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예술의 현장 / 연극

서양 고전 드라마의 한국화

-극단 실험극장의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




김윤철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파우스트가 청바지를 입는다 ?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인생의 방대한 의미를 다 수용하려는 괴테의 파우스트는 아마도 구도자의 차림일 텐데, 청바지를 입은 이윤택의 파우스트는 도대체 어떤 정체일까 ? 본시 블루진이라는 것이 나이, 성, 신분, 인종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캐주얼 차림이니까 혹시 그의 파우스트는 영웅 부재의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에브리맨(만인)이란 말인가 ? 극이 공연되고 있는 압구정동의 실험극장 소극장을 들어서면서 떠오른 의문들이다.

극작가로서, 연출가로서 한국 연극계의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윤택이 최근 서양 고전 드라마의 얼개에 한국적인 정치상황과 역사를 퍼담은 실험을 끈질기게 진행하고 있다. 대학로에서 지금 공연되고있는 「우리 시대의 리어왕」도 칠레 태생의 극작가 가스통 살바토레가 쓴 「스탈린」의 구조를 빌려 한국 현대정치의 독재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윤택의 연극세계가 대단히 관념적이기 때문에 그의 연극적 논술을 위해서는 아마도 서양의 이성중심 적인 극 구조가 적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연극에서 서양의 구조와 한국의 이야기가 화학적인 만남을 이룩한 업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의 경우 괴테 극이 갖는 얼개의 논리를 한국적인 이야기의 구성이 충족시켜 주지 않기 때문에 차질이 빚어진다.

극장의 입구와 로비에서 흰색의 광대 옷을 입은 인형들이 단조로운 표정과 몸짓을 해대는 사이를 뚫고 극장에 들어서면 무대 앞과 양옆에서도 광대들이 인형의 몸짓으로 관객을 맞이하는데, 광대마다 표정이 다양하다. 환각에 빠진 듯이 황홀한 미소를 주체 못하는 광대, 슬픈 인형의 눈을 깜빡거리며 음악을 지휘하는 광대, 전자피아노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모든 소리를 연주해내는 광대 등등. 관객은 어느덧 사실적인 논리로 진행되지 않을 것 같은 연극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춘다. 객석에서 배우 윤소정과 극작가 장두이가 나와 신변잡담과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어디까지가 각본에 의한 연기이고 어디서부터 즉흥 연기인지 경계가 애매하다. 두 사람은 원작대로 「파우스트」를 한번 해보자고 하면서 무대의 세계로 잠입한다.

이러한 프롤로그는 괴테 극의 구조에서 따온 것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을 드러낸다. 괴테 극의 「천당의 프롤로그」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은 완성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으나 몸부림을 계속하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즉 괴테 극은 '완성', '실수', '몸부림', '진리' 등의 주제를 존재론적으로 진지하게 탐문한다. 반면에 이윤택의 프롤로그는 그 메타연극 적인 속성 때문에 비슷한 주제를 하나의 지적 유희로써 접근하게 만든다.

지적 유희는 무대와 객석의 심미적 거리뿐만 아니라 배우와 등장인물의 거리 두기가 이루어질 때 활발해진다. 한 가지 행동 선을 따라 가는 선(線)적인 구성보다는 행동의 다양한 측면을 상호 반영하는 점(點)적인, 또는 복선적인 구성이 대체로 더 효과적이다.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는 3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프롤로그가 관객으로 하여금 기대케 하는 점 적인 구성과는 달리 중심 행동이 선적으로 진행된다. 1막에서는 학문과 가정을 충실히 섬겨온 인문주의자 파우스트 교수(윤주상)가 학문적 무력감과 '삶의 참을 수 없는 지겨움'에 못 이겨 일탈을 위해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장두이)를 초대한다. 2막에서는 둘이서 그레첸(윤소정)이라는 파우스트의 옛 애인과 함께 발푸르기스의 밤을 즐긴다. 3막에서는 자신의 과오를 깨달은 파우스트가 희망을 희망하며 구원의 가능성을 자각한다.

