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복, 무대의상의 현대적 개척자
- 먼저 연극을 많이 보아야 합니다
서연호 / 고려대 교수 연극평론가
'여인소극장'에서 연극 수업
서: 문화예술지의 대담 기획을 통해서 오늘 이병복(李秉福) 선생님의 귀한 말씀을 듣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1966년 이후 오늘날까지 선생님이 대표로 계시는 자유극장의 연극을 30여년 가까이 보아 온 저로서는 그간의 노고에 대하여 경의를 드리고 아울러 감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이: 해놓은 일도 없고, 별로 할말도 없는데..... 나는 이런 자리를 정말 거북스럽게 생각합니다.
서: 연극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이: 이화여대 영문과 시절이었습니다. 일제 말기에 이화여전 가사과에 입학하여 1년을 다닌 후에 광복을 맞았는데, 이화여대로 개편되고 나서는 가사과 2학년을 계속해서 다닌 것이 아니라 영문학과로 새로 입학하여 1948년도에 졸업을 했습니다. 그 영문과 시절에 훌륭하신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통해 드라마에 눈을 뜨게 됐지요.
서: 당시 선생님들은 어떤 분들이었나요?
이: 김갑순 선생님, 박노경 선생님, 장영숙 선생님 등이 가르쳐 주셨죠,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유명한 서양 극작가들의 작품을 두루 배웠습니다.4학년 때에는 졸업작품을 공연하였는데 나도 출연했지요. 오스카 와일드의 「윈다미아 부인의 부채」(1892)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정지용 선생님에게는 영시를 배웠는데,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문설이(文雪伊)라는 예명도 지어주셨지요. 내가 연극을 좋아하니까「각설이타령」에서 '설이'라는 광대의 의미를 차용하신 거지요.
서: 대학 졸업 후에는 연극과 어떻게 관련을 맺게 됐습니까?
이: 바로 그 무렵에 여대 시절 연극반 지도교수이셨던 박노경(朴魯慶)선생님은 연극을 하기 위해 퇴직을 해서 여인소극장을 만드셨고, 나를 비롯한 우리 졸업생들은 젊은 동인으로서 극단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수업을 하게 된 겁니다. 박선생님은 극작가 오혜령씨의 모친이시고 6.25때 장독대에 장을 뜨러 나가셨다가 폭격에 맞아 타계하신 분으로 우리 연극계의 선각자이십니다.
서: 무대에 서신 경험을 좀 들려주십시오.
이: 여인소극장의 첫 작품은 입센의 「인형의 집」(1879)으로 오화섭 선생이 번역하고 박노경 선생의 연출로 1948년 12월에 공연되었습니다. 나는 그때 남편인 헬머 역을 했는데 성인극단의 첫 경험이었습니다. 노라 역은 월북한 친구가 맡았었고......여자들만의 극단이어서 배역에 애로가 많았습니다. 박선생님의 부군이신 오화섭 선생은 그때 고대 영문학과에 계셨는데 「인형의 집」을 하고 난 뒤 고려대를 졸업한 남자배우들을 극단에 들어오게 해서 남녀 배우의 조화가 맞도록 한 겁니다.
서: 부모님은 연극하시는 것을 이해해 주셨나요?
이: 반대하는 분위기였죠. 아버님 (李弘)은 경도제대를 다닌 분으로 연극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박노경 선생은 조도전대학을 다녀서 서로 유학생으로 알고 지낸 사이여서 아버지가 여인소극장을 물질적으로 후원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해야 할 딸이 연극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지만 나중에는 자가용차를 태워주시기도 하셨죠.
'의상의 세계'와 만나게 된 유학생활
서: 의상 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이: 6.25때 박노경 선생은 타계하시고 동인들은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져 극단활동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부산 피난지에서 함흥에서 월남한 남편 (權玉淵)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1952년에 첫 아이,1954년에 둘째 아이 낳고, 그림을 그리는 남편이 '한국의 피카소'같은 화가가 되어야 한다는 꿈, 생활고의 해결 등등으로 연극은 당분간 까맣게 잊었지요.1957년에 시어머니에게 두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부부가 파리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아이들을 키워주신 시어머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곳 파리에서 의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겁니다.
서: 유학생활을 좀 소개해 주시죠.
이: 한국식으로 저는 남편의 그림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파리에 간 겁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조각연구소에 가서 조각을 공부하고 또 의상연구소에 가서는 패션을 배우고 분주히 뛰어다닌 결과 의상에 대한 학위(디플로마)를 받기도 했습니다.1961년 귀국할 때 주머니에 단돈 20불이 남아 있었지요.
서: 선생님 부부 그리고 시어머님 모두 정말 대단한 분들이군요. 창조적인 가정의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귀국하신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이: 당장 생활이 문제였죠. 내가 귀국한 것을 안 파리 유학시절의 선후배들이 찾아와서 패션일 을 도와주기를 요청했고, 그 일을 거들다보니 차차 돈을 좀 모으게 됐습니다.
