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리의 도전, 진지한 극 아직도 가능한가?
-극단 비파의 「메카로 가는 길」
김윤철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다작 연출가, 번역가로 비교적 단단한 이름을 갖고 있는 김철리가 드디어 1년이 넘는 침묵을 깨며 무대에 복귀했다. 비파(非派)라고 하는 색다른 이름의 극단을 창단한 것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이 극단의 탄생은 주목된다. 첫째, 창립공연으로 발표하고 있는 「메카로 가는 길」이나 앞으로 공연할 예정인 작품들, 이를테면 입센의 「존 가브리엘 보크만」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 희랍의 비극작가 이스킬러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등의 면면을 살펴보면 김철리의 연극 관에 변화가 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지런한 연출가는 그 동안 희극적인 연극을 연출했을 때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그의 연출 범위는 상당히 폭이 넓어서 비극, 희극, 진지한 극, 감상적인 극 등을 두루 포함했다. 즉 그는 특정형식을 가리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연출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비극 또는 진지한 극 쪽으로 궤도를 고정시키고자 하는 뜻이 역력하다. 경박한 글쓰기와 천박한 무대 만들기, 상업적인 기획이 잘 팔리는 요즘의 연극세태에 비추어 이는 분명 시대를 역행하는 미학적 도전일 수 있고, 오락성보다 교훈성을 강조하여 연극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도덕적 판단일 수 있다. 연극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의 도전과 판단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김철리는 창단사에서 '사장되어 있던 혹은 새로이 탄생되는 소중한 한국희곡'도 무대화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왠지 그는 번역극에 치중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왜냐하면 월북극작가들의 희곡을 빼고 나면 '사장되어 있는' 한국희곡이 그렇게 많지도 않거니와 '새로이 탄생되는' 창작극도 '소중할'만큼 작품성이 뛰어나야 할텐데, 극의 문학적 깊이를 따지는 이 까다로운 연출가를 만족시킬 만한 작품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더구나 김철리는 연출가의 해석적 기능에 충실하여 다른 연출가들처럼 작품을 뜯어고치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얼핏 번역극을 중심으로 작업하겠다는 그의 선택은 쉬운 길을 가려는 안이한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창작극이 번역극을 수적으로 압도하고 관객의 반응도 더 호의적인 요즘의 연극경향을 감안할 때 번역극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선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극단 비파가 창단 공연으로 대학로의 성좌소극장에서 발표하고 있는「메카로 가는 길」은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측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즉 대단히 진지한 번역극이다. 작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낳은 세계적인 극작가 아돌 후가드. 때때로 자기 작품에 출연도 하고 연출도 하는 만능 연극예술가다. 후가드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되는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독재하에서 핍박받는 흑인들의 정치적, 경제적 의식화를 목표하는 그는「아일랜드」,「핏줄」,「해롤드 주인님과 하인들」등의 극들이 유신 이후 한국의 실질적 군사정권 하에서 가장 인기 있는 번역극 레퍼토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선 그렇다. 무대를 만들었던 연극인들이나 공연을 봤던 관객들 모두 백인치하의 흑인과 군사독재하의 한국인을 동일시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소망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적 풍경에 문민적 색채가 짙어지기 시작하면서 후가드의 관객 흡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흑백 초상은 정치적이기는 해도 항상 인간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으로까지 심화되는데, 한국의 정치적 '후가드 읽기'가 그만 보편적 후가드를 외면한 꼴이 되고 말았다.
비교적 최근(1985년)에 쓰여진 이 극은 남아프리카의 불행과 수치의 원인이었던 인종차별을 소재로 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후가드적이지 않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획득되는가를 주제로 다룬다는 점에서는 매우 후가드적인 작품이다. 세 명의 백인인물들만 등장하고 여성들이 중심인물이라는 점에서는 또한 후가드적이 아니다. 그러나 상징이 풍부한 사실주의, 외적인 행동보다 심리적인 행동에 바탕을 둔 극의 구성 등 체흡적인 극작 기법으로 미루어보면 또 대단히 후가드적인 작품이다.
