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세계화 시대, 문화첨병들의 눈에 비친 문화의 모습

모로코 페스지방의 전통 혼례




장경호 / 모로코 무함마드 5세대학 박사과정

어서 빨리 '서두르자'라는 뜻의 '모로코'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로코'와 '모나코'를 혼동하여 '모로코'를 카지노와 자동차 경주로 유명한 유흥의 도시로 인식하여 왔다. 하지만 이렇게 연상되었던 곳은 그레이스 켈리 왕비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자리한 '모나코 공국(公國)'이다.

'모로코'는 일찍이 매혹의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가 열연했던 추억의 명화 「카사블랑카」를 통해 알려져 왔지만 아직까지도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나라이다.

북부 아프리카 서쪽 끝단에 위치한 모로코는 북쪽으로는 여성의 바다 지중해를 두고 서쪽으로는 대서양을 끼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정치적 내분을 안고 있는 알제리와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을 사이에 두고 모리타니아와 국경을 두고 있다. 최근에는 휴양의 도시 마라케쉬에서 우루과이라운드 조인식(WTO 출범)과 경제수도인 카사블랑카에서 이슬람권 경제정상회담을 갖는 등 대규모의 국제회의를 개최하여 국제뉴스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모로코'의 대외 공식 명칭은 '모로코 왕국 Kingdom of Morocco'이며 아랍어로는 '알마물라카틀 알마그리비야'이다. 영어식 표기인 '모로코'는 12세기에 알무라비툰 조의 수도였던 '마라케쉬 Marakeshi'에서 비롯되는데 '마라케쉬'는 원래 이곳 원주민 언어인 베르베르어로써 '어서 빨리 서두르자'는 의미를 갖는다. 척박한 사막지역인 모로코 남부 지방에서 시작된 '알무라비툰 조'는 비옥한 북부지역으로의 영토확장과 세력확대를 위해 마라케쉬를 수도로 정하며 북쪽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문화의 이해라는 것은 상호간의 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찾아 연구하여 좀 더 문화의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것인데 이곳 현지 유학생활을 5년 동안 하면서 모로코의 복잡 다양한 문화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풍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의 전통 혼례에서나 볼 수 있는 '가마 타고 시집가는 풍습'이 미지의 서쪽 나라인 이곳에서는 아직까지도 행하여지고 있다. 때마침 오래 전 기숙사 생활 때 같은 반 룸메이트였던 '아흐맏'이 여동생 카디자가 페스에서 결혼을 한다고 하여 핑계삼아 오랜만에 책을 덮고 결혼식에 방문하겠다고 하였다.

모로코의 중추 고도시 페스

이곳에는 주로 7∼8월 한여름에 결혼식들을 하는데 이번에는 조금 이른 4월말에 결혼잔치를 한다기에 아흐맏에게 물었더니 신랑이 여름에 프랑스로 이민을 가게 되어 부득이 일찍 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로코에서의 결혼 잔치는 삼박 사일 동안 이루어지는데 모든 일정에 참여하려면 힘이 들어 주로 외부 축하객들은 마지막날인 토요일 날만 초청한다. 이제까지 결혼식 초청에는 주로 토요일 저녁 한 번만 참여했었는데 이번에는 고도시 페스 지방의 전통이 그대로 담겨진 보수적 집안풍습을 모두 보게 될 것 같아 흔쾌히 초청을 수락하여 결혼잔치 첫날부터 참여하겠다고 하였다.

