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의 길」
-평범하려는 갱스터의 훼손된 꿈
육상효 / 비디오 평론가
국내에서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개봉됐다 조용히 사라진 영화가 있다. 관객뿐만 아니라 평론가나 기자 등 영화 평가단에 의해서도, 그렇고 그런 할리우드의 통속 상업 물로 치부돼 버리면서 전혀 평가받지 못한 영화가 있다. 브리이언 드 팔마가 감독하고 알파치노가 주연한 「칼리토 Callitos Way」가 그 영화다. 필자는 감히 이 평범해 보이는 갱스터 영화를 명화로 추천한다. 그에 대한 모든 힐난을 무릅쓰고서라도 말이다.
그럼 명화란 무엇을 말함인가. 극장 의자에 앉은 관객들에게 폭풍 같은 정서적 반응을 일으켜 감동으로 이끄는 것이 명화라 함은 「닥터 지바고」나 「사운드 오브 뮤직」류의 영화에 적용되는 고전적인 정의이다. 아니면 영화의 역사를 영화 자체로서 언급하면서 촬영이나 편집 등의 표현적인 부분에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는 게 명화라면 이것은 고다르의 영화들이나 켄틴 타란티노의 근작 영화들에 적용될 수 있는 모더니즘적 명화의 개념이다. 「칼리토」는 이 명화의 두 가지 개념에 닿아 있다. 상업영화 적인 한계 내에서 물론 그 양쪽의 면에서 깊이가 결여됐다 하더라도 「칼리토」는 할리우드 상업영화 체계가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나를 양쪽 면에서 보여주는 명화이다. 명화란 말이 거북하다면 수작이라고 해두자. 아니면 역작이라고 하면 어떨까.
「칼리토」는 갱의 운명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는 갱의 운명으로써 갱스터 무비의 장르적 역사를 언급한다. 동시에 B급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운명에 대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자기정리이다.
영화는 칼리토가 죽어 가는 느린 흑백 화면으로 시작한다. 갱 영화가 갱의 죽음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30년대부터 있어왔던 수많은 갱스터 영화들이 갱의 운명을 다뤄왔지만 어느 것도 갱의 죽음을 앞에 놓지 않았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갱이 종국에는 죽는다는 결과를 앞에 놓고 영화의 흥미를 줄이는 대신 이제부터 그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는가를 살펴보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알 파치노의 풍부한 감정이 담긴 나레이션과 함께 제시되면서 영화 전체는 마치 죽음 직전의 사람에게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가는 자기 삶의 재현과도 같이 보인다.
칼리토의 목표는 바하마라는 낙원에 가서 연인과 함께 자동차 임대 업을 하는 것이다. 그 낙원은 소년시절부터 살인과 범죄로 살아온 이 중년의 갱이 뒷골목과 피, 그리고 자신이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곳이다. 영화는 자신이 죽음으로써 이 목표를 실패한 갱이 어떻게 실패하게 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은 브라이언 드 팔마 특유의 화려한 카메라 워크에 의해 화려하게 수식된다. 다른 갱 영화들이 갱으로서의 성공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면 이 영화는 성공한 갱이 어떻게 뒷골목으로부터 벗어나려 욕망 하는지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제임스 캐그니나 에드워드 로빈슨이 연기하던 30년대 갱스터 무비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30년대 흑백 화면 속의 갱들은 폭력적인 갱으로서 멋지게 사는 것이 유일한 그들 삶의 목표였다. 오히려 70년대 「대부」와 이런 면에서 「칼리토」는 닮아 있다. 합법적으로 사는 것에 대한 마이클 콜레오네의 지독한 집착은 「칼리토」에서 칼리토가 꿈꾸는 바하마와 닮아 있다는 것이다.
갱스터 무비의 장르적 규율에 대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급은 주인공에게 우호적인 세력으로서 친구와 연인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친구에 의해 감옥에서 석방된 칼리토는 다시 그 친구에 의해 범죄에 끌어들여진다. 친구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것은 갱스터 무비의 익숙한 관습이다. 그러나 칼리토는 그 친구에 의해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오히려 칼리토 역시 친구를 배신함으로써 친구를 죽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작은 비중으로 등장했던 또 다른 친구의 사소한 배신으로 칼리토는 죽는다. 감독은 장르적인 규칙들을 인용하면서도 교묘하게 그 익숙함을 비틀면서 장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연인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칼리토의 연인의 현실은 밤무대에서 선정적인 춤을 추는 댄서이다. 그녀는 칼리토와 마찬가지로 뒷골목의 어두운 삶을 살면서도 칼리토에게는 바하마의 꿈과 등가에 놓이는 존재이다. 같이 훼손됐지만 같이 훼손되지 않은 꿈을 꾸는 사람으로서의 그녀의 존재는 칼리토에게 연인이면서 자신의
꿈을 같이 나룰 수 잇는 유일한 동반자이기도 하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이런 장르적 규범들을 조작하면서 결국은 평범하게 살려는 한 갱의 치열한 욕망이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꼼꼼히 살핀다. 친구의 곤경에 대한 갱으로서의 의리, 친구의 배신, 경찰의 간섭…… 칼리토의 욕망을 방해하는 것은 너무나 많아 차라리 방해물들은 범죄자로 살아온 그의 지난 모든 삶이라고 부르는 게 타당하다. 그리고 그 벽을 부수는 것도 그가 범죄자로 배워온 모든 기술들이다.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막는 자신의 삶들과 그는 다른 모든 자신의 삶을 통원하여 싸우는 것이다. 그가 죽어가면서 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 "나는 최선을 다했어"는 그래서 거의 엄숙하게까지 들린다. 그것은 어쩌면 탁월한 테크닉을 가진 감독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일류 감독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던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의 절규일 수도 있다. 그는 이 영화를 끝내면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감히 추천하고픈 수작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