 겁니다. 배우들이 무심결에 조명기 바톤줄을 만진 것이 원이이었지요. 「햄릿」공연 때는 조명을 해주려 드라마센터에 올라갔는데 유치진 선생께서 저더러 배우가 되라고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70년대 이후의 활동

: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70년대부터 이우영씨의 조명가로서의 활약은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잇습니다. 기억나는 점들을 더듬어 주시지요.

: 같이 작업하던 구길웅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연하의 동료였고 무척 열심히 작업을 했었는데 이미 작고하였습니다. 현재 대구문화회관의 조명담당인 구용복은 그의 아우입니다. 당시의 작품으로는 국립극단의 「포로들」(1972. 5)과 국립무용단의 「별의 전설」(1973. 11), 자유극장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1970. 11)와 산울림의 「부정 병동」(1972. 3), 이대 강당에서 공연한 육완순 안무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1973. 4) 등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포로들」에서는 연출인 이기하 선생이 수용소의 분위기를 위해 철조망을 많이 보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실제로는 배우들이 움직이는 공간을 위해 철조망을 많이 칠 수 없었죠. 저는 철조망 하나를 쳐놓고 조명기를 다각도로 설치하여 그 실루엣에 의해 많이 보이도록 하여 충분한 효과를 내도록 했던 겁니다. 「별의 전설」에서는 선녀들이 목욕하는 계곡의 폭포가 문제였습니다. 당초에는 광목천을 내려드리워서 폭포처럼 보이고자 하였으나 물이 흘러내리는 효과가 나지 않았죠. 고심 끝에 나이론 천을 대신 걸고 구름 조명기 3대를 거꾸로 설치하여 비추어 보았더니 영락없이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서는 최연호 선생이 파이프를 구부려서 장치를 했는데, 아시는 대로 그 작품의 공간은 다양한 장면으로 활용되지 않습니까. 저는 파이프에 비치는 색깔의 변화와 빛의 각도를 통해 장면의 변화와 극중의 분위기를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혼자 밤을 새웠습니다. 처음으로 옆관을 사용하였고 인물에는 톱라이트를 쓰는 등 부분 조명을 잘 활용하여 효과를 냈습니다. 「부정병동」에서는 정신병자들의 심리를 조명을 통해 나타내기 위해 특별히 색지를 제작해서 다양하게 활용했지요. 준비를 다 해놓고 첫무대를 올리려는데 제 처가 갑자기 담석증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연출가 임영웅 선생은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면서 저더러 병원으로 달려가도록 허용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은혜를 잊지 않고 아내와 함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는 예수가 매 맞는 횟수에 맞추어 48대의 톱 라이트네 차례로 불이 켜지도록 한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 「국립극장 신축 이전 20년사」라는 책을 보니까 1973년도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극장, 소극장의 무대기계, 무대조명, 음향설비, 영사설비, 특수효과장비, 의상, 소품, 장신구, 이동장비, 무대시설 보충장비 등이 꾸준히 현대적으로 정비되어 온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설비와 운영에 이우영씨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소중한 분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 현재 국립극장의 설비는 대체로 만족할 만한 수준입니다. 금년에도 첨단 음향장비가 보강될 예정입니다. 예산의 어려움은 어느 부서나 다 겪고 있지만 극장예술진흥에 앞으로 정부나 기업의 배려가 많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도 돈이지만 앞으로의 더 큰 문제는 인재를 키우는 일입니다.

: 동감입니다. 우리 시민들의 무대예술가에 대한 전문가 대접과 그들의 실력 향상이 아쉽습니다.

조명예술가 양성의 길

: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민속예술단의 조명감독과 이듬해 일본 무대조명가협회 세미나 참석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매해 한두 차례 외국의 우수시설과 기술을 참관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때마다 무대예술분야의 교육과정, 인재양성 및 사회적 우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저 자신은 1973년에 국민훈장(목련장)까지 받았습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조명계의 현실을 돌아 볼 때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군요.

: 인재 양성을 위해 현재는 어떤 노력을 하시고 또 앞으로의 방향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국립극장 무대과에는 김인철씨를 비롯하여 유능한 제 후배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기대가 큽니다. 현재 국립극장의 대관공연에서는 조명플랜을 개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자체 공연에서도 가능한 대로 외부 전문가의 플랜을 수용할 작정입니다. 저 자신은 간단한 조명교재를 만들어서 기회가 닿는 대로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루빨리 전문교육기관에서 조명교육을 정규화, 체계화 시키는 과제가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미 결성된 한국조명가협회가 조명예술의 발전을 위해 제 구실을 해 주어야겠지요. 현재 전국의 여러 글장에서 종사하는 조명가들은 대체로 격무와 과로에 지쳐 있습니다. 작업의 성격에 따라 격일제 근무와 작품별 근무를 해야 제 기능과 수준 향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부문에서 앞으로 저도 노력하고자 합니다.

: 훌륭한 조명예술가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 우리가 공기의 중요성을 망각하듯이 빛이 너무 가깝게 있기 때문에 빛의 중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대예술에 빛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가. 조명예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조명의 4대 요소는 시각, 사실, 표현, 심미입니다. 이 4대 요소를 살리기 위해 과학적인 기술의 습득과 예술적인 발견도 물론 중요하지만은 거기에 덧붙여서 원작품의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가령 희곡, 무보(舞譜), 악보(뮤지컬, 오페라 등) 같은 것을 조명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조명이 무엇을 기여해야 하는지를 깊이 탐구하면서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오늘 장시간의 말씀 참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국립극장 무대과나 이우영씨 개인에게도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