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우리 영화

흥행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한국영화




오정국 / 문화일부 기자

한국영화가 상반기 흥행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부진을 면치 못하던 방화가 5월로 들어서자 비로소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신인 홍광훈 감독의 「닥터 봉」과 김영빈 감독의 「테러리스트」가 연일 '만원사례'의 즐거운 비명을 올리고 있다.

이 두 작품이 상반기 흥행 최고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가운데 강우석 프로덕션의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를 비롯 우진 필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주식회사 자미안훼미리의 「피아노가 있는 겨울」등이 잇따라 개봉되어 6월의 극장가를 다채롭게 수놓고 있다.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가 가정주부 등의 성인 층을 겨냥한 멜로드라마라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웅장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미스터리 물이며 「피아노가 있는 겨울」은 한 젊은 여성의 사랑과 죽음을 테마로 해서 관객들의 눈물을 쏟게 하는 멜로물이다.

이 중 김동빈 감독의 데뷔작인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는 이른바 '미시족'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특히 눈길을 끈다. 처녀 같은 주부를 가리키는 미시족의 불륜을 다룬, 사실상 엄청난 논란거리를 안고 있는 작품이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친구 사이인 두 명의 기혼녀와 역시 친구인 두 명의 기혼남이 미팅을 하듯 서로 만나 사랑에 빠져들고 불륜으로 표현되는 육체적 사랑까지 나누게 되며 끝내는 제 갈 길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아동도서 출판사의 일러스트레이터로 등장하는 최진실과 외환달러인 이경영이 한 팀, 그리고 가정주부로 등장하는 정선경과 잡지사 기자인 김의석이 또 하나의 팀을 이루어 이 영화를 이끌고 간다.

이 두 팀의 사랑의 방식은 판이하다. 한 팀(최신실·이경영)은 밀회를 즐기지만 육체적 사랑을 최대한 절제한다. 그러나 또 다른 팀은 만나자마자 격정적으로 가까워져 육체를 불태우며 호텔 등 숙박업소를 전전하는 걸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간절한 사랑의 표현이며 방식이라고 믿는다.

외화엔 흔히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영화가 방화란 사실이다. 관객들은 불륜의 현장을 지켜보며 그들의 섹스 장면을 즐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 속에선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최진실은 남편이 '그 동안 자기에게 여자가 있었다'고 말하자 그녀 또한 남편에게 '자신에게도 남자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때, 남편의 태도가 이 영화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논란거리다.

남편은 아내의 고백을 듣고 방안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던지는 등 자신의 마음을 가누지 못해 일대 소동을 피운다. 그러나 차츰 마음을 가라앉혀 아내를 껴안는데, 바로 용서를 한다는 의미였다. 이 장면이 바로 우리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것일까. 아니면 영화에서만 발생하는 특이한 사례에 불과한 것일까.

이에 대한 결론은 관객의 몫이다. 이 작품은 단지 질문만 던져놓고 끝나버린다. 전체적으로 화면구성이 좋다. 신인감독의 데뷔작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화면이 정돈되어 있고 부드럽고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영화 전체가 도시적이고도 세련된 멋을 풍긴다. 기혼녀와 기혼남의 애정행각이지만 추하지 않게 그렸다는 게 특히 돋보인다. 관객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눈요기 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두 팀이 모두 탈선에 이르도록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진우 감독이 10년만에 메가폰을 잡은「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김진명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그 스케일 면에서 일단 관객을 압도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주공간을 유영하는 비행물체를 통해 한반도가 내려다보이고 곧바로 서울의 유흥가 한복판에서 폭력조직의 두목이 살해된다. 이 사건을 접한 신문기자의 추적에 의해 이 살인사건의 배경엔 또 다른 엄청난 사건이 도사리고 있음이 밝혀진다.

바로 1978년 북악 스카이웨이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핵 물리학자 이용후 박사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핵을 개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건기자 권순범(정보석 분)은 이용후 박사의 딸이 거주하는 미국을 비롯 프랑스, 폴란드, 인도 등을 다니며 이박사의 죽음이 한국의 핵 개발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음모에 의해서 빚어진 사건이라는 걸 밝혀낸다. 그리고 인도에서 코끼리 상으로 위장하여 몰래 들여온 핵의 원료 플루토늄이 청와대 앞뜰의 코끼리 상 안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음을 알아낸다.

영화는 이 같은 스토리를 긴박감 있게 펼쳐낸다. 원작소설처럼 추리와 추리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관객들을 잠시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후반부에 이르면 영화는 그만 만화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차라리 위에 나열한 스토리에서 영화가 끝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갈수록 더해간다. 후반부의 스토리의 이러하다. 러시아 대륙 개발경쟁에서 한국에 고배를 마신 일본이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로 한국 땅을 폭격한다. 이에 이미 핵 보유국이 된 한국이 일본열도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한다. 일본의 군사기술로는 격추시킬 수 없는 미사일이 일본열도로 시시각각 접근해가자 일본수상은 결국 한국을 공격한 데 대해 사과를 하게 된다.

이런 만화 같은 스토리를 전반부의 긴장감과 사실 감을 그대로 떨어뜨려 놓고 만다. 객석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게다가 이덕화가 2천년대의 대통령으로 등장하는데, 표정은 물론 그의 연기 또한 너무 과장되어 있어서 객석의 실소를 자아낸다.

정보석, 황신혜, 박근형, 정진수, 이성웅, 이낙훈, 전무송, 김성원, 전복원……20여 명의 배우들이 등장해 화려하게 화면을 장식하고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화면이 눈길을 끌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좀더 밀도 있는 구성이 아쉬웠다. 특히 후반부의 처리가 아쉬움을 더해주었다.

이와 함께 조금환 감독의 「피아노가 있는 겨울」은 전형적인 멜로물이다. 한 남자(강석우 분)를 둘러싸고 두 여자(오연수, 지수원)가 사랑게임을 벌이는데, 이들 여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해서 함께 살게 된 자매들이다. 결국 동생인 여자가 암에 걸려 죽어간다는 그야말로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이다. 그리고 상투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관객들은 눈물을 흘린다. 시종 관객들의 원초적 감정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 그리고 죽음'이라는 테마는 언제 봐도 슬프고 아름답고 눈물겹다. 이 작품은 사실상 여기에 기대고 있는 셈인데, 오연수의 발랄하고도 성깔있는 연기에 비해 후반부의 전개가 너무 느려 관객들에게 억지 눈물을 강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겨울 나그네」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강석우의 우수 어린 눈빛과 안정된 연기, 지수원의 차분한 연기도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살려 주었다. 그러나 주인공이 암을 선고받고 난 뒤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가 너무 길게 펼쳐져 그야말로 가슴 뭉클한 감동 작이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