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산책

「펄프 픽션」

-관습을 뛰어넘는 시간의 놀이




육상효 / 비디오평론가

영화는 시간의 놀이이다. 현실의 시간은 영화 속에서 멈추고, 흐름을 빨리 하다가, 거꾸로 돌기도 하고, 그 가장 본질적 성격인 연속성이 무시되기도 한다. 커트로 연결되는 공간들도 실은 그 영화적 시간성의 조작에 의해서 제기되는 것이니만큼 시간적인 공간인 것이다. 시간의 논리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공간은 영화적 시간의 논리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하이눈」이나 「로프」같이 현실의 시간 Real Time과 영화의 시간 Screen Time이 동일한 영화가 실험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외 대부분의 영화처럼 영화 속의 시간이 현실의 시간을 확장시키는 영화들도 있다.

이러한 영화의 시간성은 1백 년을 맞는 영화의 역사에서 관습적 원칙들을 가지고 관객에게 전달돼 왔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그 안의 시간성을 유추해 내는데 아주 익숙하다. 커트와 단절적인 편집들이 사간의 연속성을 무너뜨리고 영화적 시간을 비약시킨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플래쉬 맥 장면의 시간이 과거에 속해 있다는 것도 평범한 관객이면 아주 쉽게 눈치챈다. 또한 어느 장면들이 등장 인물이 꿈꾸는 미래의 장면들이라는 것도 알아내기 어렵지 않고, 점프 컷 Jump Cut과 같이 한 특정 상황에서의 돌발적인 시간의 단절도 하나의 영화적 테크닉으로 이해하는 관객도 많다. 영화의 제약과 그 수용의 역사는 이렇듯 영화속 시간의 속성들을 아주 익숙한 관습으로 만들어 온 것이다. 같은 세기의 초반에서 「대열차강도」를 보면서 그 병치의 몽타쥬가 왜곡하는 시간의 논리에 대해 경악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펄프 픽션」은 이러한 영화적 시간의 문제를 원점으로 놓고 다시 출발한다. 그것은 수많은 경험으로 익숙해진 영화적 시간의 관습들은 없다라는 전제하에서 하나의 영화적 시간을 구성하고 있다. 자, 우리는 이제부터 영화가 시간을 이렇게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보자. 그 결과가 당신이 충실하게 간직한 관습들을 너무 크게 뛰어넘어 당신을 혼란에만 빠뜨린다면 영화는 실패일 것이요, 새롭고 지금까지의 관습들보다 효율적이라고도 생각되고, 그래서 우리의 영화적 관습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면 성공일 것이다라고 감독은 말하는 것 같다. 그 결과는 '영화는 결국 시간의 놀이'라는 근원적인 정의로 향해 있다.

「펄프 픽션」은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중 강도를 결심하는 연인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들이 포크와 나이프를 대신 총을 들고 돈을 내라 소리 치면서 이 장면은 일단 끝난다. 그리고 전혀 이 사건과 연관이 없는 듯한 새로운 사건이 새로운 배우들로 새로운 공간에서 펼쳐진다. 그 두 에피소드 사이에는 아무 연관도 없고, 그래서 혹시는 잘못 편집된 필름을 보고 있는 것도 같다. 새로 시작된 사건은 보스의 애인을, 보스가 없는 사이 돌봐주는 어느 건달의 이야기이다. 보스의 애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 주인공인 듯한 남자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리고 약물쇼크로 죽어가는 여자를 간신히 살려 놓고 한숨을 쉬면서 이 에피소드는 끝난다.

이어지는 새로운 이야기는 도박복싱을 하는 한 복싱 선수의 이야기이다.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전혀 새로운 배우가 등장해 도박꾼의 지시대로 경기를 져주지 않고 이겨버리고 도망간다. 전 이야기와 연관이 있다면 전 이야기에 나왔던 암흑가 보스가 이 복싱도박에 개입하고 있고, 선수의 돌연한 변절로 크게 손해를 보았고, 그래서 그에게 복수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 팬틴 타란티노는 이 이야기의 연속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전혀 다른 배우들로 전혀 다른 예기를 진행하던 관객은 이 세 번째 이야기의 중간에 두 번째 이야기에 주인공처럼 등장시켰던 존 트라볼타를 단역으로 잠깐 등장시키고, 그것도 복싱선수가 쏜 총에 맞아 죽게 만든다. 관객은 혼란된다. 영화 중간에 주인공의 죽음을 맞이하는 관객은 이 낯선 내러티브 경험에 당황한다. 세상에 주인공이 죽다니.

그러나 주인공은 다시 나온다. 물론 '죽은 줄 알았던 주인공이 알고 보니 경상이라 다시 살아난 건 아니다. 영화는 주인공(이 역을 맡은 존 트라볼타가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니다. 어차피 이 영화는 주인공 따위의 상투적인 용어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다만 이 글에서는 글의 효율성을 위해 존 트라볼타가 맡은 역을 주인공으로 표기하기로 한다)이 죽기 전의 이야기로 뜬금없이 돌아간다. 시체를 실은 그와 그의 친구는 그 처리에 고심하다 친구 집으로 가서 곡절 끝에 처리한다. 그리고 둘은 레스토랑에 간다. 여유있게 식사를 할 즈음 갑자기 옆자리의 남녀가 총을 빼들고 일어난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총을 빼들고 일어났던 사람들이다.

시간적으로 따지면 이 영화는 시간적으로 A-B-C-D-E의 흐름인 사건을 D-A-E-B-C로 배열해 놓았다. 그러나 단순히 배열의 바꿈 그 이상이다. 그 시간적 전동의 관습적 기호들인 플래쉬 백은 전혀 배제돼 있고, 사건과 인물들은 단일한 구조 내에 있지 않다. 또한 사건들이 잘 구분되게 끊겨 있지도 않다. D는 C속에 있는 일부분이고, A와 E 또한 동시발생적이기도 하다. 감독은 영화 속에 시간의 미로를 교묘히 설치해 놓고, 관객에게 끊임없는 추리로 그 미로를 빠져 나가기를 요구하고 있다. 관객이 그 미로탈출이라는 숙제를 거의 풀 때쯤 오히려 관객의 머리 속에 드는 것은 영화적 시간의 관습들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이다. 그것은 이렇게 해도 말이 안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순진한 발견일 수도 있고, 익숙한 관습의 힘이 살상은 얼마나 예술적 표현에 장애로 작용하는가 하는 미학적인 것일 수도 있다.

팬틴 타란티노는 감독의 재능은 이러한 형식적 실험이 결코 오만한 전위예술의 권위주의로 빠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의 실험은 너무나 대중적이라 값싸 보이기까지 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행해진다. 그래서 관객은 이 실험을 흥미있게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의미로 속에서 그 이야기들은 감독의 백과사전 같은 영화적 지식들에 의해서 헐리우드 장르, 영화들에 대한 폭넓은 야유와 풍자로 이어진다. 존 트라볼타가 여자와 춤추는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그와 함께 70년대를 풍미했던 「그리스」류의 달콤한 댄스 멜로드라마를 연상하지만 그 환상은 에피소드 끝 여자의 미친 듯한 발작에 의해서 깨어진다. 브루스 윌리스가 나오는 에피소드는 갱스타 무비나 뒷골목을 다룬 장르 영화들을 연상시키지만 역시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그 기대를 철저히 무너뜨려 버린다. 감독은 관객의 영화적 관습 혹은 지식들과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게임은 아주 가벼운 행보 속에 이루어져서 비로소 관객은 유쾌하다. 이렇게 해서 한 편의 영화에 대한 영화는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