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세계화 시대, 문화첨병들의 눈에 비친 문화의 모습
말레이인들의 민속놀이
이경찬 / 말라야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문화행사는 전통예술의 지속적 보존·계승 목적 커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국가이다. 2천만 전체 인구의 약 절반이 넘는 55%가 말레이 계인 반면 이민 자들인 중국계와 인도 계의 비율이 45%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복잡한 인종 구성은 다 종교, 다 문화, 다 언어의 특성으로 이어져서 말레이시아 특유의 중층적 사회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문화적 특징은 바로 이 같은 다양성에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중국계와 인도 계는 말레이시아의 토착민이 아닐뿐더러 이들의 생활상 역시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는 본토문화 즉, 중국이나 인도 문화와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말레이시아의 고유문화가 아닌 외래문화의 연장이라 하겠다. 말레이시아의 전통문화가 토착원주민(부미뿌뜨라)인 말레이인들의 문화로 동일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역과 상업에 밝은 중국인들과 달리 말레이인들은 일찍부터 농경사회를 이루어 살아왔다. 이 같은 전통은 현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져서 중국인들이 대개 도시 지역에 거주하며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 반면 말레이인들은 주로 끌란딴과 끄다, 트렝가누 주 등 말레이반도 북부의 곡창지대에 거주하면서 농업과 어업 등 1차 산업에 종사해오고 있다.
북부 3개 주 가운데서도 특히 태국과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끌란딴 주는 말레이 문화의 보고로 불려지는 지역이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전형적 시골도시인 끌란딴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말레이인들의 전통과 문화가 잘 보존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쿠알라룸푸르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개발의 열기가 한창인 반면 현대화와 도시화의 물결에서 비켜난 끌란딴은 오히려 이 같은 이유로 인해 말레이인들의 전통이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끌란딴의 수도로 인구 10만의 소도시인 꼬따 바루는 우기 때만 되면 도시 전체가 무릎 높이까지 물에 잠기는 홍수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보통 11월에서 2월까지 약 4개월간 계속되는 지루한 우기가 끝나고 황토 빛 빗물이 잦아들기 시작하는 3월부터는 본격적인 농사철의 개시와 함께 다양한 축제와 볼거리가 펼쳐진다. 주립 문화원 격인 글랑강 스니(문화광장)에서는 전통 연날리기, 팽이 돌리기, 그림자 연극(와양 끌릿) 공연, 그리고 말레이 전통무술인 실랏 시범 등의 문화행사가 주기적으로 열리게 된다. 이들 문화행사는 단순히 외래 객들을 위한 시범이나 전시의 의미보다는 전래문화와 전통예술의 지속적인 보존 및 계승, 발전의 목적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연날리기와 팽이치기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민속놀이라는 점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모은다.
와우(연날리기)로 기원하는 다수확
전통연날리기는 추수철 말레이시아의 농부들이 가장 즐기는 민속놀이로 연날리기의 유래에 관한 전설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옛날, 자식이 없이 외롭게 사는 부부가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구슬땀을 흘리며 논일을 하던 농부는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자신의 논두렁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게 되었다. 자식을 얻은 농부는 더욱 흥이 나서 논일을 돌보았다. 그해 수확은 예년의 곱절을 넘는 풍년이었다. 농부가 복덩이가 들어왔다며 계집아이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느지막에 남편 사랑을 잃게 된 농부의 아내는 시기심에 어느 날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아이를 때려 내쫓아 버렸다. 공교롭게도 계집아이가 나간 후 그해의 수확은 변변히 추수할 것이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계집아이는 벼의 요정이었다. 상심한 농부에게 집 앞을 지나던 한 수도승이 어느 곳에서도 보일 수 있도록 커다란 연을 만들어 논 위에 띄우면 요정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때부터 연은 농부들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여자들이 연을 싫어했음을 물론이다.