서: 자유극장은 어떻게 만드시게 됐습니까?
이: 차차 안정을 찾게 되니 다시 연극을 하고 싶은 의욕이 났습니다. 옛날 여인소극장 동인들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허사였죠. 유학시절에 알게 된 김정옥씨와 만나 극단을 조직하게 된 겁니다. 김정옥씨는 이전에 잠시 민중극장에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서: 창단공연인「따라지의 향연」이 기억납니다. 1966년 6월 명동 국립극장 무대였죠. 올해가 꼭 30주년 되는 해 군요.
이: 프랑스에는 장루이 바로와 마드랜느 르노가 힘을 모아서 만든 르노 바르도라는 극단과 극장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국가에서 인수해서 외국의 유명한 연극만을 초청해서 공연하는 극장입니다. 나는 김정옥씨와 극단을 만들 때 감히 그 르노 바르도 같은 극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자유극장은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대부분의 창단 멤버들이 그대로 함께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무대의상의 중요성 발견
서:30년 동안 자유극장 대표로서,8년 동안 무대예술가협회 회장으로서 혹은 일찍이 까페 떼아트르(1968년부터 8년간)를 운영하시는 등 참으로 큰일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오늘 선생님을 찾아 뵙게 된 보다 큰 까닭은 사실 선생님께서 우리의무대의상을 예술의 경지에 이끌어 올려놓으신 장본인이라는 점입니다. 무대의상을 하게 된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이: 무대의상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생활을 위해 부티크를 가지고 맞춤옷을 하며 공방도 있고 해서 작품에 필요한 옷을 하나하나 하다보니 무대의상을 공부하고 배우고 창작하게 된 거죠.
서: 요즘 무대의상을 하겠다고 나서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는데......,
이: 하루 이틀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어둡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개념이 성립된 것도 최근의 일이고, 조바심 내서 될 일도 아니고......벽제에 문화예술진흥원 무대예술연수원이 생겼고 또 무대예술가협회에서 8년째 워크숍을 하면서 내가 관계하고 있는데, 어느 곳이든 조명이니 디자인이니 의상이니 하는 분야를 공부하겠다고 오는 젊은이들이 99% 연극을 본 일이 없다는 겁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죠? 문예진흥원은 그 동안은 1년 코스로 하다가 금년부터 2년 코스로 바꿨습니다. 유럽에서는 보통 4,5년씩 코스 워크숍을 하지 않습니까. 협회에서는 겨울마다 2개월씩 해서 신진을 양성하였는데, 지금 그들은 극단에서 스태프를 보기도 하고 일부는 미국과 유럽에 나가 유학중 입니다. 그들이 잘 크면 좀 나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서: 무대의상의 재료는 현실이 어떻습니까?
이: 우리 패션계는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고 그에 따라 재료는 외국 못지 않게 풍부합니다. 재료 면에서는 불편이 없습니다. 문제는 극단들이 돈이 없는 것과 그러한 재료를 연극에서 어떻게 창의성 있게 활용하느냐 하는 거지요.
서: 젊은이들에게 무대의상을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주신다면.....,
이: 대학 의상과에서는 패션을, 양재학교에서는 봉재기술을 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무대의상을 체계적으로 배울 곳은 어디에도 없고 또 가르칠 선생도 없습니다. 나도 그런 일은 못합니다. 거기에 뜻을 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재질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먼저 의상과나 양재학교에 들어가서 옷을 만드는 기초과정을 해야 합니다. 음식을 만들자면 장 담그는 법부터 배워야 하듯이.....두 번째 단계는 극장에서 연극을 많이 보아야 합니다. 작품의 성격을 알고 무대미술의 기능을 알고 배우의 움직임을 알고 거기에 따른 옷의 기능과 효과를 잘 파악 해야죠. 그리고 나서 세 번째 단계는 창작이죠. 연기자들이 입어서 편안하고 연극에 효과를 내는 옷을 적당한 소재로써 만들어 내야지요.
서: 역시 기초와 과정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이: 무대의상 한답시고 스케치북 내놓고 그림 먼저 그리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기초 부실의 맹점은 외국교수도 나에게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단시일 내에 하려고 말고 한5년은 기초를 열심히 닦아야죠.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리 연극은 한 십 년 전까지 희곡만 있으면 되었고, 그러다가 연출가와 배우의 역할이 커졌고, 요즘에 와서야 무대예술의 필요성이 논의되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모든 분야가 같이 발전하지 않으면 좋은 드라마를 기대할 수 없지요. 그래서 무대예술 분야의 젊은이들을 외국에 보내주거나 제작소에 소속시켜 직접 기술을 배우도록 하자는 겁니다. 그 장학금은 공공기관이 부담하도록 하고.....긴 안목으로, 지속적으로 인재를 키우지 않으면 이 나라 예술은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문화투자에 너무 인색합니다.
