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우리 영화

연극적인 코미디 「남자는 괴로워」




오정국 / 문화일보 기자

이명세 감독의 「남자는 괴로워」는 코미디물이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코미디와 다른 점이 있다.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말장난'식의 저급한 코미디가 아니라 모든 상황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다분히 '연극적인 코미디'이다. 영화를 보는 것이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따라서 현실적인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분명히 요즘 샐러리맨들의 애환을 그림 작품이야기'로 비쳐진다. 배우들의 발이 사무실 바닥에서 몇 뼘쯤 떠 있는 것 같다.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바로 이 영화가 기존의 코미디물과 대별되는 특징이다.

이 작품은 블랙코미디다 하이 코미디라고 볼 수도 있다. 국내 코미디 영화의 장르를 보다 다양하게 확산시키려 했던 감독의 의도가 잘 살려져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숨이 막히도록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첫사랑」등으로 그 이름이 알려진 이명세 감독의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그는 리얼리즘 영화만이 예술영화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한국 영화계의 풍토에 일찌감치 반기를 들고 페이소스가 넘치는 코미디 연출로 그 재능을 인정받는 사람. 이번 작품에서도 발이 빠르고 손이 빠르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스피디한 사건 전개에 관객들은 넋을 잃는다. 여기에다 시종 몸으로 때워가는 배우들의 연기는 관객들을 포복절도케 한다. 작품의 주요 무대는 전자회사 신제품 개발부, 특히 하게도 이 영화는 배우의 이름을 영화에서도 그대로 사용하는데, 과장 승진 5년 동안 아이디어라곤 한 번도 제출해 보지 못했던 만년과장 안성기, 신세대 신입사원으로 여자와의 키스도 엄마에게 물어봐야 하는 구제불능의 마마보이 박상민, 직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아 고속승진 중이지만은 못말리는 의처증 환자인 송영창, 10년 동안 대리 자리를 고수한 떠벌이 최종원, 부하들 들볶는 재미로 회상에 출근하는 부장 윤주상, 그리고 바보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 가장 똑똑한 여자 김혜수.

이들 배우들이 대거 등장, 회사 사무실에서 만들어 가는 하루하루의 삶은 해프닝의 연속이다.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졸면서 운전을 하던 안성기 과장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이 영화는 안과장이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와 그만 과로사한다는 게 기둥줄거리. 해프닝 같은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꼬리를 물고 펼쳐져 관객들은 한눈을 팔 틈이 없다. 시종 폭소탄이 터진다. 그러나 안과장의 과로사 부분에 이르면 분명히 관객들이 숙연해져야 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문성근과 이경영이 특별 출연한 몸으로 장의사 역을 해낸다. 관객들은 웃는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들은 '아. 이거 당했구나'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때서야 짙은 페이소스가 밀려오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우리사회의 숨가쁘게 치열한 현실을 가장한 연극적이고도 희극적으로 표현해낸 '음흉하기 그지없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라고 생각된다.

이두용 감독이 「뽕」이후 3년만에 내놓은 「위대한 헌터 Q」는 실제 총잡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그야말로 '본격적인 킬러 영화'라는 점에서 화제거리다. 세계 10대 전문 사냥꾼으로 꼽히는 재일교포 신기식씨(43)가 살인 청부업자 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한다. 40여 종의 총기를 다루는 신씨는 헌터 경력 25년의 전문 사냥꾼으로 지난해 9월 알래스카에서 곰과 사자를 잡는 모습이 MBC-TV 「뉴스 데스크」에 방영되면서 국내에 알려진 인물. 배우로선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연기가 서툴고 말투 또한 어눌해 살인전문가의 캐릭터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그러나 스토리의 구조가 흥미롭고 감독의 노련한 연출력에 힘입어 '우리에게도 전문 킬러 영화가 가능하다'는 걸 입증해 보였다. 러시아의 카지노 개발권을 둘러싸고 한국의 카지노왕과 일본 야쿠자 간의 암투를 그린 영화로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손에 땀을 뒤는 긴장과 스릴 속으로 빠져든다. 알래스카에서 일본 야쿠자의 보스를 저격하라는 밀명을 띠고 한국으로 잠입한 살인 청부업자가 끝내는 일본 야쿠자 보스와 한국의 카지노 조직 총수를 모두 제거해 버린다는 줄거리. 한국측 범죄조직 요원으로 오랜만에 강리나가 출연. 전문 킬러의 안내원이자 애정 상대역으로 호흡을 맞춘다. 강리나의 육감적인 몸매와 섹스신. 알래스카 설원 등이 볼거리로 작용한다.