모로코의 역사를 보면 다른 아랍국가들과는 다르게 각양각색의 인종과 복잡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생한 신생종교 '이슬람교'가 이집트를 거쳐서 이곳 북부 아프리카 일대에 영토확장 및 이슬람화 되기 전에는 일찍이 베르베르족이 원주민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집트 남부 나일강 일대에서 리비아를 거쳐 모로코에 이르기까지 북부 아프리카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서 국가 형태가 아닌 부족 중심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주로 아틀라스 산맥을 중심으로 산발하여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랍인들과는 다르게 유목문화가 아닌 정착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언어는 셈어에 속하는 아랍어와는 상이한 베르베르어를 가지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문자는 고대 예멘 지방의 한 언어인 히마야르어 문자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지난 4월에 알제리에서는 정부 공식언어로 지정한 바 있다. 현재 베르베르족은 튀니지 남부에서 알제리를 거쳐 모로코에 이르기까지 마그레브 전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직까지도 그들은 독특한 자신들의 문화를 영위하며 베르베르어를 아랍어와 병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북부 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은 기원전부터 일찍이 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 반달, 비잔틴, 아랍에 이르기까지 약 3000년 동안이나 외세에 시달려 왔다. 이토록 오랜 세월에 지났음에도 동화되지 않고 문화와 언어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독특하고 강인한 민족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8세기에 모로코 지역은 아랍화 되기 시작하여 마그립 지역 최초로 아랍국가인 '이드리스 왕조'가 건립되었고 이드리스 1세는 788년에 '왈리리'에 수도를 정하고 동부 아랍지역에 있는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와는 다른 형태의 이슬람 신정일치의 통치형태를 갖고 베르베르족들을 아랍인과 동화하도록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드리스 1세는 베르베르 여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얻게 되는데 그는 후에 '이드리스 2세'로서 왕위를 이어받아 807년에 지금의 '페스'로 수도를 옮기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로코의 아랍문화의 기반을 다졌다. 약 12세기에 걸쳐 아랍문화의 전통과 이슬람교의 혼을 이어받아 발전해온 페스는 지금도 '혼의 도시'또는 '교육의 도시'라는 별칭을 갖고 모로코 문화의 자존심을 지켜가고 있다. 19세기초부터 이 지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극성스럽게 괴롭히던 서구열강들 때문에 모로코는 결국 1912년 3월 30일' 페스 조약'을 프랑스와 맺게 되어 프랑스 보호령 상태에 들어가고 말았다. 당시 국민들은 국왕인 무함맏 5세와 함께 페스를 중심 지역으로 하여 조직적이고 포괄적인 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해 나가 결국 1956년 3월 2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무함맏 알파씨'를 배출한 페스 주민들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성향이 강해 1991년 2월에는 현 국왕인 '핫산 2세'에 대한 체제 저항운동을 하다 진압되는 과정에서 약 200여 명이 헬기 기총 사격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갖는 페스는 현재 정계와 금융계에 많은 이들을 배출하여 모로코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개방화되고 서구화되어 연애결혼이 대부분

친구인 아흐맏의 여동생 카디자의 결혼식이 4월 29일 토요일 밤이지만 나는 전통 혼례식 전과정을 모두 지켜보기로 생각하였기에 일찌감치 이틀 전인 목요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살고 있는 모로코 수도인 '라바트'에서 페스까지는 기차로 약 4시간 걸리며 약 300km 동쪽으로 간다.

모로코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상당히 개방되고 서구화되어 최근에는 남녀간에 연애사상이 보편화되어 집안 어른들간에 혼담이 오가는 정략적인 중매결혼보다는 대부분 연애결혼을 하고 있다.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약혼식 전에 먼저 양가 부모들간의 상견례가 있게 되는데 일종의 언약식과 같다. 신랑이 가족들과 함께 신부집에 찾아가 청혼을 하며 미리 준비한 금반지를 신부에게 선물하고 약혼식 날짜와 결혼 지참금의 금액에 대해 합의를 한다. 약혼식 역시 양가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신부집에서 열리게 되는데 이날은 특이한 것이 결혼식 전에 행해지는 우리의 '함'과 비슷한 형태로써 신랑이 신부에게 각종 예단을 전하는 풍습이 있다. 신랑 친구들이 들러리서며 나팔과 북을 두드리면서 신부 집 앞 골목에서 잔치의 흥을 돋우는 소리와 함께 춤을 춘다. 우리의 함 들어가는 날의 소란스럽고 흥겨운 신부 집 앞의 골목길 광경을 연상하게 한다. 예단으로 준비한 것들은 약혼잔치에 사용될 대추야자, 우유, 설탕, 힌나(안료 일종, 잔치 때 여자들 손발에 문신을 그리는 데 사용) 등과 귀고리, 팔지, 반지, 목걸이를 비롯해서 신부 부모님들을 위한 '질레바(전통의상)'등이다. 이때 결혼지참금을 신부 아버지에게 전하는데 대체적으로 서민들의 경우 약 2만디르함(약 2백만 원) 정도이다. 결혼지참금을 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아딜 두 사람(사법서사)이 입회하여 혼인서약서에 금액 및 각종 예단의 내용을 기입한다. 이로써 혼인서약이 끝나면 결혼 잔치만 치르지 않았지 사실상 혼인신고가 되어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것이다.

