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현장을 찾아서

남원의 전통 목기장(木器匠)

-전북 무형문화재 11호, 고원 김광열




이장섭 /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책임연구원

지리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로 나눠진다. 전남 구례에서 오르는 길, 섬진강 하류의 하동에서 따라 오르는 길, 그리고 남원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대표적이다. 남원에서 인월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다 보면 실상사라는 절을 만난다. 이 절은 평지에 자리한 고찰이라는 이유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옛날부터 이 절의 스님들이 '바리때'(절 집의 목재 식기)를 다른 어느 곳보다 잘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스님들의 바리때 만드는 일이 오늘의 남원 목기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도 몇몇 사람의 입에서 전해질뿐이다. 요즘은 절 집의 '바루공양'도 특정한 행사에만 국한되며, 그것조차 나무바리때 모양을 한 플라스틱 제품이 사용될 뿐, 그 외에는 일상용 식기나 단체식기로 대체된 상태이다.

엄밀히 말하면 남원목기는 인월목기라야 구색이 맞는다. 왜냐하면 현재는 남원시 조산동에서 성업중인 목기업의 뿌리가 사실은 이 인월(引月)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시대 이곳 산내국교 졸업생들이 기술중학교 목공과를 마치고 목기제작에 많이 종사하면서 목공업이 성업하였고, 그후 중심지가 조산동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남원에서 버스로 30여 분 달려 인월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리자, 멀리 눈 덮인 지리산 정상의 영롱함이 아침 햇살에 그 신비한 정기를 뿜고 있다. 한반도 남녘 3개도 8백 리를 내닫다 이곳에 우뚝 선 자태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의 심경을 자아낸다. 이 지리산골의 운봉리는 '운봉내기 징치고'라는 탈춤대사에서 보듯이 전래로 풍물의 하나인 징 생산지로 유명했다. 이곳에서 들리는 바로는 그 유명하던 징의 생산은 이제는 대가 끊어진 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전통적인 목기 생산은 현재도 이곳의 토산품으로 명성을 얻고 있으며 날로 번성일로에 있다.

지리산의 자연환경 요소와 함께 성장한 전통생업 중의 하나가 남원지방의 목기생산이다. 전통적으로 볼 때 남원지방의 목기는 지리산의 풍부한 산림에서 나오는 재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푸레나무, 박달나무, 고로쇠나무, 느릅나무, 산태나무, 노각나무 등 해발 천 미터 이상의 고산지에서 자생하는 나무들이 목기를 만드는데 쓰이는 주재료인데, 이는 다른 나무에 비해 그만큼 견고하기 때문이다. 지리산에서 산림의 벌채가 금해지고 국립공원으로 지정, 조성되면서, 목기의 재료인 이 나무들을 지리산에서 더 이상 구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방 전래의 목기 제조업은 오늘에 더욱 번성하고 있다. 목기업이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 먼저 뿌리를 내린 바로 이곳에서 다시 성업하게 된 것은 이곳 사람들만이 가지는 자부심은 아닐 것이다. 현재 목기 재료로 주로 쓰이는 물푸레나무는 충북 영동지방에서 대부분 들여오고, 일부는 강원도에서 충당된다. 다만 상(床)의 원료가 되는 외송과 합판 등의 재료는 수입나무를 사용하고 있다 한다.

