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호 / 경기일보 문화체육부장
음악
경기도가 낳은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인 난파 홍영후 선생의 예술 혼을 기리고 역량 있는 신인발굴을 위해 실시한 제27회 난파음악제 콩쿠르에서 정순도씨(26, 서울대 음대 대학원, 서울시 동대문구 답십리 3동 465의 47)가 이 대회의 특장부문인 작곡대상을 차지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경기도지회(지회장 송태옥)와 한국음악협회 경기도지회 (지회장 김병준)가 주최·주관한 제27회 난파음악제 콩쿠르는 4월 10일 경기도문화예술회관에서 개막됐는데 이날 정순도씨는 「피아노를 위한 방향변이 Die Fluctuation」로 대상을 수상, 문화체육부장관상과 함께 상금 2백10만 원을 받았다. 정씨는 앞으로 해외연수 시에 연수 비와 소정의 작곡료를 별도로 지원 받는다.
일반합창 부문에서는 부천시 아도나이 합창단(대표 황홍구), 어머니합창 부문은 광명시 어머니합창단(대표 김금자)이 각각 난파대상을 수상했으며 바이올린 부문에서는 대상을 내지 못했다,
또 각 부문별 최우수상을 김혜지씨(작곡 부문, 서울), 주연주씨(바이올린 부문, 서울), 숭실대 웨스트민서트 합창단(일반합창부문, 대표 김병조), 남양주시 어머니합창단(어머니합창 부문, 대표 안병랑)이 수상했다.
우수상은 신윤정씨 (작곡 부문, 대구), 손수현씨(바이올린 부문, 서울), 현대전자 한울림 합창단(일반합창부문, 대표 성재경),밝은 빛 남성합창단(일반합창 부문, 대표 이창근), 군포시립 어머니합창단(어머니합창 부문, 대표 김영생), 성남시 수정구 어머니 합창단(어머니합창 부문, 대표 김영희), 안산시 어머니합창단(어머니합창 부문, 대표 고광철)이 차지했다.
난파음악제 콩쿠르는 작곡 부문 13명, 바이올린 10명, 일반합창 4팀, 어머니합창 17팀이 참가했는데 심사위원장 김규환씨(동아대 교수 한국작곡가협회장)는 "이번 경연은 각 부문 모두 예년에 비해 수준이 향상됐으며, 특히 작곡부문이 높은 실력을 보였다"면서 "합창 팀은 예년에 비해 참가팀이 줄었으나 모든 팀들의 합창에 대한 연구 및 현대음악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으며 모든 면에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극찬했다.
콩쿠르에 이어 11일 오후에는 난파음악제가 화려하게 개최됐다.
난파음악회는 수원시립합창단(지휘 이상길), 국립경찰교향악단(지휘 정철주), 테너 김태현씨, 소프라노 김명옥씨가 출연무대를 빛냈다.
수원시립합창단은 모차르트의「테데움」을 비롯, 우리 가곡 및 팝송,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메들리를 선사했으며 국립경찰교향악단은 글린카의 「루슬란과 루디밀라 서곡」, 홍난파 동요모음곡 등을 연주,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편 난파음악회에 앞서 난파음악회 심사위원회(회장 음악평론가 이상만)가 선정한 제28회 난파음악상 수상자인 첼리스트 장한나양에 대한 시상식이 있었다.
장한나양(13)은 경기도 수원출신으로 9세 때 도미, 현재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재학중이다.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아 천재적인 연주가로 부상하였다.
지난 3월 15일 쥬세페 시노폴라가 이끄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하이든의 협주곡을 연주, 경탄케 했으며 1996년에 드레스덴 초청을 받았다.
