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하는 사람들. 2

세계 무대로 뻗는 창작 춤의 방향제시

-무용가 배정혜 I




김영태 / 시인. 무용평론가

8세 때 무대에 선 신동(神童)

배정혜(본명 배숙자)는 다섯 살 때(1949년)장추화 무용연구소에 최연소자로 입소해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배정혜가 원주 군인극장(1952년 6월, 박성옥 안무) 무대에 선 것은 8세 때(1952년)였다. 그때 찬조 출연한 무용가가 김미화, 김민숙, 최희선이었다. 「노들 강변」,「전우의 시체」,「초립동」이 레퍼토리였고, 무용극「백결선생」에서 배정혜의 역은 학이었다. 이 공연은 같은 해 7월,「배숙자 무용 공연」이란 제명으로 충주, 청주를 순회 공연했었다.

1953년 배정혜는 종로초등학교 3학년생으로 김백봉 무용연구소에 다녔고, 1954년에는 1회 전국무용콩쿠르에서「승무」를 추어 1등에 입상했다.

배정혜가 12세 나이에 큰 극장(시공관)에서 1회 무용발표회를 가진 것(한국소년운동자연맹 주최, 조선일보. 경향신문 후원)은 1955년인데 「황진이」,「농촌풍경」,「남아의 의지」에는 이숙향이 출연했고,「참새 춤」,「통일기원」,「부채춤」,「미개인의 형태」,「가면무」,「장구춤」은 배정혜의 솔로였다. 안무는 최현. 조광, 무대미술 임명선, 의상은 노라노가 맡았으며 특별 찬조출연은 조광, 권려성 무용연구소 단원들이었다. 그 당시로서도 특기할만한 사건이었다.

'장추화, 조광, 김백봉 제씨들의 지도 밑에 무용을 전공했다는 바 그 앙징스럽고, 간드러진 춤은 만장의 관객을 도취시키고 ......' 1955년 4월 10일자 중앙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시공관 공연을 마치고 배정혜는 여세를 몰아 전주, 광주, 목포, 군산, 대전, 진해, 진주, 부산, 수원, 춘천 등 1년간 전국을 순회공연했다. 배정혜는 그 당시 일본에서 귀국한 조광에게 발레를, 최현에게 한국춤을 배웠고, 최희선, 신영자 등과 자주 무대에 출연했다. 배정혜가 춤의 길을 걸었을 때 그에게 영향을 준 후견인들 중에는 배명균을 꼽을 수 있다. 배명균은 첫 발표회를 기획했고, 2회 공연 때부터는 안무도 맡았다. 김성업은 이사도라 던컨, 마리뷔그만 등의 춤을 신문 문화면에 기고한 당시 인텔리로 배정혜의 후원자였다.

중앙여중으로 진학한 배정혜는 16세 때2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는데(1958년 시공관, 한국, 조선, 서울신문 후원) 강석(姜汐)이 찬조 출연했고, 레퍼토리는 다음과 같다.「천국과 지옥」(안무 배명균, 관음보살 역 배정혜, 그밖에 지옥의 여자 이숙향, 화신(火神)박미리, 불꽃 오영애 외).「성냥파는 소녀」(안무 조광, 성냥파는 소녀 역 배정혜, 눈의 精강석).

그밖에도 배정혜는 소품으로 「풀잎」,「원시림」,「춘수(春愁)」,「탈춤」솔로를 추었으며,「장장추야」,「녹두도령」(최명옥), 창작발레 「사냥꾼」(안무. 출연 강석) 등에 출연했다.「성냥파는 소녀」는 안데르센 동화를 조광이 2인무로 안무했던 작품이다. 「천국과 지옥」은 「승무」를 현대적인 해석으로, 강강수월래가 주제인「갯마을 처녀들의 죽음」(2막 3장)은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극무용이었다. 서울신문은 「현대적 감각의 민족무용」이란 제목으로 2회 공연을 소개했다.

'시공관에서 대성황 속에 베풀어진 배숙자 2회 무용발표회에서의 배양의 「포즈」,「천국과 지옥」이란 타이틀이 붙은 이 춤은 우리의 민족무용인 「승무」와「수건춤」을 현대적인 감각과 극적 이미지로 되살린 새로운 시도의 하나였다.....,'

배정혜는 같은 해 한국관광공사 초청(공보실 후원)으로 지금은 불타버린 원각사(圓覺寺)에서 특별공연을 가졌으며,1959년에는 「불새」(스트라빈스키 곡),「풀잎」,「북춤」(숙대 강당)을 10월에는 조광 귀국 발표회 「세레나데」등에 출연했다(이대 강당). 1960년 재일 교포 거류민단 초청으로 배정혜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나고야, 오사카 등지를 6개월간 순회 공연했다.