말레이시아의 문헌기록은 15세기 초엽부터 이 지역에서 연날리기가 시작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초기의 연은 넓적한 나뭇잎을 이용해서 만들어졌으나 종이가 도입된 다음부터 나뭇잎 연은 자취를 감추었다. 연(와우)은 모양과 크기에 따라 초생달 연(와우 불란), 고양이 연(와우 꾸찡), 공작 연(와우 메락), 물고기 연(와우 이깐)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가운데서도 와우 불란은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연으로 꼽힌다. 연 꼬리가 초생달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초생달 연으로 이름 붙여진 와우 불란은 보통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2.5미터에 양 날개의 나비가 1.8미터에 이르는데 전체적인 형태는 비행기 모양과 흡사하다. 고공비행이 장기인 와우 불란은 국적항공사인 말레이시아 항공의 로고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와우 불란의 제작은 세심한 주의와 기술을 요하는 작업으로 말레이시아에서도 끌란딴과 트렝가누 등 북동부 2개 주에서만 기술이 전해지고 있다.
좋은 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길일을 택하게 된다. 연의 뼈대로는 재질이 가볍고 단단한 불루 두리라는 종류의 대나무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데 특히 해를 향하는 쪽의 대나무를 선호한다. 해 돋는 쪽으로 향한 식물에는 영혼이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 낸 대나무는 다시 여러 굵기로 쪼개서 흙탕물에 3∼4일간 담근 후 꺼내어 응달에서 말려낸다. 단단하게 마른 대나무의 껍질을 벗겨낸 다음 그중 가장 굵게 다듬은 등뼈를 중심으로 날개와 꼬리뼈를 배열한 후 흰 실로 단단하게 엮어 연의 뼈대를 완성하기까지는 꼬박 1주일이 소요된다. 이때 대나무를 충분히 말리지 않으면 나중에 연의 모양이 변하게 된다. 와우 불란은 이렇게 준비된 뼈대 위에 3중의 종이 옷을 입힘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완성된 연의 날개와 꼬리 부분에는 꽃잎이나 뭉게구름, 대나무 순모양의 화려한 무늬를 새겨 넣고 다시 날개 끝에 꽃술을 달아 한껏 멋을 내게 된다. 와우 불란의 날개 윗 부분에는 부술 이라고 불리는 활 모양의 얇은 대를 붙이기도 하는데 이 대는 연이 공중에 떠 있는 동안 부드러운 휘파람 소리를 낸다. 연날리기는 대개 바람이 강해지는 오후 3시 무렵에 시작해서 해질녘까지 계속된다. 바람이 강한 날은 아예 연줄을 야자수 기둥에 비끄러매어 놓은 채 연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자리에 들기도 한다. 연 울음소리가 잦아들면 바람이 약해진다는 신호로 이때서야 비로소 연을 거두어들이게 된다. 끌란딴 지역에서는 추수를 끝낸 후 자신의 논에서 연을 날리는 농부들의 모습을 요즘도 종종 볼 수가 있다. 풍성한 수확을 감사하는 것이리라.
스포츠에 가까운 가싱우리(팽이놀이)
전통 연날리기가 정적인 놀이라면 말레이인들의 팽이놀이는 긴장감과 때로는 위험성까지 수반하는 동적인 경기라고 할 수 있다. 뷔페용 접시 만한 크기에 무게가 무려 5.5킬로그램까지 나가는 말레이 전통 팽이의 제작은 고도의 기술과 정성을 요하게 된다. 팽이는 아무 나무로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통 머르바우라는 종류의 재질이 강한 나무로 만드는데 그 가운데서도 뿌리 윗 부분과 나무 밑둥치의 가장 단단한 부분만이 사용된다. 가싱 이라고 불리는 말레이 팽이는 싸움용과 오래 돌리기 용의 두 가지가 있고 재질에 따라 다시 나무팽이와 겉 테두리를 주석이나 납, 쇠 등의 금속으로 두른 가싱우리로 나뉘어진다. 오래 돌리기 시합용 팽이인 가싱우리는 특히 원반전체의 균형이 완벽하게 잡혀져야 한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팽이는 구심력이 떨어져서 회전을 오래 지탱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팽이 제작에는 약 한 달 가량의 시일이 소요되는데 완성된 가싱의 모양은 흡사 비행접시를 연상시킨다.