장한나양은 뉴욕에서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중이며 로스트로포비치, 빗셔 마이스키, 야노스 스타커, 요요마 등의 세계 거장들의 극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난파음악상의 역대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제1회 (1968년) : 정경화(바이올린), 제2회(1969년) : 이대욱(피아노), 제3회(1970년) : 김영욱(바이올린), 제4회(1971년) : 김기혜(첼로), 제5회 (1972년) : 백건우(피아노), 제6회 (1973년) : 이성숙(성악), 제7회 (1974년) : 정명훈(피아노), 제8회 (1975년) : 이청 (피아노), 제9회(1976년) : 강동석(바이올린), 제 10회 (1977년) : 김영미(성악), 제11회 (1978년) : 금난새(지휘), 제12회 (1979년) : 박영희(작곡), 제13회 (1980년) : 김남윤(바이올린), 제14회(1981년) : 서주희 (피아노), 제15회 (1982년) : 이창우(첼로), 제16회(1983년) : 김관동(성악), 제17회 (1984년) : 김진 (바이올린), 제18회 (1985년) : 김대진(피아노), 제19회(1986년) : 최현수(성악), 제20회(1987년) : 김영준(바이올린), 제21회(1988년) : 이경숙(피아노), 제22회(1989년) : 양성식 (성악), 제23회 (1990년) : 장영주(바이올린) , 제24회(1991년) : 조수미 (성악), 제25회(1992년) : 신영옥(성악), 제26회(1993년) : 김지연(바이올린), 제27회 (1994년) : 함신익 (지휘)
미술
경기도 출신의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선생을 기리기 위한 나혜석 예술제가 4월 15일부터 5월 20일까지 수원에서 열리고 있다.
나혜석 예술제 운영위원회 (위원장 장안 갤러리 대표 이경근)가 주관하고 있는 나혜석 예술제는 1995년 미술의 해와 세계 여성의 해를 맞아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업적이 지대한 나혜석의 생애와 예술을 총체적으로 접근, 재조명하고 있다.
매년 나혜석 탄생일인 4월 16일을 기해 개최하는 나혜석 예술제의 1995년 행사는 4월 15일에 있은 수원성 화흥문 앞에서의 개막고사와 나혜석 추모 퍼포먼스, 나혜석 재조명 학술 심포지엄에 이어 나혜석 추모 판굿, 길놀이(4월 16일), 나혜석 생애와 예술전(4월 15일∼24일), 나혜석 현대미술제(4월 15일∼24일)가 계속됐다.
또 나혜석 문학의 밤 시낭송회는 5월 6일, 탄생 100주년 연주공연 「나혜석」은 6월 9일 열릴 예정이다.
나혜석 예술제가 수원에서 개최되고 있는 가운데 나혜석에 대한기록이 틀린 부분이 많은 것으로4월 19일 밝혀져 근대미술사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수원시에 거주하고 있는 향토사학자 이승언씨(50, 시홍시 향토사료실)가 최근 용인군, 수원시, 화성군에 보관돼 있는 호적원부를 열람한 결과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나혜석에 대한 기록 중 상당부분이 사실과 다름을 밝혀낸 것이다.
지금까지 나혜석은 수원시 남창동이나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분천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호적원부를 검토한 결과 당시의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소학동 11통 8호(현재의 용인군 용인읍 김량장리 용인천주교회 인근)에서 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기록에 수원 남창동에서 살았다고 하는 것은 뒷날 양자로 간 큰오빠 나홍석(羅弘錫)이 남창동에 살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또 봉담면 분천리에서 출생했다고 하는 설은 지리적으로 수원과 가까운 데다 나주 나씨 집성촌이 형성돼 있고 친·인척이 많았던 이곳에 자주 내려가 지냈기 때문에 생긴 오해로 생각된다.
출생 일도 기록에 따라 각기 달랐는데 이번 조사에 의해 1896년 4월 28일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일부 기록에 나혜석은 어렸을 때의 이름을 명순이라고 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김우영(金雨英)과의 결혼 한 달 후인 1920년 5월 3일에야 나혜석으로 개명했으며 그때까지의 이름은 명순이 아니라 아지(兒只)였다는 새로운 사실도 밝혀냈다
나혜석은 19세 때인 1914년 부친 나기정 (羅基貞) 등 가족과 함께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291로 이사, 결혼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또 여러 기록에 나혜석이 5남매 중 차녀라고 되어 있으나 4남매 중 오빠 홍석, 경석(景錫)에 이어 세 번째이며 아래로 여동생 간란이 있었음도 확인됐다.
나혜석의 부친 나기정은 1915년 12월 10일 사망, 양자로 간 장남 홍석 대신 둘째인 경석이 호주를 승계 했으며 나혜석이 결혼한 뒤인 1921년에는 전 가족이 서울 익선동으로 이주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승언씨가 수원성(화성) 축성 200주년 기념사업회(회장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의 의뢰를 받아 난파 홍영후, 노작 홍사용, 김광주, 나혜석 등 수원 출신 문화예술인 관련자료를 수집하던 중 나혜석의 출생지가 기록마다 다름을 알고 현지 조사를 하다가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