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정서 물씬 -「말미잘」
오정국 / 문화일보 기자
영화계에 있어서도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영화의 '비수기'여서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지 않아 해마다 불황에 허덕인다. 따라서 화제가 될만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4월엔 좀처럼 개봉하지 않는다.'방화의 춘궁기'라는 말이 나돌정도인데. 올해도 예외없이 개봉작이 적다. 외화(外畵)의 간판만 극장가를 수놓아 방화(邦畵)관객들의 입맛을 씁쓸하게 한다.
이런 계절에 그나마 몇 편의 영화가 개봉되어 간신히 우리 영화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 원고 마감 일을 늦춰가며 우리 영화를 기다렸지만 시사할 수 있었던 작품은 아쉽게도 단 1편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이 영화는 한국 영화계의 원로 유현목 감독이 14년만에 메가폰을 잡아 내놓은 작품이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한편의 시처럼 서정적이고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끝내는 콧날이 찡해지는 그야말로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한 영화였다. 영화의 끝 장면에 이르면 관객들은 그만 목이 콱 메이는 게 할 말을 잊고만다. 경죽영화주식회사가 제작한 「말미잘」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는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80년대. 이를테면 '80년대 한국판 양철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외딴 섬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수영은 여자의 성기와 비슷한 말미잘을 보고 사내아이로 태어나 최초로 성적인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이때부터 소년의 주변에서 성적(性的)인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진다. 바다에 남편을 잃은 젊은 과수댁 어머니의 성적 욕망, 불구가 되어버린 최선장 아저씨의 엄마에 대한 사랑, 섬으로 찾아든 소설가 아저씨와 엄마의 정사, 국교교사를 사모한 섬마을 처녀의 타락.....이같은 사건들이 소년의 눈에 담담하게 비쳐드는데. 소년은 이런 현실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리고 끝내는 소설가 아저씨를 따라 뭍으로 시집을 가버리는 엄마, 텅빈 갯벌에 홀로 남겨진 소년 게다가 '저녁이 됐으니 밥을 먹으러가라'는 동네 아낙네의 목쉰 음성 소년은 엄마를 따라 뭍으로 가고 싶어 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년의 할아버지는 '혼자선 외로워 못살 것 같아' 소년을 놓아주지 않는다. 소설가 아저씨가 소년을 데리러 왔지만 거절을 하고 만다. 그 얘길 소년에게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한다.
이 대목에서 관객들은 그만 목이 메이고 만다. 어른들의 세계에선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소년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 중간쯤 되는 위치에서 관객은 그만 눈시울을 붉히고 만다. 억울하다, 아무래도 억울하다. 그게 소년의 현실이다, 무자비한 폭력의 액션물, 남녀가 좀더 자극적으로 정사를 나눠야 팔리는 에로물, 이런 영화가 판을 치는 요즈음 이토록 고요하고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나왔다는 얘기다.
해안의 풍경과 풍물이 아름답고 정겹다.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에피소드도 적절하다. 관객의 마음을 슬쩍슬쩍 건드리고 간다. 게다가 배역진이 튼튼하다. 흠잡을 데 없는 연기들이다.
주인공 천영덕의 깜찍하고도 발랄한 연기, 어수룩하기보다는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감수성을 가졌고 이런 게 은연중에 드러나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밤톨처럼 매끄럽고 알찬 연기들이다. 게다가 오랜만에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엄마 역의 나영희. 평소 지닌 우울한 분위기가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말수가 적고 감정표현이 별로 없는 과수댁으로는 그만이었다. 여기에다 과수댁 해녀를 뭍으로 데리고 가버리는 '도둑 놈'같은 소설가 아저씨. 이영하의 쓸쓸한 분위기도 섬의 풍경과 적절한 조화를 이뤄 주었다. 허구한날 소주병을 차고 술에 취해 살아가는 최선장으로 나오는 안성기. 그는 이번 영화에서「남자는 괴로워」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다. 별을 꿈꾸고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이 그렇다. 폐선이 되어버린 배에서 혼자 살며 배가 출항할 날만을 기다리는 미치광이다. 그리고 절름발이다.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비틀어져버린 '불구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그는 아웃사이더이다. 그리하여 인사이드 트랙만을 고집하는 세상사람들에게 '그래도 꿈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환기시켜 준다. 그는 마침내 바다로 간다. 태풍에 휩싸여 바다로 떠나간다. 생명을 바쳐 꿈을 이룬 것이다.
능청스러운 소년의 할아버지 역엔 장동휘가 출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여기에다 조연급으로 한석규, 채시라, 방은진, 김희라, 박정자 그리고 신인 손보영이 가세하여 그야말로 탄탄한 연기들을 펼쳐 놓았다. 연출은 물론이지만 배우들에 의해 영화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유현목 감독은 어느 연대보다도 변혁이 심했던 80년대의 사회상을 9 세된 섬소년의 눈을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소년이 방학을 맞아 고모가 살고 있는 땅 광주로 가서 겪게 되는 세상은 경악하리 만치 충격적이다. 이때의 화면은 다이내믹하고 격정적이며 끔찍하리 만치 참혹한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척박한 땅이지만 그래도 사람 사이의 정(情)과 온기가 살아 있는 섬생활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소년의 눈에 비친 학생시위. 뒷골목 콜걸들의 포주인 고모부와 콜걸들의 언니격인 고모의 처절한 삶, 여기서 관객들은 숨이 막힌다. 화면이 다시 섬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눈과 마음을 좀 쉬게 해줬으면 한다. 그러나 도시 공간의 화면은 계속된다.
마침내 화면은 다시 섬으로 돌아가는데, 여기서 소년은 더 큰 슬픔을 만나게 된다. 바로 엄마가 뭍으로 시집을 가버린 것이다. 엄마가 떠나버린 해변에 홀로 남겨진 소년, 날은 저물고 '저녁을 먹으러 가야지'라는 마을 아낙네의 음성이 메아리친다.
이 영화는 바로 여기서 끝났으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뒷부분은 오히려 사족 같은 느낌이 든다. 작년 9월 군산 앞바다의 외딴섬에서 크랭크 인. 4개월 동안 촬영됐다.
이와 함께 4월에 개봉될 영화인 박철수 필름의 「301. 302」는 실험성이 강한 현대물로 음식을 통해 현대인의 광기와 고독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 제목은 아파트 호수 번호에서 따왔다. 황신혜와 방은진이 주인공으로 출연, 좌절당한 불구의 생을 표현해 낸다. 또 현재 촬영중인 최민수 주연의 「테러리스트」(김영빈 감독)는 한국적 액션 르와르를 표방하고 있다.
이 「테러리스트」는 '봄 시즌은 춘궁기'라는 징크스를 깰 작품으로 기대를 모은다. 올해 들어 이렇다 할 흥행작이 없는 판국이어서 영화계는 「테러리스트」를 주목하고 있다. 또 김기영 감독의 「아빠는 보디가드」는 신. 구세대 사이의 성에 대한 가치관 차이를 다룬 홈 코미디물로 독고영재와 허준호 이상아 등 이 출연한다. 여기에다 김유정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소낙비」(최기풍 감독)도 1930년대 일제시대 민중의 질곡 같은 삶을 서정적으로 펼쳐 보일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