우림영화사의 창립 작품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이현승 감독)는 멜로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 영화같기도 하고 사회극처럼 생각되기도 하며 오늘날의 '광고시장과 그 속의 인간들'을 해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묘한 작품이다 생각할 거리가 많다.

한마디로 영화가 선명하지 못하다는 얘기다.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가 무거워진다. 상민리란 한 여성(채시라 扮)이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로 입사하면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그녀는 여기서 유능한 여성간부 서지훤 부장(양금석 扮)과 CF감독 김규환(문성근 扮)을 만난다. 그는 일에 대해선 전투적이지만 주위 사람이나 사회 현상에 대해서는 소름끼치리만큼 냉소적인 인물이다.

소극적이고 수줍은 성격의 상민은 직장에서 성차별을 당하기도 하지만 일에 부딪히면서 차츰 능력도 인정받는다. 물론 여기엔 서지훤 부장의 배려가 많이 작용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프로젝트가 맡겨지고 그녀는 김규환과 공동작업을 해나간다. 이들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물살이 흐르기 시작하는데, CF 촬영 관계로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조우하게 된다. 여기서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김규환은 아프리카에서 잠적을 하고 만다. 오로지 CF에만 매달려온 자신을 증발시켜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꽃 CF…… 여기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오늘날의 CF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따라서 영화는 무거워진다. 그리고 군데군데 끼워진 80년대 학생 시위의 모습, 분신자살 장면, 르완다 난민들의 모습 등은 영화의 주제를 자꾸 헷갈리게 한다. 특히 분신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김규환의 모습과 유능한 CF 감독이지만 CF의 속성에 대해 끝내는 절망하는 모습은 간단한 얘기거리나 에피소드가 아니다.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하나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이런 대목은 영화 전편의 흐름을 방해한다.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서울로 돌아온 상민은 회사와의 마찰을 무릅쓰고 미혼녀의 몸으로 김규환의 아이를 낳아 회사에서 탁아방까지 얻어내며 자신의 삶을 일구어나간다. 그러는 동안 김규환은 모래 서울로 돌아왔고 쓰레기 더미에서 폐인처럼 죽어 있는 김규환의 모습이 화면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리고 상민은 아기를 안고 혼자 자신의 길을 간다.

연예계 형기생활 10년 만에 스크린에 그 얼굴을 드러낸 채시라의 연기는 섬세했다. 반면 거만하고 냉소적인 CF 감독 역의 문성근, 그의 그런 연기를 어디선가 자꾸만 본 듯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바로 「경마장 가는 길」의 주인공 'R'의 연기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김규환이란 독특한 캐릭터를 창출해 내는데 실패한 게 아닌가 싶었다. 제작부장 서지훤 역의 양금석은 능력이 뛰어나고 주관이 뚜렷한 케리어우먼으로 그 케릭터가 선명하게 살아있다. 그러나 이 캐릭터는 양금석이 종전의 작품들을 통해 보여준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지훤이란 인물에 적격의 배우를 캐스팅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양금석이란 연기자 개인을 두고 보면 이른바 '변신의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영화는 현대인의 숨가쁜 일상처럼 스피디하게 전개되고 화면의 색상도 아름답다. 연기자들의 연기도 잘 다듬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아쉽다면, 말하고자 하는 방향을 좀 더 선명하게 더듬었더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