연날리기와 마찬가지로 팽이 돌리기는 남자, 그것도 어른들만이 참가하는 경기이다. 그러나 다른 동네와의 시합이 펼쳐지는 날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온 동네 주민들이 모두 참석해서 성원을 보내게 된다. 홈그라운드의 시비를 없애기 위해 시합장은 양쪽 부락으로부터 모두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공터를 선정하게 된다. 한 팀은 보통 5명의 선수들로 구성되어서 모든 선수들이 한꺼번에 팽이를 던지게 되는데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팽이의 임자가 승자로 결정된다. 엄격한 룰에 따라 승자와 패자를 가리게 되어 있는 팽이 돌리기는 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포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접시 만한 크기의 가싱우리를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서는 강한 힘과 함께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자칫 팽이를 던지는 방향이 틀어져서 사람이 맞게 되면 십중팔구 다칠 확률이 높기 때문에 16세 이하의 청소년들은 아예 팽이를 만질 수 없도록 금기시하고 있다. 팽이 줄은 보통 어른 손가락 정도 굵기에 길이가 3미터에 이르는 밧줄을 팽이 윗면 정 중앙의 방추형 굴대에 감아서 던지게 된다. 정성 들여 단단히 감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팽이꾼들의 실력은 줄 감기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팽이 표면에는 밧줄과의 마찰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정글에서 채취한 끈끈이를 바르기도 한다. 밧줄의 한 쪽 끝을 나무기둥에 매어놓은 채 양쪽 엄지손가락을 이용해서 마디마디 정성 들여 줄을 감아나가는 팽이꾼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송 배어 나온다. 부락의 명예를 걸머지고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의 얼굴에는 자못 긴장감까지 감돈다. 줄 감기를 마친 팽이꾼이 잠시 숨을 고른다. 팽이꾼의 왼쪽 전면에는 나무주걱(쪼꼭)을 양손으로 받쳐든 조수(뚜깡 쪼꼭)가 자리를 잡고 대기하고 있다. 보통 팽이놀이 패는 힘이 좋은 뚜깡 가싱(팽이 던지는 사람)과 노련미를 갖춘 뚜깡 쪼꼭, 그리고 뚜깡 쪼꼭을 도와주는 조수 등 3명이 한 조를 이루게 된다.
심판의 신호가 떨어지자 양다리를 넓게 벌린 채 마치 투포환 선수와 같은 자세로 대기하고 있던 뚜깡 가싱의 팔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진다. 긴장된 순간이다. 이윽고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채찍 소리와 함께 팽이가 공중을 난다. 뚜깡 가싱이 익숙한 솜씨로 밧줄을 거두어 들이는 동안 구경꾼들의 눈은 밧줄 끄트머리를 떠난 팽이를 쫓고 있다. 팽이가 땅에 안착했다고 느낄 사이도 없이 어느새 뚜깡 쪼꼭의 주걱은 팽이를 잽싸게 걷어올린다. 그 동안에도 엄청난 회전력으로 맴돌이를 계속하는 팽이를 곧 주걱머리를 가로질러 좁다란 손잡이를 타고 올라간다. 뚜깡 쪼꼭의 기술이 발휘될 차례이다. 팽이를 아무리 힘차게 잘 던지더라도 주걱 위에서 팽이가 낙마하는 날에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때문이다. 뚜깡 쪼꼭은 주걱의 머리를 조금씩 내려 팽이가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오도록 유도한다. 자칫 균형이 흐트러지면 팽이는 여지없이 뚜깡 쪼꼭의 맨발을 때릴 참이다. 그러나 잠시 주걱 끄트머리에서 맴돌던 팽이는 뚜깡 쪼꼭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수의 대나무 봉 위로 살짝 올라앉는다. 대나무 봉의 끝은 가로 세로 5센티미터 가량의 정방형 주석 판으로 마감질 되어 있다. 팽이를 머리에 인 대나무 봉들이 풀밭에 나란히 내려 놓여진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 예의 수다가 시작된다. 팽이가 멈추려면 앞으로도 족히 시간 반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선수들의 눈은 자기 팽이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돌아라, 돌아라 힘차게 돌아라.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 팽이가 맴돌이를 멈추기까지는 2시간이 넘게 걸렸다. 해 그림자가 길게 꼬리를 드리운 논두렁 위 야자나무 사이로 두둥실 초생달 연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