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예술의 현장 / 미술

오브제의 해석과 사실적 표현




조광식 / 미술평론가

근래에 조형작품에서 레이드-메이드 오브제 Rady-Made Objet(기성품)나 자연물 오브제의 사용을 흔히 보게 된다. 이런 현상들은 물감 같은 전통적 재료를 탈피하여 우리 주위의 흔한 오브제(물건)들을 작품의 재료로 사용함으로써 작품의 표현영역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작품들 모두를 기성품 또는 자연물을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는 '오브제작품'들이라고 간단히 호칭할 수만은 없으리라고 본다. 이들 작품 제작에 있어서 모두 오브제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각기 다른 내용과 형식을 택하고 있고, 우리에게 다양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오브제가 작품에 등장하는 형식을 대별해 본다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오브제의 '직접성'을 나타내는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브제의 '상징성'을 나타내는 경우이다.

오브제의 '직접성'은 큐비스트들의 콜라주에서 잘 나타난다. 큐비스트들의 콜라주에서는 회화와 동질선상에서 재현적인 표현을 대신하여 직접 오브제가 등장하면서, 오브제는 어떤 특정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물화의 정물에 등가 하는 작품내의 구성적인 요소로써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초기의 콜라주가 회화적'표현의 확대'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았던 점은 400년 전통의 회화체계인 재현 적인 회화와의 단절 또는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두 번째의 경우인 오브제의 상징적인 사용은 뒤샹 Dutchmo에서 시작되는 '발견된 오브제 L'objet Trouve'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발견된 오브제'는 오브제의 선택에서 기성의 생활용품을 무작위적으로 선택하고, 이 무작위적인 선택은 예술이라는 특정한 제도를 전제로한 상징적인 행위를 말한다. 더구나 이 상징적인 오브제가 '예술과 삶'의 관계를 첨예하게 대립적으로 반영함으로써 오브제의 상징성이 더욱 강조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기본개념의 오브제의 사용은 현재에 와서는 종합, 다양화 되었다.즉 작품 내에서는 단순한 오브제의 출현일 뿐만 아니라.'콤바인 페인팅 Combine Painting(다른 기법이나 소재를 혼합하는 작품)'이나 '설치 Installation'와 같은 복합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음을 말한다. 더구나 기성의 오브제들을 모방한 '가상의 오브제'또는 '복제된 오브제'들의 사용은 더욱 혼잡하게 이중 삼중의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오브제를 사용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후자의 경우인,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임을 본다.

미술회관 제2전시실에서 전시(3월 10일∼15일)된 안원찬의 작품도 역시 오브제를 사용한 '오브제 작업'이었다. 필자가 '작업'이라 지칭하는 이유는 오브제를 사용하면서,'작품'이라고 부를 수 없는 철저히 유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작품'의 개념은 완결성을 제공하며, 작가의 손을 떠나 이미 그 '작품'과 작가는 거리를 갖게 되고 독립적인 개체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안원찬의 이번 '작업'의 전시는 고정된 정형을 갖고 있지 않다. 즉 대부분 설치작업에서 나타나는 특징인데, 작가의 의도는 일정하지만 장소에 따라서 작품의 유형, 설치 방법이 변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 전시에서 안원찬은 오브제를 통하여 '설치작업'의 특성과 '회화성'을 보존하고 있다. 전시실을 들어서면 바닥에 흩어져 있는 '오브제'들을 접하게 된다. 그 오브제들이 본래의 모습을 솔직하게 들어내는 형식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상징성'보다는 오브제의 '직접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전시도록의 서문에서 서성록도 말했듯이 '만일 현실을 왜곡하거나 미화한다면, 그건 안원찬이 구상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안원찬이 거부하는 것은 현실을 분칠하는 행위이며, 여타의 수식어를 구사하여 실재를 가상화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무엇을 솔직하게 드러낸 다는 것인가? 안원찬의 오브제들은 우리들의 현실성을 그대로 표현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오브제에서 보듯이 금속성이 기계의 부품들 특히 군사용품들의 파편들은 우리가 접하게 되는 사회, 문화, 정치, 경제......등등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산만하게 전시실 바닥에 흩어진 오브제들은 결과적으로 무질서와 공허로 이어지는 우리들의 현실을 말하는 것 같다.

또한 안원찬은 그가 선택한 오브제들을 그대로 전시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표면을 갈아내어 본래의 금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금속성 색채와 함께 오브제 본래의 물질성을 강조해 주면서, 전통적인 회화에서 나타나는, 작가가 오브제를 재해석하고 통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브제들이 작가의 손을 거치면서, 버려진 파편에서 재창조되고 있는 점은 평면적 회화에서 대상을 보는 창조적 시각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안원찬의 오브제들은 다른 유사한 오브제의 사용기법과는 차별성을 갖고 있다.

안원찬의 이번 전시는 그의 '작업'에서 새로움만을 보여주는 전시는 아니라고 본다. 그는 이미 지난 십여 년 동안의 작가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계속적인 변화를 추구하면서 우리 시대가 처한 상황을 그의 시각으로 해석해내고 있는 것이다. 칸딘스키가「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작품의 형식적 유사성은 미래의 전망을 볼 수 없고, 내적인 것일 때는 미래의 씨를 갖고 있다고 강조하는 의미를 여기서 재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안원찬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처절하게, 극명하게 다룸으로써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 주위의 물질적인 풍요함 속에서 외적으로는 가장된 미의식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안원찬이 그의 '작업'에서 보여주려고 하듯이 미래는 처절하게 물질들의 파편으로 전락함을 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