숙대 졸업 전 창작무용 발표회

숙대 국문과 졸업반 때 배정혜는 3회 창작무용발표회(명동 국립극장)를 가졌다. 당시 입장료는 3백 원, 이대 무용과 졸업생인 정은수를 위시해 중앙여고 재학생 박희진, 윤문숙 등이 출연했는데 지금까지 무용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역은 한 명도 없다.

1부「고궁의 오후」,「가랑잎」,「선선(扇仙)과 「광검(光劒)」은 군무였고, 배정혜는 솔로 두 작품 「송도의 시정」,「백팔염주」를 춤추었다.

2부는 3인무 「청산별곡」,「흐르는 거리에서」그리고 배정혜가 군무「버들피리」에 합세했으며 「혼령」,「주마등(走馬燈)」솔로를 추었다. 배명균 암무. 배정혜 구성(이때부터 배정혜는 안무 감각의 시야를 넓혀 나갔으며 20대 초반 큰 무대를 밟았던 그는 리을 무용단의 산파역을 거쳐 국립국악원 무용단, 서울시립무용단의 대식구를 거느린 한국 무용계의 대모가 된다), 음악의 성금연, 창에 김규희. 묵계월의 스태프진이 눈길을 끈다. 같은 해 11월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공연 때 "춤과 벗하며 살아온 지 어느덧 20년......"이란 인사말은 그의 조숙함을 말해준다.

무용가 김백봉은 3회 배정혜 춤을 보고 '정중 동의 미'를 극찬했다. 1969년 신문 평란에는 배정혜의 춤을 가리켜 '율동과 가락, 선의 지고함'이라고 논평했다.

1969년 내가 무대에서 만난 배정혜 작품「가랑잎」은 여러 개의 가랑잎들 중에서 양손에 부채를 들고 춤추었던 마지막 가랑잎(배정혜)이 돋보였고, 그때부터 배정혜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육완순은 서울신문(1969년 12월 11일자)에 '배정혜의 창작무용 발표회는 퍽 이채롭다. 그의 춤은 깨끗하고, 섬세하며 독특한 멋이 든 춤이라고 하겠다. 공간 이용과 구성에 있어서 여유 있는 처리를 보였으며, 감정표현에 있어서도 예리한 묘사와 다채로움을 보였다. 배정혜가 오랫동안 연마해온 기교는 놀랄 만큼 정확하다. (중략)

한국무용과 현대감각의 하모니를 꾀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다. 자칫하면 우리 고유의 멋을 잃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혁신도 필요하지만 표현하려는 주제의 빈곤이 더욱 문제라고 본다. 이번 춤 안무에 있어서 좀더 욕심을 부려 본다면 심오한 예술성의 구현이 아쉬웠다. 표현 형식에 있어서도 다이내믹한 이미지의 창조를 위한 이른바 감정의 클라이맥스로 도달하는 움직임의 연속성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동작의 트랜지션에 있어서도 더욱 충실을 기하여야 하겠으며 포메이션을 만들기 위한 무의미한 움직임은 피해야겠다'고 평을 썼다.

반면「신동아」에 무용 평을 기고하는 조동화는 창작무용이라는 어휘를 못마땅해했다.

'열두살 소녀 때부터 발표회를 가졌던 배숙자 양이.....(중략) 키의 성장만이 아니라 춤의 성년기로 접어든 여유와 저력 있는 공연은 양의 성장을 지켜보는 인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다.(중략) 한국 춤의 분위기와는 좀 이질감을 주는「가랑잎」과 같은 작품이 구상이 좋으면서 덕성 있는 공연이 되지 못하였던 것.(중략) 프로그램의 표제 창작무용 발표회라는 창작무용, 이 어휘는 아직 우리 춤의 용어가 통일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런 대로 현황의 관례 개념에 비춰볼 때 이상한 착각을 가져오게 한다. 쉽게 한국무용 정도가 어쨌을까도 생각하여 본다.'

육완순은 창작무용이란 어휘를 수긍하는 쪽이었고, 조동화는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이후 창무회 등의 춤이 그렇듯이 창작무용이란 명칭이 요즘에는 보편화된 추세지만.

박외선(朴外仙)은 배정혜 춤을 보고「70년대 무용계 전망」이란 글에서, '배정혜 양의 한국 춤은 민족의 정서와 사회적 풍습을 현대적인 수법으로 미화시켰으며, 그의 훈련된 움직임은 희망적이었다. 앞으로 우리나라 민속무용도 델리케이트한 내포적인 미를 살리는 데 그 사명이 있을 것이며, 고전 전통을 살리는 현대화라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 배정혜도 한국춤 현대화 작업에 대해 그의 소신을「무용한국」지에 피력했다.

