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예출, 분장미술의 현대적 개척자
-끊임없는 작품 분석과 연구뿐입니다
서연호 / 연극평론가, 고려대 교수
월남 이전의 활동
서 : 전 선생님을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오래 전부터 제 머리에는 '무대분장'하면 선생님의 이름이 먼저 떠오릅니다. 선생님이야말로 단순한 분장사가 아니라 분장미술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좋은 말씀 듣고자 합니다.
전 : 좋게 평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서 : 선생님이 분장을 시작하신 것은 언제입니까?
전 : 1943년 황해도 황주 농업학교 시절에 학생 극을 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연극이어서 자연 분장에도 관심을 갖게 됐지요. 전예출(全藝出, 본명 全潤信)이라는 예명도 그때부터 쓰게 된 겁니다.
1927년 12월 4일생이니까 16세 때의 일입니다. 농업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서울에서 법정전문학교(광복후의 법정대학)를 다닐 때도 연극을 했습니다. 광복 후에 황주 남자중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연극 반 지도를 맡게 되었고, 자연분장을 비롯하여 모든 분야를 직접 고안해야 했지요. 생물, 국어를 가르쳤지만 미술에도 소질이 있어 나중에는 미술도 가르쳤습니다.
서 : 기성극단 활동을 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전 : 1949년 평양에 있는 북한 교통성 극단에서 1년 정도 활동했습니다. 월남한 김칠성씨와 함께 있었지요. 교사로 재직하면서 청년단운동을 한 것이 사상에 저촉된다고 해서 투옥되었습니다. 당시 이북에서 배우는 사상적 감시를 비교적 덜 받았으므로 출옥 후 배우가 되고자 한 겁니다. 6·25가 나자 다시 검거될 것을 염려하여 고향에 돌아와 숨어 있다가 1·4후퇴 때 월남했습니다.
서 : 교통성 극단이라고 하면 국립입니까?
전 : 남한으로 치면 교통부 전속극단인 셈이죠. 이북에는 각 성마다 전속 극단이 있었습니다. 사상성을 계몽, 선전, 선동하기 위한 극단이었죠. 출옥 후 애초에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국립영화촬영소를 찾아갔는데 거기서 국립극장의 연구생으로 가라는 소개를 해 주더군요. 당시 영화배우로는 월북한 문예봉이 날렸죠. 국립극장 연구생에는 강효실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교통성 극단을 소개해 주어서 연극배우 생활을 하게 된 겁니다.
서 : 그 단체는 어떻게 활약했습니까?
전 : 교통성 전용이니까 배우들은 평소 모든 기차는 무료이고, 사택을 제공하고, 유일하게 사복을 허용했습니다. 기차에는 침대 칸과 식당 칸이 따로 있었고, 세트를 싣고 순회공연을 다녔습니다. 1년 동안 소련 번역극 3편과 「춘향전」을 공연했고 분장은 각자가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 황철 선생 같은 월북한 선배들의 우수한 분장 술을 보고 스스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분장 재료는 거의가 수제품들이었죠.
서 : 6·25 전후의 활동이 궁금합니다.
전 : 항간에 '6·25는 북침이다'라는 설이 있는데 나는 절대 믿지 않습니다. 1950년 6월 23일부터 3일간 우리 극단은 고성의 외금강에서 공연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도중에 원산에서는 17일에 공연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외금강으로 가려 하니까 군용물자를 가득 실은 열차들이 줄지어 남쪽으로 가고 있어서 우리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벌써 분위기를 알아차린 민간인들이 쌀을 사 쟁이기 시작하니까 당국에서는 배급제를 실시했고, 우리 배우들도 줄을 서서 쌀을 받아 밥을 해야 했지요. 모두 나와서 석탄을 푸라고 해서 하루 작업을 하니까 우리가 탄 기차의 이동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하루 밤을 기차에서 지내고 나니 북쪽으로 함흥이었지요. 21일에 함흥 공연하고, 25일에 흥남 공연하고, 다음에 덕원까지 왔는데, 공습경보 때문에 막을 내리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서 : 거기서 어떻게 탈출하셨습니다.
전 : 평양에 되돌아와 보니 사내는 이미 폭격을 맞아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극단 본부에서는 벌써 남조선 서울 공연작품과 배역을 짜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한강」인가 하는 작품으로 어렴풋이 기억됩니다. 고향에 갔다 와서 연습하겠노라고 하고는 그 길로 극단을 이탈했습니다. 황주 우리 집 소유의 과수원 뒤에 선산이 있었는데, 그 조상 무덤 사이에 가묘를 하나 파놓고, 그 속에 숨어서 1·4 후퇴 때까지 피신했지요.