기차에서 내려 페스의 '메디나 알 까디마(1200년의 역사를 가진 구 도시지역)'에 자리한 신부집을 향하는 길에서 이곳 서민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골목길이 협소하고 구불구불 복잡한 것이 마치 미로 같았다. 골목 모퉁이에 앉아 사탕을 낱개로 팔고 있는 어린아이, 담배를 개피로 팔고 있는 소년, 일명 '택시'라고 불리는 당나귀에 짐을 싣고 운반하는 노인네, 골목마다 오래 된 검은빛의 서까래들이 역사의 흐름을 읽게 한다. 신부집은 5대째 살고 있는 모로코 전통가옥이었다. ꁁ자 형태로써 가운데에 지붕을 두지 않아 햇빛이 들어와 집안 전체가 밝은 편이었다. 대문 위에는 푸른색 기와를 올려 만든 처마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반갑게 맞이하는 아흐맏과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외국인이라 그런지 모두들 반가워하였다.

혼례행사 첫째날은 결혼식을 준비하는 날

혼례행사 첫째 날은 결혼식을 준비하는 날로써 잔치를 앞두고 신부가 아침 일찍 친구들과 함께 '함맘(목욕탕)'에 다녀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후 세 시쯤에 신랑은 '다까끼야'라 불리는 풍물패와 함께 신부집으로 잔치음식에 쓰일 밀가루, 올리브유, 전통 과자류, 설탕, 양(또는 송아지) 등을 용달차에 싣고 방문을 한다. 풍물패의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잔치를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고 잔치의 흥을 한층 돋우어 놓는다. 풍물패의 나팔은 길이가 1미터 50센티미터쯤 되는 것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리만 내는 것인데 부웅∼ 붕 하는 소리가 마을 전체에 퍼진다. 이날은 외부 손님을 초대하지 않고 가족끼리 소규모의 잔치를 갖는다. 집안이 잔치준비로 복잡해 아흐맏이 이웃에게 나의 잠자리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웃간에 잔치를 돕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전통이 우리의 관습과 비슷하다.

둘째 날은 전날 신랑이 가져온 양을 잡는 날이다. 도축허가 없이 양이나 소를 잡을 수 있어 일찍이 관습에 젖어있는 어린아이들을 비롯한 아낙네들도 끔찍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잔치 준비의 한 행사쯤으로 여긴다. 모두들 잔치 준비에 여념이 없다. 어른들을 이웃들과 멀리 있는 친지들에게 내일 있을 결혼식을 알리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날 역시 손님을 초대하지는 않고 양가 모두 따로 친지들을 맞이하여 저녁식사를 하며 소규모의 잔치를 치른다.

셋째 날 드디어 혼례식이 열리는 날이다. 신랑은 저녁 해질 무렵에 친구들과 함께 '함맘(목욕탕)'에 간다. 역시 결혼식을 위해 몸단장을 깨끗이 하는 모양이다. 같은 시간에 신부는 친구들과 함께 미용 실에서 신부화장을 하고 전통 혼례복을 입고 신랑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신랑은 목욕 후에 '질레바(전통의상)'와 '발가(슬리퍼 모양의 전통신발)'를 갖추고 말을 타거나 또는 걸어서 신부가 기다리는 미용 실에 신부용 가마를 가지고 들러리들과 함께 찾아간다. 미용 실에 도착한 후 '암마리야(신부용 가마)'에 신부를 태우는데 이때 특징적인 것은 가마를 지는 사람은 네 명의 정육점 푸주 한들이다. 예로부터 보통 사람이 가마를 지기에는 힘이 들어서 체격 좋은 푸주 한들이 가마 지기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신부는 '타크쉬타(결혼예복)'을 입고 '타즈(금으로 된 왕관)'를 쓰고 '다까끼야(풍물패)'의 나팔소리와 북소리를 같이 하면서 가마를 타고 결혼식이 열릴 신부집으로 들어간다. 이때가 저녁 10시경이다.

