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행. 9 / 잉카문명 - 쿠스코(페루)

황금문명을 일군 색채의 마술사




이희수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세계에서 가장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문화의 하나인 잉카의 중심부 쿠스코는 페루 수도 리마에서 비행기로 1시간의 거리에 있다. 에어로 산타 비행기가 리마공항에 이륙하자 안데스 산맥의 여름 잔설이 군데군데 하얀빛을 발한다.

인구 25만의 고원도시 쿠스코의 고도는 3,740미터. 공기밀도가 낮아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는 고산증세가 금방 느껴졌다. 첫날은 천천히 걸으며 무리하지 말라는 현지 안내인의 신신당부로 고산음료인 뜨거운 코카차를 서너 잔 연이어 마시고 호텔에 누워 피곤하지도 않은데 억지로 휴식을 취하였다. 창문으로 보이는 아담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건국기념식 준비를 위한 행진연습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오후 늦게 운동장 한 모퉁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공차기를 하는 꼬마 인디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잉카의 마에 끌려 더 이상 자리에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잉카와 첫 인사를 나누기 위해 쿠스코의 중심지 아르마스 광장으로 갔다. 길 양옆에 늘어선 각종 토산품 점과 고풍스런 레스토랑예서는 재즈와 페루 특유의 폴클로레의 멜로디가 제멋대로 섞여 흐른다. 광장 중심부에는 스페인 식민시대의 권위적인 관청과 성당들이 잉카의 주춧돌 위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12각의 틀이 박힌 잉카의 석벽을 토대로 하여 세워진 종교예술 박물관이나 잉카제국의 황금궁전 터 위에 세워진 산타도밍고 교회 등 시내 전역의 근대식 건물들은 오늘날도 잉카의 품안에서 안주하고 있다. 특히 현재 산타도밍고 교회가 세워져 있는 곳은 잉카 전성기의 코리칸차 궁전의 터였다. 당시 잉카 영화의 상징이었던 이 궁전은 내부벽면이 온통 금으로 덮여 있었는데, 잉카를 멸망시킨 스페인 사람들이 그 금을 녹여 본국으로 가져가는 바람에 일시적인 금의 급격한 유입으로 유럽경제의 혼란을 야기할 정도였다니 그 부의 규모를 짐작할 만 했다. 산타도밍고 교회는 그후 대지진으로 원형이 완전히 소멸되었으나, 잉카 석조의 토대는 그대로 남아있어 잉카의 건축의 견고함과 뛰어난 기하학의 수준을 증명해 주었다.

잉카는 이곳 토착민인 케추아족의 언어로 '태양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창조주 비라코차의 아들인 인티를 태양신으로 모시고. 어느 문화와도 비교될 수 없는 독특한 잉카 문명과 대제국을 이룩했다. 특히 태양신 인티는 현재 세계를 관장하는 신으로서 안데스 대지를 안아 곡식을 맺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빛나는 원반에 인간의 형상을 한 잉카 농민들의 조상신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태양신이 가져다주는 풍요와 안정을 위해 사람의 피와 살아 있는 심장을 바쳤고, 그 대가로 태양신은 잉카인 들을 허무와 패망에서 보호해 주었다. 태양신의 보호아래 잉카인 들은 동시대 지구상의 어떤 문화권보다도 수준 높은 문화와 삶의 풍요를 만끽했다. 토지는 3분되어 신을 위한 '태양의 땅', '왕실의 땅', '농민의 소작'으로 구분되었다. 왕은 신과 같은 존재로서 불멸신앙에 따라 미라로 만들어져 부장품과 함께 궁전이나 태양신전에 안치되었다.