분장가가 되기까지
서 : 선생님 개인뿐만 아니라 연극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군요. 월남 이후에는 어떻게 활동하셨습니까?
전 : 1951년 서울을 거쳐 다시 부산으로 피난했는데, 그 곳에서 김칠성씨를 만났습니다. 교통성 극단의 서울 공연 도중에 탈주했다고 합니다. 기어코 그들은 서울 공연을 한 겁니다. 당시 내가 평양 극단으로 되돌아갔더라면 검거 당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주었지요. 새로 '아랑'이라는 극단을 창단 하여 경상남도에 등록하고 순회 공연했습니다. 악극은 잘 되고 순극은 잘 안 되는 시기여서 우리 단원들은 고생이 많았습니다.
서 : 본격적으로 분장을 하신 것은 언제입니까?
전 : 환도 후에는 영화가 붐이 일어서 일거리가 늘었고 분장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연극이다 영화다 바쁘게 됐죠. 나는 70년대 민중극단에서 이효영씨가 연출할 때까지 연기자로서 활동하면서 분장 일을 겸했습니다. 무대를 포기한 적이 없어요. 현재도 민중극단 단원으로 있습니다. 1953년 극단 '신 청년' 단원, 1954년 '극예술협의회' 회원, 당시 국립극장에는 '신협'과 '민극'이라는 전속 단체가 두 개 있었는데, 나는 신협 단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후 드라마센터 등 여러 극단에서 분장을 지도하고 도와주었지요. KBS가 생기자 분장 전속이 되고, TBC가 생기자 다시 분장 전속이 되고, 두 방송이 통폐합되고 다시 KBS에서 일하다 1988년에 사표를 냈습니다.
서 : 분장을 배우는 과정에서 특별히 누구의 지도나 영향을 받으셨는지요?
전 :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북한에서 황철 같은 원로들의 영향은 받았습니다만, 특별히 지도를 받은 적은 없고 스스로 노력하고 연구했습니다. 백지상태를 개척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언제나 일이라기보다는 내 소질과 취향에 맞기 때문에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한 오 년만 하고 다시 본격적으로 연극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분장으로 더 알려지니까 자연 이쪽으로 치우치게 된 거죠. 한참 바쁠 때는 국립극장, 방송국, 예그린악단, 서라벌예대, 동국대연극과, 한양대 연극과 등 동시에 아홉 군데에서 분장 지도해 준 적도 있었습니다. 수입 면에서도 배우보다 나으니까 연기에 전념하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서 : 이렇게 훌륭한 학원을 내고 계신데……
전 : 아직은 학원이 아니라 내 사무실이자 작업장입니다. 앞으로는 '프로 메이크업'이라는 학원으로 공식인가 받아 등록할 예정입니다. 지금도 배우고 있는 연구생 제자들이 있습니다. 15명 정도가 1년 코스로 실기위주 지도를 받죠. 1년 지나고 나서 더 하고 싶은 사람은 1년을 추가하게 되죠. 잘하는 제자들은 내가 작업할 때 참여시켜서 현장에서 실제로 익힐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항상 실기를 중시하기 때문에 제자들의 능력에 빠르게 신장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 : 대표적인 제자랄까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으실 텐데요?
전 : 연극계, 방송계, CF계해서 대부분이 내 손을 거쳐간 사람들입니다. 장우식, 박수명, 구유진 등 상당수 됩니다. 요즘도 월 평균 한 작품 정도하고 있는데, 가령 오페라 같은 큰 작품은 40여명의 제자들이 모여 나를 도와줍니다. 하나의 분장미술그룹이라 할 수 있지요.
서 : 분장용 재료는 수준이 어떻습니까?
전 : 1978년까지는 모든 재료를 내가 직접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80년대 들어와서야 외국에서 수입되기 시작했죠. 지금은 수입 의존도가 높은데 실제로 수요되는 재료를 만들어낼 만한 전문가도 부족하고 또 개발비, 제작비가 비싸니까 어쩔 수 없이 수입품을 쓰는 거지요. 그렇지만 수입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 실정에 맞지 않은 점이 많습니다. 지금도 내가 만들어 쓰는 재료가 허다합니다. 현재 재료 수준은 우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 :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분장미술만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분장재료를 실제적으로 연구하시고 개발하시고 제작해 오셨군요. 정말 몰랐던 사실입니다. 재료들은 대부분이 피부에 관계된 것들이어서 인체생리학적인 과학지식이 상당히 필요할 텐데요?