'고전과 현대의 차이는 진실한 의미에서 그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닐까. (중략) 정확한 규제의 각도로 선율을 만들고 순서를 지정한다면 그때는 엄격한 각도와 순서를 갖춘 또 하나의 다른 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며, 한국 춤과는 저만큼 떨어진 다른 서열에 끼게 되는 것이다.(중략) 한국 춤의 현대화 작업에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성급한 형식의 시정보다는 옛 것을 참답게 수렴하고 느껴서 활용해야 한다. 오히려 일정한 테두리와 고집스러운 범주가 없기 때문에 광범위한 여타(우리 춤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가 풍부하며, 주제의 표현에 따라 춤의 다양한 변화를 시도할 수도 있다.'(「무용한국」1974년 12월호,「한국무용 현대화의 문제점」,P.84)

우리나라 한국 춤이 창작무용으로 춤사위나 표현의 체질개선을 시도한 것은 그러므로 1969년 배정혜 춤이 효시이다. 창무회 작업이 그 뒤로 이어졌다고 보아야한다.

한국 무용사에 남을「타고남은 재」

배정혜가 선화예술학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1년(배정혜는 뒤늦게 숙대 대학원에 적을 두었었다)「신로심불로」(리틀엔젤스 객원안무)를 공연한 이후이다. 1974년 대학원을 나와 선화예술학교 무용부장을 맡았고 1975년 선화무용발표(1회)를 주도했다. 그때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 안무 작품이「빙판」,「정원의 오후」,「농촌풍경」,「탈춤」 등이었다.「신로심불로」는 60년대 최현이 독무를 춤췄던 수작인데 (평론가 박용구는「신로심불로」보다 최현이 춤춘「문둥이」를 높이 평가했다) 배정혜의 객원 안무 역시 출중했었다. 배정혜가 뜻한 바 있어 다시 공부하는 자세로 한영숙에게「승무」,「살풀이」를 사사 받은 것은 1976년이다.「한국 춤 기본 훈련법」을 그는 창안했고, 실기에 원용했다. 이에 관한 연구논문도 발표했었다. 또 같은 해에 황재기, 이정범에게 농악을 사사 받았다.

배정혜의 춤 인생에 있어서 한국 무용사에 남을만한 걸작이 안무된 것은 1977년 4회 창작무용발표 때 「타고남은 재」였다. 배정혜는 그 해에「등심연곡」,「부채춤」,「검무」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안무했었고, 김천흥에게 「양주탈춤」과「춘행전」을 배웠다.「타고남은 재」말고 레퍼토로는 「심청의 노래」,그리고 소품「풀잎」등이었다.1977년 문화계 주역으로 부상된 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배정혜는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춤은 제가 살아 있다는 확인이나 같습니다.「타고남은 재」는 세 살 때부터 이제까지 춤추며 체험했던 모든 것을 쏟아 넣었다고 생각합니다."(경향신문 1977년 12월 26일자 인터뷰)

배정혜의 신작 「타고남은 재」는 평단에서도 '그 해의 최우수작'으로 지목되었다. 무한한 예술적 깊이가 춤에 담겨 있고, 앞으로 한국 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긍정적 반응이었다.

배정혜의 작품을 보고, 나는 두 가지 춤의 새로운 시도를 언급했었다. 첫째, 「심청의 노래」에서 김소희의 창을 끌어들여 춤과 소리의 이상적 만남을 제시한 것,「타고남은 재」(황병기 음악)에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적요(죽음),인간의 본능(색),내세의 황홀한 카타르시스의 체험이었다.

'배정혜 안무「타고남은 재」 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 명(瞑)의 세계, 태어나고 나서 사랑, 욕망, 질투, 소유욕과 경멸을 다룬 색(色)의 본능, 승무의 춤사위를 접목시킨 멸(滅)의 종장이 압권이다. 배정혜의 춤 세계(그가 강조한 우리 춤의 현대화 시도)는 그의 춤 입문의 이력을 떠나 정악 「수제천」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었고, 김소희가 부르는 「심청가」와 춤의 어우러짐은 별미였다'고 「심상」지에 썼다.(시 월간지 「심상」,「공연 리뷰」,1978년 1월호, 김영태)

「타고남은 재」는 1977년을 마무리하는 회심의 연작이었다. 평단의 반응이 그것을 입증했다.

'배정혜 안무「타고남은 재」는 한국 춤의 지평을 열어주는 한 가닥의 빛을 던져 주었다.(중략)홍신자의 「제례(祭禮)」가 드라마틱한 인간 격정의 육체적 수렴이라면 문일지의 「작법(作法)」이나 「승무」는 전통무용에 대한 학구적인 모색에서 얻어진 지적인 무대화 작업이었다. (중략)홍신자나 문일지와 비교할 때 배정혜는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돌파구를 찾고 춤의 지평을 열었다.