목기장(木器匠:전북 무형문화재 11호)고원(高原) 김광열(金光熱)선생의 작업장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초입, 작은 산기슭에 자리잡은 인월농공단지의 중앙에 위치한다. 지리산 정상이 멀리서 아련히 보이고 이곳에서 차편으로 불과 10여 분이면 평지에 터잡은 실상사에 이른다. 김선생의 작업장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남원시 조산동이었으나, 1986년 이곳 인월의 농공단지로 이주했다. 정부의 농공산업 육성정책에 힘입어 전통목기 제작사업을 활발히 해보려던 그의 기대는 그 이후 농공단지 정책의 모순구조로 말미암아 여러 차례 부도 위기로까지 이어 졌으나 가까스로 극복했고 현재어느 정도 가내수공업적 단계를 벗어나 '성공'한 공장형태의 모습으로 정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선생의 회고는 지난 시절 우리 사회의 불행했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전통문화를 함께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 무력감이 앞선다. 남원 조산동에서 하던 가업을 이곳농공단지로 옮기면서 근 10여 년은 그야말로 고생길로 보낸 세월이었다. 그것도 정부의 모순된 정책시행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니, 그 고통을 감내하던 시절을 회고하시던 선생은 끝내 눈가가 붉어지셨다. 이농으로 쇠퇴해 가는 농촌을 사려보자는 정책의 하나로 시행된 농공산업 육성책은 말 그대로 농업지역에 적합한 공업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 육성함으로써 도시비대화의 농촌 공동화(空洞化)를 막아보자는 그럴싸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당시 남원군에서는 처음으로 설립된 이곳 인월농공단지에 정부의 지원금과 당시 가지고 있던 모든 자산을 털어 목공공장을 설립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시작되었는데, 가진 재산을 전부 공장 짓는데 투자하였으니 사업자금을 지원 받아야 했으나 농공산업진흥단의 사업자금 지원은 너무나 편파적이었다. '원리원칙대로 한 사람은' 사업자금을 지원 받지 못하였고, 소위 '위에 줄이 닿거나 빽있는 사람만'사업자금을 받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식으로 사업자금을 받은 사람들이 원래 정책대로 그 돈을 농공산업에 투자하지 않고 다른 곳에 투기하였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원리원칙대로 한 사람'은 대부분 부도로 파산하고 말았다. 지금 농공단지는 빈 공장 건물만이 즐비하고, 목공공장은 선생의 것과 그 이웃에 다른 하나가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흔히 전통장인의 생애가 그러하듯이. 목기장(木器匠)고원 김광열 선생도 온갖 어려움 속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오늘을 일궈낸 인물이다. 20세기 현대사를 거친 우리 중 어느 누가 파란만장하지 않을까마는, 목기장 고원 선생의 삶은 그가 우리 전통문화의 전수와 함께 해 왔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불과 몇 년 전 지방정부에서 전통공예기술을 인정하는 '목기장'이 라는 지정 장인(匠人)명칭을 부여하기까지 목기를 깎고 칠하던 그이 인생은 우리 역사가 걸어온 우여곡절과 같이 했다.

선생의 평생의 업인 목공일은 그가 생전에 보지 못한 할아버지 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할아버지 (金玉,자고)의 유업은 아버지(金元植,작고)에게 전수되었고, 선생은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와 세분의 형님 밑에서 목공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배우기 시작했던 이 일을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만두게 되었다. 그후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하니 부친은 이미 돌아가신 뒤 였고, 가업은 형님들이 이어받아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형님들과 함께 다시 일을 시작하였으나, 얼마 지내지 않아 장가를 들게 되었고, 그 이후 처가인 남원시 조산동에서 부채 만드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그의 목공일은 또다시 중단되었다. 조산동은 전래로 부채 만드는 일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이곳에서는 '외자리 (외자루)부채'와 '중암미부채'(자루를 두 개로 붙여 만든 부채)를 주로 만들어 왔다. 고원 선생은 이곳으로 장가들면서 그의 장인 정남근(작고)씨로부터 부채 만드는 기술을 익히게 되었고, 조산동에 정착하면서 부채 만드는 집의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성실하게 노력한 결과 땅(논)도 얼마간 장만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목기제작에 눈을 돌리게 된 시점은 정확히 1971년이다. 이 무렵 선풍기가 우리 사회에 보편화되면서 부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자 조산동 전래의 부채업은 점차 빛을 잃게 되었던 그런 시기였다. 때마침 선생의 친구 한 분이 '앞으로 목기가 괜찮다'며 전통목기 제작의 장래성을 설득력 있게 권유하기도 했다. 해서 그간 모은 재산을 모두 털어 한동안 손을 놓았던 목기업에 다시 손을 댄 것이 오늘날 남원시 조산동이 목기단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선생의 작업실은 인근 지리산 입구 인월농공단지로 10년 전에 떬겼고, 조산동에는 현재 스물대여섯 집에서 대부분 가내수공업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목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전통 목공예 기술은 여기서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간다.