한국적인 모색과 창조의 길
서: 항시 선생님이 만든 옷을 보면 아주 분위기 있고 개성 있고 강렬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30년 동안 자유극장 배우들은 내가 만든 옷을 입어 왔기 때문에 그 무대 적인 기능과 효과, 편안함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1991년 10월 금곡의 토탈 미술관에서 공연된「왕자 호동」의 의상은 그 환경과 작품 분위기가 너무나 잘 조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공연에 앞서 같은 해 6월 프라하에서 국제무대예술가협회 ISTAT 주최 전시가 있었지요. 그 전시에「왕자 호동」의 리허설 사진을 먼저 내놓고 호평을 받았습니다. 서양과 다른 한국적인 특색과 이미지, 아름다움이 있다는 겁니다. 정말 우리는 우리만의 것이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하고 아울러 창조적인 모색을 게을리 말아야 합니다. 아직도 개인이나 국가나 문화적 평균치가 너무 낮은 실정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서: 의상 이외에 무대미술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이:「무엇이 될꼬하니」(1978)부터는 내가 직접 디자인해 왔습니다. 한국적인 코러스가 등장하는 집단창작 방법을 채택하였기에 그 형식과 방법에 알맞은 무대예술을 추구하고 있지요. 그때그때 내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수탉이 안 울면 암탉이라도」(1988)의 의상은 지금도 눈에 선하게 충격적입니다. 그 양감, 그 질감이....
이: 내가 항상 고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비용을 적게 들이고 무대와 의상에서 효과를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에요.「수탉이 안 울면 암탉이라도」에서는 72벌의 옷을 만들어야 했는데 감당할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조선백지(한지)를 써보기로 했던 건데 막상 만들고 보니 그 한국적인 질감과 곡선, 신비스런 분위기, 종이 옷에서 나는 소리가 무척 특이했습니다. 종이는 색상, 그림, 먹이는 풀에 따라 창조적인 가변성이 높은 반면에 천보다는 잘 찢어지거나 구겨지기 때문에 만드는데 10배의 노력이 더 들어야 합니다. 그후 종이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는데 종이오 디자인은 비용문제의 단계를 넘어서 새로운 정신의 구현이 가능해졌음을 발견했습니다.
서: 선생님은 공연 때마다 여러 가지 탈을 만들어 작품의 의미에 심도를 가해 오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탈은 한국인의 순수한 모습이요 마음이요 표현이었지요.
이:「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1982)제작부터 종이 탈에 힘을 기울였습니다.「햄릿」(1993)공연 때 햄릿 부친이 탈을 쓰고 연기한 것은 외국에서도 호평을 받았어요.「노을을 나는 새」(1992)의 무대와 의상이 좋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자들의 저고리 겨드랑이를 짧게 하고, 바지는 꼬장바지를 변형해서 암항아리 모양으로 동그랗게 해 입혔습니다. 남자들의 바지는 숫항아리 모양으로 실하고 길쭉하게 해 입혔죠. 전부 흰 색깔에 허리에는 삼베에 색깔을 넣어 띠를 둘렀지요.「햄릿」에서는 삼베만으로 우리의 상청 비슷하게 무대를 만들었는데, 베 4백 필을 박을 수 없어 밭에 가지고 나가서 작업을 했지요. 프랑스에서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서: 우리 연극 사에서 대담하고 시원한 일대 사건이었군요.
이: 한번 한번 할 때마다 스스로 경이롭고 놀라운 느낌으로 작업하고 있지요. 동아연극상, 백상연극상, 동랑연극상, 국제무대예술가협회상 등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만, 제일 정확하게 사는 길은 일 자체에 미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집에 아이들이 엄마는 늙을 시간도 없다고 말한답니다.
서: 지금 만들고 있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이: 금년도 베네주엘라의 카라카스연극제(6. 23∼25)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스페인 로르카의「피의 결혼」이 지정 작품인데, 물론 우리 극단은 한국적인 작품으로 완전히 번안해서 새로 만드는 거죠. 예술의 전당에서 먼저 공연하고(5. 12∼21)다음에 동경 3백인 극장에서 공연하고(6. 7∼10)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지금 그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또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국제무대예술가협회 주체로 전시회(6. 26일부터)가 있는데 우리측에서는「햄릿」의 의상을 전시하려고 합니다.
서: 이번 공연도 크게 성공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연극의 선도자로서, 특히 무대예술 분야의 개척자로서, 한국적인 자존심을 지킨 창작가로서 활약해 오신 노고에 대하여 다시 한번 경의를 드립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