극의 기본 틀은 삼각관계다. 즉 과부 헬렌(전경자)을 가운데 두고 진보적인 그녀의 젊은 친구 엘사(이현순)가 보수적인 목사 마리우스(정명철)가 경쟁한다. 남편을 사별한 지 15년이 지난 과부 헬렌은 교회출석을 중단하고 올빼미, 공작, 피라미드, 낙타, 인어 등의 기이한 조각품들을 만들어 집 안팎을 자기만의 메카로 만든다. 교회가 관습과 순응을 강요한다는 측면에서 그녀에게 구속을 상징한다면 그녀의 집은 자기만의 상상으로 구축한 자유와 이상의 세계를 대신한다. 문제는 그녀가 누리는 자유와 고독을 담보로 한 자유라는 데 있다. 그래서 나이 든 그녀는 때때로 자유를 즐기기보다 고독에 더 절망하여 죽음을 소원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녀를 여자로서 은밀히 사랑하는 마리우스 목사는 그녀를 양로원에 입원시켜 자기 곁에 안전히 두려고 하고, 그녀를 친구로서 사랑하는 엘사는 독립을 주장하며 메카를 지킬 것을 호소한다. 헬렌은 자유를 포기하고 양로원에 들어가 육체를 연명하며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그녀만의 공간에 머물러 불안과 고독을 무릅쓰고 자유를 지킬 것인가, 두 가지 선택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안전과 구속 대신 고독과 자유의 길, 즉 궁극적인 자기 구원의 길을 용기 있게 선택한다.
「메카로 가는 길」의 묘미는 극이 헬렌의 통과의례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양쪽에서 잡아당기고 있는 엘사와 마리우스에게 극적인 힘을 안배하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흥미로운 태도를 부여한 데 있다. 엘사는 사랑에 배반을 당해 실패하고 그 결과로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다. 그러면서 인생의 형식은 '인내'임을 발견한다. 한편 마리우스는 헬렌의 눈부신 자유를 선망하면서도 결국은 관습적 교회의 교리와 구속적인 안정을 택함으로써 관객에게 과연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롭기를 원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회의를 품게 만든다.
귀신놀이를 하는 미국의 할로윈 데이 때 펌프킨에 구멍을 뚫어 도깨비 모양을 만든 다음 그 안에 촛불을 밝혀 만드는 재커 랜턴에서 착안한 듯한 이태섭의 무대는 헬렌의 조각품들을 우상으로 매도하는 관습적 기독교인들의 편협한 의식과, 수많은 구멍들을 통해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헬렌의 정신세계를 효과적으로 대비시켰다. 또 여덟 개의 거울들을 방안 곳곳에 설치함으로써 헬렌의 자기응시를 돕고 또한 그녀가 그토록 희구하는 구원의 빛을 몇 배로 확대한 것도 적절한 처리였다. 다만 거울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희망하는 효과를 충분히 거두지는 못한 것은 아쉬웠다.
자유로운 괴짜이면서 홀로 서기에는 연약한 듯한 헬렌의 순수하고, 다치기 쉽고, 시적으로 활발하지만 현실적으로 소극적인 성격을 전경자는 아마추어답지 않게 강한 집중력과 충만한 진실 감각으로 육화해냈다. 남의 비참에 대한 이타적 아픔과 자신이 몸소 겪은 삶의 아픔을 억제하면서 구원과 자유의 대가로 고독과 독립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페미니스트 엘사를 맡은 이현순은 대사의 논리적 전달에 너무 치중했고, 헬렌에게 오랫동안 연정을 품어왔지만 교회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진실을 숨겨왔던 마리우스 목사 역의 정명철은 인물의 정서에 진입함이 없이 노인을 연기하는 데 그쳤다. 세 역할이 모두 복합적이고 상충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전경자는 내성적인 헬렌을, 이현순은 분노한 엘사를 , 그리고 정명철은 변명하는 마리우스를 단색 적으로 그릴뿐이었다.
인물과 인물 사이의 복잡한 심리적 관계와 그 발전 양태를 정서적, 시각적, 시간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것은 상당부분 연출자 김철리의 책임이다. 그는 인물들의 심리적 행동에 유기적 생체리듬을 주입하지 못하고 언어전달에 매달린 채 2시간 15분 동안의 긴 공연을 끌고 갔다.
엘사를 연기하는 이현순과 헬렌을 연기하는 전경자의 자연 연령은 크게 무리가 없었으나 마리우스와 정명철의 연령 차이는 경험 적은 배우가 극복하기에는 너무 컸다.
그러나 이 경박한 시대에 진지한 연극을 만든다는 것은 진정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극단 비파의 앞날을 주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