전 : 아시는 대로 화장품 만드는 방법은 어느 나라든 그 노하우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어느 서적에도 자세히 안내해 놓은 데가 없어요. 그러니까 스스로 할 수밖에 없지요. 엄청난 부가가치가 있는 산업이니까…… 실제로 나는 화장품 생산을 한 적이 있습니다. 1952년에는 '오페라 립스틱'이라는 이름으로 가내수공업을 했는데 케이스를 잘 만들지 못해서 성업을 못하였고, 1956년에는 '속눈썹'을 생산했는데 혼자서 관리가 어려워서 그만두었죠. 70년대 가발산업이 유행하기 2년 전에 벌써 가발을 할 기회도 있었지만 별로 돈에 욕심이 없다보니 그냥 지나쳤습니다. 연극은 내 운명입니다.
서 : 선생님이 작업하시는데 도움을 받은 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전 : 1936년 니시자와 유시치가 쓴「화장품 제조학」이라든가 1967년에 기타도리 요시가 번역한 빈센트 기호의「메이크업의 기본과 실제」같은 책이 기억납니다.
서 : 현재 우리나라의 메이크업 교육 수준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분장미술계의 현실
전 : 메이크업을 가르치는 학원이 한 30개쯤 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교육자들의 자질이 문제입니다. 적어도 실기를 10년 이상 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경우는 40년을 해도 아직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많습니다. 화장품의 원리와 피부학, 인체생리학과 모질, 인체해부학, 관상학 가운데서 인상학 등 전문적인 영역의 전체를 알아야 하는 겁니다.
수요가 갑자기 늘다보니까 비전문적인 사람들이 겁 없이 학원을 내고 책을 내고 야단들입니다. 내가 보기로는 일본의 경우도 크게 발전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특수분장으로는 미국의 할리우드가, 일반 메이크업으로는 유럽이 발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유학을 하려면 그런 데서 하는 것이 좋겠지요.
서 : 선생님께서 체험을 바탕으로 좋은 책을 내시고 아울러 좋은 제자들을 키워 주시면 하고 우리 연극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전 : 나는 금년까지 현역을 하고 물러날 예정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내 마지막 과제는 그간의 체험과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메이크업 책을 한 권 잘 만들어서 후학들에게 남겨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년부터는 착수하고자 합니다. 물론 해당 전문가들의 자문도 받고자 합니다. 전문가가 존중되는 사회, 예술계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 : 겸손의 말씀을 하셨지만 실제로 저는 선생님 작품의 예술성이나 기술 수준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전 : 1979년에 방송국 일로 일본에 가서 메이크업 계를 돌아보고 우리와 비교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외국에서 공연단체가 자주 오는 편인데 대개 나에게 일을 부탁하는 편입니다. 그들이 나를 좋게 평가해 줍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빨리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통적 기술도 재료도 없는 현실에서 재빠르게 고안해내고 만들어내야 했고, 아울러 공연이 잦다보니 많이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장기공연 위주인데다 전문가들이 여럿이니까 어느 분장가도 나처럼 많이 재료를 만들어 보고 실험해 볼 수 없는 거지요. 생방송 시기에는 현장에서 분장을 해주고, 그 자리에서 작품을 감상하면서 결과를 스스로 반성하고 다시 연구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숨가쁜 나날이었지요.
젊은 세대들에게
서 : 분장미술을 공부하고 있거나 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출발 선상에서 명심해야 할 자세를 지적해 주십시오.
전 : 먼저 이 방면에 대한 자기 적성이나 소질을 확인해야지요. 교육비용도 부담이 많습니다(현재 도구와 재료의 준비금, 등록금 합계가 연간 최소 1천만 원 정도 소요됨). 그러니 단순한 호기심이나 허영은 금물입니다. 다음에는 이 분야에 대한 분명한 직업 관과 창의적인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인내력을 가져야 합니다. 불굴의 인내력을 가지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누구나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실제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미술대학 출신이라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술이 기초가 되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분야니까요. 마지막으로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서 기초를 정확하고 튼튼하게 실제적으로 익히는 길이죠.
서 : 그렇다면 분장예술에 있어서 독창성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전 : 결국 독창성 있는 분장이 가능해져야 한 예술가로 인정되는 거지요. 단순한 분장사는 그저 기술자에 불과하죠. 끊임없는 작품분석과 연구, 실험뿐입니다. 순수한 예술정신에 불타야 합니다. 근자에는 특수분장이 첨단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이기에 특수촬영, 컴퓨터 처리 등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서 : 여러 가지 말씀 감사합니다. 그 동안 선생님의 노고에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 선생님의 개척적 업적은 우리 예술사에 길이 남을 것으로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