얼핏 괴테의 「파우스트」를 거의 복사한 듯한 느낌이지만 실제는 극의 철골구조만 유사할 뿐, 소프트웨어는 전혀 다르다. 우선 세 주요 인물들이 한국의 최근 정치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어 괴테의 보편적인 인간상에서 멀리 떨어진다. 세 사람은 다 71학번으로 대학 동창생들이다. 파우스트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동료들의 대열에서 빠져 나와 가정교사와 조교의 과정을 거쳐 그레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대학 교수가 된 비겁한 지식인이다. 그레첸은 강한 민중의식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다 투옥되고 집단적인 성폭행을 당한 뒤 풀려 나와 술집 마담이 되었다. 메피스토텔레스는 데모하다 부상당한 그레첸을 병원에 입원시켜놓고 미국으로 도망가 연극을 하던 인물이다. 인물설정을 이렇게 한국화, 현대화, 세속화한 이상 괴테 극의 신·인간·악마의 종교적인 인물관계는 순전히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이윤택은 뉴욕쯤에서 연극하고 돌아온 메피스토텔레스에게 악마의 정체를 계속 지니게 하고, 에이즈가 창궐하는 그곳을 지옥으로 명명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현재화하여 극의 시의성을 높이려는 자신의 극 개념을 스스로 파괴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어야 할 것이 인간과 악마의 관계로 방치된 결과 극의 양식이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표현주의 (인간·악마 관계)가 사실주의(인간·인간관계)의 한계를 확대하면서 수정 보완해 주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실주의의 내러티브 진행을 낯설게 만든다. 요컨대 연극의 양식과 극 내용이 불화 하여 예술적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이 극이 성공하려면 1막에서 관객이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90년대 상황에 대한 파우스트의 절망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려는 그의 열망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극의 나머지가 순전히 그의 순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파우스트 교수가 그토록 혐오스러워 하는 신세대의 가치체계와 의식구조를 도해하기 위해 조교(채용병)를 내세운다. 책과 과거 속에서 쾌락을 찾는 괴테 극의 바그너에 해당하는 인물이지만 이윤택의 조교는 반대로 논문 대신 방송극을 쓰고 고전보다 이현세의 만화를 애독한다. 그래서 교수와 조교는 대립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관객이 교수의 절망과 회의를 동정하기보다 조교의 신세대적 가치관에 더 공감한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파우스트의 순례에 관객이 자발적으로 동행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대 만들기에도 문제는 있다. 이를테면 파우스트 교수 역은 유주상의 1막에서 인문주의자의 설 곳을 인정하지 않는 한심한 세태에 대한 염증, 그리고 그 절망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려는 열망에 치열하게 드러내지 않고 경박한 세태를 가볍게 핀잔하는 데 그치고 있어 관객한테 웃음은 이끌어내지만 더 중요한 공감을 획득하지 못한다. 더구나 그가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쓰고 윤소정이 경영하는 카페에서 무희들로부터 조롱을 당하며 장두이에게 관심의 초점을 빼앗기는 2막도 그와 관객의 일치를 방해한다. 그리고 그 축적된 폐해는 3막의 결론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레첸의 애인을 쏴 죽인 뒤 재판정에서 파우스트는 그레첸이 겪은 고난과 그녀를 배반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안정과 위선의 삶을 포기하고 사랑과 진실의 길을 선택하는데, 윤주상의 이 진지한 구도 장면이 앞의 1, 2막에 견주어 느닷없이 접수되기 때문에 자기완성이라는 비극적 크기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메피스토텔레스 역의 장두이는 지극히 인간화된 착한(?) 악마로 신체와 감정을 자유롭게 조절하면서 관객을 장악하지만 다른 배우와의 교감에서는 한계를 보인다. 윤소정은 3막의 진실한 자기고백과는 달리 프롤로그와 2막의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에서 연하의 남자배우들과 화학적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이윤택의 연출은 항상 에너지가 넘치지만 그 에너지가 내연하지 못하고 주로 배우들의 고함, 강한 동작 등 외적으로 발산되기 때문에 목적하는 정서력을 충분히 획득하지 못한다

극의 내용과 양식에 대한 논리적인 접근의 필요성이 무엇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공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