신부집에 신랑 신부가 도착했을 때 양가 집안 친지들이 모두 대문 앞에 나와 일행들을 맞이하는데 이때 여자들은 '자그라다'(경사스러운 일에 여자들이 혀로 소리를 낸다)를 외친다. 신부는 가마에 앉은 채로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대문 앞에서 '니가파(가마 지는 여자 네 명의 그룹)'가 푸주 한들로부터 가마를 넘겨받는다. 이제부터 여자 하객들과 남자 하객들이 자리를 구분하여 앉는다. 집안의 거실에서 잔치를 갖는데 대부분의 모로코 집들은 거실들이 상당히 크다. 대개 40∼50여 명이 들어앉을 정도이다. 큰 집 같은 경우 백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다. 손님을 초대하기를 즐겨하고 남에게 자랑과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는 터라 모두들 거실을 크게 만든다. 아흐맏의 집은 오래 된 가옥이라 그런지 비교적 거실이 좁고 집안이 비좁았다. 그 대신 이웃집 거실을 빌려 남자 하객들을 맞이하였다. 점잖은 남자 하객들은 조용히 앉아 신랑 신부와 양부모에게 축하 인사를 하고 그 뒤에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며 담소를 나눈다. 조용한 남자 하객들과 달리 여자 하객들은 3∼4인조 밴드와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면서 흥겨운 시간을 갖는다. 모두들 화려한 '타크쉬타(파티용 옷)'를 입고 있는 터라 아름답게 보였다. 평소의 유흥문화가 잘 발달되지 않은 아랍지역이라 그런지 항상 결혼식 잔치만큼은 아낙네들 중심으로 진행되며,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마치 디스코 클럽이 연상될 정도로 노래하고 춤을 추며 생활의 스트레스를 푼다.

자정을 조금 지난 시간부터 식사를 하기 시작하고 잔치 음식으로는 '바스틸라'가 먼저 나오는데 쌀과 닭고기를 으깨어 속을 만들고 겉은 밀가루 반죽으로 된 과자 옷을 한 것으로써 무척 달다. 일종의 전 식으로 나온 것이다. 주식으로 빵과 함께 '따진(양고기와 감자를 넣어 만든 것)'과 통닭구이가 나온 후 후식으로는 큰 쟁반에 각종 과일을 담아 내온다. 식사 중에 특이한 것이 잔치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모두 젊은 이발사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말끔하게 와이셔츠와 나비 넥타이 차림을 하고 음식들을 하객들에게 접대를 하는데 무척 깔끔한 매너가 고급식당의 웨이터를 연상케 한다. 잔치 집의 부족한 일손들을 돕는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야챠이(모로코 전통 박하 차)'를 마시고 전통 과자류를 먹으면서 남자 하객들은 담소를 즐기는 반면 여자 하객들은 아이들과 함께 계속해서 가무를 즐긴다. 새벽 4시까지 이어지는 잔치의 소란스러움에도 어느 한 사람의 이웃도 불평이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함' 들어가는 날 조금 소란스럽다고 파출소에 고발하고 항의하는 이웃도 있는데 이곳은 아직까지도 이웃의 잔치를 축하하며 자신의 불편을 감내하는 것을 전통 관습으로 갖고 있다. 흐려지는 우리의 전래 풍습이 아쉽기만 하다.

결혼의 공통점은 화려함

새벽 5시경에 잔치를 마치고 신랑 신부는 오색 테이프와 레이스로 치장한 승용차를 타고 빵빵 경적소리를 내며 차량행렬을 하면서 신랑집으로 향한다. 이로써 잔치가 끝나고 신랑 신부는 첫날밤을 갖는다. 아침 10시경에 신혼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의 '씨르왈(속바지)'에 혈이 묻어 있는 초야의 상징을 신랑이 신부 어머니에게 보여준다. 요즘에는 혼전에 관계가 있었을 경우 생략하기도 하는 절차이다. 역사 속에서의 여자의 순결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귀한가 보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에 '쑤므히야'라는 이름의 아침식사를 하는데 간단한 과자와 빵 종류를 신부 어머니가 준비하여 신혼부부에게 찾아와 양가어른과 함께 자리를 하고 결혼을 축하하며 그 동안 잔치의 노고를 서로 고마워하면서 모든 혼례 절차를 마친다. 이로써 새로운 한 쌍의 신혼부부가 탄생하는 것이다. 신혼부부에게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미리 준비해 간 자개 보석상자를 선물하고 아흐맏의 배웅을 받으면서 페스를 떠나는 기차에 며칠간의 잔치에 피곤해진 몸을 실었다. 차창에 기대어 드넓은 대지 위에 펼쳐진 밀밭의 노란 물결을 보면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독특하지만 결혼식만큼은 공통적으로 가장 화려하게 아름답게 장식하려 한다는 것을 느끼며 이번 여정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