양식화는 배정혜에게 있어서는 개량 춤과의 갈등이었다.(중략)배정혜는 「타고남은 재」를 조곡(組曲)형식으로 꾸몄다. 어쩌면 4악장제의 교향곡으로 보아도 좋을지 모른다. 한 악장이 다시 3부 형식으로 나뉘는 제2장「타오르는 불길」은 판타스틱한 경지로 끌어올린 제1장과 아울러 역사의 장에 기록될만한 조형적인 밀도를 달성했다. 그것은 기교를 초극한 기교파만이 도달할 수 있는 배정혜만의 춤세계인지도 모른다. 지성만으로 될 수 없는 영감의 작동인지 모른다.(중략)

한국 춤의 지평을 여는 한 가닥 의 빛이 된「타고남은 재」로 배정혜는 주목할만한 무용가의 한사람이 되었다.'(「춤」1978년 1월호,「배정혜의 작품세계, 지평을 여는 한 가닥의 빛」, p.26, 박용구) '배정혜의 춤 1부「타고남은 재」는 우리 민족이 다듬어온 정밀(情密)하고 유현(幽玄)한 세계를 드높은 차원에서 구현하였고, 모든 애환이 표면적으로만 처리되던 이제까지의 춤에서 깊이 담기고 고여 그곳에서 은근하게 빚어져 스며 나오는 우리 춤의 참 멋을 맛볼 수 있게 하였다.(중략) 「타고남은 재」에서 우리는 추리 춤의 신기원을 이룩한 또 하나의 위업을 볼 수 있었다. (중략) 「타고남은 재」에서 기백을 뼈대로 하면서도 흥과 멋을 훌륭히 살려낸 남성 무를 개발해서 보여준 것은 참으로 치하할 만 한 일이며, 우리 춤의 기품을 다시 되찾아 주었다는 점이다.(중략)

마지막 장면에서 라이트를 페이드 아웃 시키고 엷게 명멸하는 박명 속에서 너울거리는 승무로 막이 내리게 한 수법은 무대의 향기와 차원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다.(중략) 「타고남은 재」는 새로운 불꽃이 피어나는 우리 춤의 앞날을 길이 비쳐주는 서광의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춤」,1978년 1월호,「어둠 속을 비치는 새로운 불빛」, p.31, 이순열)

'배정혜의 작품「타고남은 재」는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우리 춤을 높은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놀랍고도 영감 적인 춤이었다. 돌파구를 찾아 헤매던 신 무용 50년이래 배정혜의 춤 시도는 정통을 찌른 1977년도 우수작의 개가라 할 수 있다.(중략) 문일지의 춤이 우리 춤 원형의 의미를 분석하여 논리적으로 합리화시키는 이른바 원형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학구적인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배정혜도 원형을 재해석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원형에 대한 객관화가 아닌 자기 주관을 강하게 투입시켜 또 다른 하나의 원형을 만들고 있다.(중략) 배정혜의 춤은 영적이고 천성적이라 할 수 있다.' (「춤」,1978년 1월호,「차원을 달리한 배정혜의 영감적인 춤」, 정병호)

조동화는 「신동아」(1978년 10월호)무용칼럼에 춤 세대교체라는 글에서 '세대교체는 부르짖는 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혀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홍신자나 배정혜 등과 같은 말없이 정말 자기 힘의 실체를 보여주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썼었다.

'눈 내리던 12월 1일 국립극장에서의 배정혜 무용공연은 우리무용의 이런저런 상황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한 뜻있는 것이어서 기억할 만하다. 그것은 황병기 작곡에 의한 「타고남은 재」라는 작품의 안무법과 춤 광경이었다. 한마디로 그 춤에서 우리는 우리 춤의 새 세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감격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중략) 배정혜는 춤사위 하나하나를 결코 허투르게 다루지 않는다. 깊이 파 내려가 그 춤사위의 감정의 본체적 바닥을 찾아낸다. 그리고 운동속도에 따라 언어성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중략) 이제껏 우리가 한국무용에서 감히 접해보지 못한 그러한 진실과 아름다움의 의미가 무엇이었던가를 재음미하게 된다. (중략)

배정혜의 예술은 멋의 차원이 아닌 방법론에 서 있다. 이것은 한국 춤 고전미학에 대한 도전 같으면서도 차라리 보완. 발전시키는 새 해석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신동아」,1978년 1월호,「우리 世紀」, 조동화)

배정혜는 1977년 한 해를 결산하는 문화계 인물(중앙일보 12월 14일자)로 음악가 강석희. 박민종 등과 같이 주목받는 무용인으로 선정되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