목기는 크게 나무를 깎는 작업과 완성된 목기를 칠하는 작업을 거쳐 만들어진다. 전통적으로 목기 깎는 일은 다음의 몇 가지 공정 단계를 거친다. 우선 산에서 잘라온 나무를 대략 한 달 정도 그늘에서 자연건조 시킨다. 첫 번째 일은 '절동'이라 하여 잘 건조된 나무를 예정된 목기 정도의 크기로 자르는 작업을 일컫는다. 둘째, 잘라낸 나무토막을 대략의 그릇형태로 깎는 작업을 '초갈이'라한다. 셋째는 '재갈이'작업으로 완전한 그릇 모양이 되게끔 나무를 깍아내는데, 깎는 작업으로는 마지막 단계이다. 과거에는 이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뤄졌지만 현재는 완전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많은 부분에서 기계의 도움을 받아 작업과정이 분업화되어 있다. 절동이 전기톱으로 되는 것은 물론이다. 초갈이와 재갈이도 절동된 나무를 전기모터에 연결된 기계에 고정시키고, 이 기계를 돌게 하여 다양한 형태의 끌로 깎아내기에 생산력은 상당히 높다. 발로 돌리는 물레에 나무를 고정시켜 끌로 깎았던 예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라 말한다. 당시는 숙련공 한 사람이 한 달 걸려야 제기 1벌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재갈이에서 잘 깎여진 갖가지 모양의 목기에 도료를 바르는 칠 작업으로 드디어 작품이 완성된다. 전래의 도료는 오로지 '옻'밖에 없었으나 현재는 열대지방의 나무열매에서 추출된 '카슈'라는 도료를 주로 사용한다. 물론 이 새로운 오료는 약 30년 전 일본을 통해 수입하여 사용하게 된 것이며, 선생의 아버지대에는 옻칠밖에 없었다고 한다. 칠 작업은 한번 칠하고 하루 저녁 말린 후 가는 '뻬빠(샌드페이퍼)'로 닦아내는 방식으로 보통 종류에 따라 4∼5회 정도 반복한다. 처음 칠 작업인 '초칠'이후의 '뻬빠작업'을 '초시야기'라고 하는 것에서 보듯이 소위'뻬빠작업'은 일제시대 이후에 정착되었다.

고원 선생의 기억에 따르면 선생의 조부께선 목기를 좋게 못 만들었다고 하며 부친 대에 와서야 "좋은 기술을 왜놈들에게 배워 잘 만들었다"한다. 즉 전래의 방법으로 목기를 깎던 것은 그의 조부 대에서부터 서서히 사라지고 앞서 말한 기계화의 시도는 일제시대에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의 부친과 그 또래들은 일제시대 인월 산내국민학교를 마친 후 기술중학교의 목공과에서 기계식 나무깎는 기술을 익혔다. 이러한 경험은 깎여진 목기를 칠하는 작업에도 마찬가지의 영향을 미쳤고, 그 여파는 현재도 미치고 있음을 선생은 부인하지 않는다. 예컨대 지금도 '나전칠기협회'에서 일본인을 초청, 강의와 실기를 통하여 그들의 앞선 기술을 익힌다고 한다,"현재 우리는 일본 기술을 못 따라가고, 지금 볼 때 중국제품이 아버지 시절에 만든 것 같다"며 우리의 목기기술의 국제경쟁력의 수준을 짚어준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인 목기 제작 기술'전수의 길과 목기산업 육성의 방향이 어떤 관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간의 변화양상에서 어느 면이 현재 우리의 전통적인 양식인가 하는 것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옻칠의 경우 옻 오르는 사람에게는 금기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붓으로만 이뤄지기에 상당히 숙련된 기술이 요구된다. 목기가 대부분 둥근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번에 돌려 칠하는 일은 어지간한 경우 칠의 균질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옻칠은 '초칠'또는 '곡수'라고 하는 처음 칠과 그 다음 칠 작업인 '중매',그리고 마지막 칠인'상매'를 거쳐 마무리된다.