이리하여 쿠스코 분지 남동쪽의 파우카르탐보 동굴에서 나타나는 전설상의 잉카 시조 만코 카파크가 쿠스코에 나라를 세운 후 1438년 파차쿠티가 남미 전체를 평정하고 통일된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 전성기 잉카제국은 영토 길이 5천 킬로미터에 50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1천2백만의 복속민을 거느리는 위세를 자랑했다. 정복 지에서는 고유한 토착신앙을 보호해 주는 대신 곡물과 노동력을 세금으로 징수하였고, 수레라는 운송수단이 없었음에도 산등성이와 계곡을 따라 형성된 역참제도를 통해 잉카문화의 전파와 성숙을 가능케 하였다. 더욱이 차스키라 불리는 행정관을 주요 지방에 파견하여 중앙과 지방의 연결 및 중앙정부의 효과적인 통치를 도왔다. 쿠스코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파차구티 동상의 위엄이 당시의 번영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평민의 사회보장이 완비되어있는 신권적 사회주의 제국을 건설한 그들은 합리적인 토지의 분배와 경작을 행했으며, 문자와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지만, 구전과 퀴프라는 매듭부호를 고안하여 그들의 역사와 삶을 이어갔다. '아마우타라'라 불리는 지식인 집단이 제문이나 전승을 기억하고 암창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퀴프는 기억 보조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잉카문화의 산물인 퀴프는 한 줄의 끈에 여러 가닥의 끈을 직각으로 달아매고, 색깔, 매듭 숫자, 모양으로 가구 수나 세금액 등을 계산했던 것이다. 잉카인 들이 문자의 전달체계 없이 어떻게 그 거대한 제국을 통치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후일 유럽인들이 퀴프를 해독했을 때, 그들의 인구나 가축, 가구 숫자 계산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황금세공의 정교함과 아름다운 염직기술에도 유럽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잉카인 들이 현대인을 당혹케하는 것은 그들의 석공기술일 것이다. 금속도구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거석 유적지의 수백 톤 무게의 돌들은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정교한 조합을 이루고 있다. 어떤 경이와 찬탄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훌륭한 예술성과 건축술이 보는 이의 신비를 더해준다. 나아가 그들의 거대한 신전의 내벽 전체는 황금으로 장식하여 '황금 문명을 일군색채의 마술사'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잉카제국에는 신조차 예기하지 못했던 재앙이 몰아닥쳤다. 신의 탈을 쓴 하얀 얼굴의 악마가 등장하여 살육을 일삼고. 그들이 뿌려놓은 전염병에 잉카 족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전성기의 후아나카파크 왕도 1525년 괴질의 희생자가 되었다. 특히 매독이 성행하여 라마와 수간하는 습속을 갖고 있던 목동들의 무지로 대제국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잉카제국은 이 때문에 독신인 라마목동이 암컷을 소유할 경우 사형으로 다스리는 엄한 법률까지 제정했으나, 이미 만연된 그 폐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잉카에서 의학과 약학이 발달했던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마취제의 코카인, 해열제의 키니네. 지사제의 이페카는 대표적인 잉카의 약초였으며, 인신공양과 관련하여 두개골 절제수술이 경이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꺼져 가는 잉카의 마지막 왕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이는 아타후왈라였다. 1532년 스페인의 정복자 피자로는 아타후왈라를 인질로 잡아 그 대가로 잉카제국의 모든 황금을 고갈시켰고, 이용가치가 끝났을 때 그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후 무참히 처형하였다. 처음 카하말카 광장에서 화형에 앞서 발베르데 신부가 잉카 사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면 영혼이 구제될 수 있다고 설교했다. 그러나 아타후왈라는 침묵으로 이를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신부는 기독교 세례를 받으면 화형에서 교수형으로 감형시켜 주겠다고 제의했다. 무표정하던 아타후왈라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정말이냐'고 묻고 즉시 기독교 세례를 받고 프란시스코가 되었다. 그가 화형 대신 교수형을 택한 이유를 알 리가 없는 스페인의 지배자들은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지만. 아타후알라는 미라가 되어 태양의 신전에서 영원히 태양의 아들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 그는 결코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잉카제국의 영화는 무너졌지만, 그들의 살아남은 후예인 인디오들의 피 속에는 아직도 잉카정신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다.

안데스의 험준한 고산을 생활근거지로 한 페루의 인디오들은 멕시코에 비하면 비교적 스페인의 침략과 살육으로부터 자신들을 잘 보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페루의 인디오는 전체 인구의 약 절반에 육박한다. 그들은 대부분 카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스페인에 대한 반감과 오늘날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혼혈 메스티조에 대한 저항의식이 투철했다 우리의 안내를 맡았던 엘리자베스도 카톨릭을 믿는 처녀 인디오였다. 그녀는 인디오의 자주적 삶의 권리와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자신의 삶을 기꺼이 바칠 것이라며 결연한 의지를 비춰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디오들은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며. 가난과 멸시 속에 고달프기만 한 하루하루를 인내하고 있는 듯하였다.

일교차가 심하여 저녁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도시의 골목마다 인디오 아낙이 아기를 업은 채 어두컴컴한 불빛 사이로 알파카 스웨터를 짜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해맑은 엄마의 웃음에 까만 눈의 아이들은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닳아 있다. 그 먼 옛날, 몽고에서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을 그들의 조상들은 아마도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누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의 풍습과 음식에서, 아이들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에서 문득 우리 문화의 편린들을 보게된다.

그러면서도 인디오의 고향 쿠스코에서 만난 그들의 좌절의 눈빛과 두려움에 떠는 몸짓은 나그네의 가슴에 아픔을 더해준다. 그토록 영광스런 문화와 제국을 이룩했던 민족들이 이제 초라한 모습으로 문명이란 무기를 휘두르는 현대인 앞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는 것이다. 언제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현대의 악마들 앞에서 항상 경계하면서 조심조심 다가간다. 생계를 위해, 관광객들의 호주머니에 남아 있는 몇 푼의 돈을 위해 잉카 목걸이나 털스웨터를 들이밀어 본다. 날씨도 춥고 하여 알파카 스웨터를 10불에 사서 껴입어 본다. 조직과 직조의 명수들이 짜내던 그 기술, 그 색깔 그대로 한 을 한 올에는 잉카의 숨결이 서려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구의 정반대 편에서 느끼는 바로 우리의 숨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