옻은 원래 원주지방에서 생산된 것을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중국 수입제품을 주로 사용한다. 가격이 1/4정도이기 때문이다. 원주지방에서 전래로 옻진을 만들어 오던 사람들은 이러한 중국산 수입 옻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지역 전통생업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어려움이 많다고 전하다. 우리 것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그러나 여타의 전통생업 방식이 그러하듯,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거나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전통성만이 강조될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생활방식과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어떠한 형태로 지속이 가능한가 하는 점에 대한 고려가 선결조건이 된다. 생활 조건의 합리화로 기계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국가간의 거리가 과거 이웃 마을처럼 좁아진 현대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하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낭만적인 향수만으로는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현재 널리 사용되는 '카슈'칠은 공정으로 보면 칠한다기보다 도료에 목기를 담궜다가 꺼내어 건조시켜 '뻬빠'로 닦고 이것을 다시 반복하는 식이다. 마무리 칠은 '후끼칠'(컴프레셔작업)로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세부적인 부분은 붓을 사용한다. 현재 선생의 작업실의 경우 나무 깎는 일은 남자들이 하고, 이 카슈칠은 여자들의 일로 분업화하여 능률을 올린다. 지금보다 더 기계화되고 전문적으로 분업화된 체계가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선생은 "가능은 하지만 수요가 문제"라는 것이다. 팔월 추석과 설 무렵의 성수기를 빼면 작업인원이 줄어드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기 때문이다. 갖가지 그릇모양으로 깎여진 목기는 칠 작업을 거쳐 완제품이 되고, 포장되어 상품화된다. 서울인사동의 중간 상인을 거쳐 유통을 시키거나 백화점에서 직접 주문 받아 생산하는 방식도 있다. 최근에는 농협을 통한 판매와 우체국을 통한 우편판매도 한다. 과거 보부상들이 등짐으로 지고 장을 돌거나, 절 집이나 대갓집을 찾아다니며 팔던 이야기는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절 집에서 스님들의 바루공양은 전통방식이다. 바루는 속세의 식기와 같고 나무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오늘날 나무로 만든 바루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쓰이지 않고, 큰절에서 대중을 위해 가지고 있는 바루도 외형상 전래 바루의 모양을 닮은 플라스틱 제품이 애용된다. 그것이 여러모로 편리하기 때문이다. 세속의 목기도 원래는 절 집의 바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일상용으로써의 가치는 산간지방에 한정되었고 그 외에는 대부분 의례용, 특히 제기(祭器)로써의 용도가 일반적이었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일반적이었는지 그 근거는 다른 민속의 존재양상과 마찬가지로 그리 명확하지 않다.

목기가 일상적인 도구가 아니었음은 우리의 전통식기 사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의 경우 하절기인 단오에서 추석까지는 자기(백자)그릇을 사용했고, 겨울용 그릇인 유기는 추석 전 닦아서 동절기동안 사용했다. 앞서 고원 선생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듯이, 일제 시대 인월의 기술중학교 목공과를 거친 그의 선대들이 일본인에게 목공기술을 익힌 것은 일본문화에 목기가 일반적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40여 년에 걸친 일제 식민지 강점이 우리 문화에 어디까지 영향을 주었는가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최근에 와서 이 전통목기에 우리의 관심이 모아지는 현상은 우리사회에서 문화변화 과정의 한 면모를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제기용 목기를 위시하여 전통상(床)의 종류를 눈여겨보면, 과거에는 아무나 가질 수 없었던 그러한 종류의 물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과거에는 상류계층을 형성하였던 양반층만이 그것의 소유가 가능했던 것이다. 남원지방에서 생산되는 전통상의 종류가 그것을 대변한다. 여러 종류의 교자상이며 원형과 팔각형 등 다양한 모양을 한 차상이 과거에는 민간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그런 것이었다. 즉 모두가 양반의 후손인 오늘날 과거 양반 물건이 보편화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거니와, 이러한 변화과정에서 우리가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시대의 변화가 과거 특수한 계층의 문화요소를 다수사람들의 그것으로 정착시키는 모습이다. 이 현상은 단순히 복고 지향적인 사람들의 관심거리로만 치부할 수 없는 문화적 과정의 한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