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관

베니스, 빛과 색채미학의 도시

-베니스 비엔날레 1백년의 발자취




서성록 / 미술 평론가

베니스, 미술의 고장

베니스 비엔날레는 미국의 휘트니 비엔날레, 브라질의 상 파울로 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 중 하나로 손꼽히는 국제전이다. 국제전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또 권위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 베니스 비엔날레인데, 그 시발은 1895년 이탈리아 국왕 부처의 결혼기념을 축하하기 위해 창설된 데서 연유한다. 그후 '비엔날레'의 어원이 '베네치아'에서 유래하였을 만큼 이 전람회는 국제미술계에서 독보적 지위를 누리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베니스는 옛부터 미술의 고장이었다. 벨리니, 지오르지오네, 티치아노 등이 베니스 출신이며, 이들은 이탈리아 친퀘첸토 시대를 주도한 거장들이었다.

물론 이처럼 베니스가 많은 거장들을 탄생시킨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을 생각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 일찍이 경제적으로 부유했다는 점을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16세기의 빛나는 융성은 베니스가 비단과 자본의 주요 공급자로서 해이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와 공교롭게도 맞아떨어진다.

어쨌든 베니스의 이러한 경제적 부흥과 비례하여 이룩한 예술적 부흥은 주로 미술을 중심으로 말해지는 경우가 많다. 미술가의 숫자가 꾸준히 증가했고 위대한 천재의 다량 배출, 각국의 미술에 끼친 영향 등 베니스의 지배력은 실로 막강했다.

베니스를 중심으로 펼쳐진 미술은 이탈리아 다른 지역과 약간 다르다. '물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베니스만이 지닌 아름다운 풍광은 결국 '빛과 색채'의 회화를 탄생시켜냈다. 당시 피렌체의 모든 회화가 '선적 유형'을 갖고 있었는데 비해, 지오르지오네와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선과 윤곽은 두 번째가 되고, 제일 중요한 것은 색채가 되었으며 이러한 색채 중심의 회화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해변에 반사되는 눈부신 베니스의 맑은 빛에 연유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색채 중심의 회화는 17세기의 네덜란드, 19세기의 프랑스를 거쳐 미술에 '베니스 양식'을 확고한 방법론으로 뿌리내리게 했을 정도였으니 그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는 눈을 감고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문화행사와 관광의 접목

상업의 중심지답게 베니스는 비엔날레의 창설 당시부터 행사를 관광과 연계시키는 '민첩성'을 발휘했다. 말하자면 님도 보고 뽕도 딸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가령 전시일정을 관광 시즌에 맞추어 여는 것이나 미술을 비롯하여 영화, 건축, 음악, 연극 등 여러 문화행사를 곁들여 개최하는 것, 그리고 이벤트를 국제적 규모로 개최해 여러 문화행사를 곁들여 개최하는 것, 그리고 이벤트를 국제적 규모로 개최해 여러 나라의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유럽의 각 도시들이 마련하는 문화행사, 가령 '칸느 영화제'나 '아비뇽 연극제' 등이 관광시즌에 맞추어 행사를 개최하는 것도 베니스 시의 비엔날레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1백년의 전통을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열린 행사가 모두 순탄하게 치러진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정치의 노리개로 악용된 적도 있으며 근래에 와서는 비엔날레가 지나치게 상업화되어 취지 자체가 퇴색해 버렸다는 비판의 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국제미술의 판도를 조감 또는 예감케 해준다는 점 때문에 베니스 비엔날레는 거뜬히 그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단면적이긴 하나, 그간의 발자취를 살펴보면서 이 비엔날레가 치른 몇 가지 우여곡절 및 추이를 알아보기로 하자.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은 아무래도 무솔리니 집권 때일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2년에 치러진 행사이다. 그 당시에는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주축국 위주로 비엔날레를 개최함으로써 미술을 파시즘의 선전도구로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탈리아를 강타한 미래파는 휠씬 전부터 파시즘과 화가들은 무솔리니 정권을 적극 옹호하고 있었다. 1932년 비엔날레에 출품된 R. A 베르텔리의 「무솔리니의 두상」은 미래파와 파시즘이 얼마나 밀착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무솔리니를 마치 불사조 같은 존재로 묘사하였다.

스스로 '유럽의 카페인'이라 불렀던 미래파의 우두머리 마리네티는 한술 더 떠서 전쟁을 미화하는 극렬성을 서슴지 않았다. 파시즘과 미래파를 동일시한 것은 아니지만, 벤야민이 '예술지상주의의 막바지'라고 적절히 묘사했듯이 그는 인체의 기계화, 속도와 전쟁, 그리고 지배를 예찬하면서 전쟁을 심미화하는 경향을 띠었다. 뿐더러 미래파 화가들은 미래파 양식으로 제작된 벽화, 몽타쥬, 조각 등을 통하여 파시즘을 예찬하였다.

파시즘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미술의 매력은 바로 그 현대적인 속성에 놓여 있었다. 마치 파시즘이 정치역사의 갱신을 약속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미술은 문화사의 갱신을 예고했던 바, '베니스의 골동품 위조가들을 몰아내고 군사도시, 산업도시로 만들 것을 준비하자'는 미래파는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는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베니스 비엔날레는 '특단 조치'를 스스로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과거의 얼룩을 말끔히 지워 이미지를 쇄신해야 했고 게다가 1951년에는 '상파울로 비엔날레', 1956년에는 '카셀 도쿠멘타'가 창설되어 다른 국제전과 경합을 벌이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국제전이 최후의 해빙 무드를 타고 속속 창립되자 국제전의 양상은 종전의 독주향상에서 경쟁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국가의 영향력을 일체 배제하고 전문 커미셔너제를 도입하는 운영상의 변모를 꾀하는 등 베니스 비엔날레도 공정성과 객관성을 갖추는 데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베니스 비엔날레가 지금과 같은 유수의 비엔날레로 자리 매김을 하는 데에는 국제미술의 흐름에 신속히 대응하거나 적극적으로 주도해간 것이 주요했다. 그 단적인 예가 60년대 중반 미국의 라우센버그에게 회화상을 수여해 팝아트를 공인하여 세계 미술판도를 뒤바꾸어 놓은 일이다.

라우센버그는 미국 미술사에 있어서 출중한 기량을 발휘하였던 작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에는 상투적인 진부함이나 자기풍자가 시적 통찰력과 충동적인 창의력과 결합되어 있었다. 사실 라우센버그는 전통적 의미의 회화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 점 때문에 모더니즘 비평가들로부터 쏟아지는 온갖 비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대가로서의 자질을 인정을 받는데까지 시간이 많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베니스 비엔날레는 그에게 응분의 보상을 해준 셈이다. 자신이 덧없는 상업의 메시지와 폐기물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라우센버그는 뒤상이 「레디메이드」나 슈비터스의「메르츠바우」처럼, 자신의 직업을 일상의 물체로 굵어 모으거나 쌓아올리는 것으로 일관했다. 그의 직업에 '오브제의 팔레트'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이로써 회화와 조각의 전통적 제약을 허물고 삶의 모든 측면이 예술 속으로 동화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80년대에 들어와 베니스 비엔날레는 이미 진행중인 흐름의 추인이 아니라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키는 추인이 아니라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키는 산실로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그리고 그같은 노력의 결과로 맺어진 것이 이른바 '신표현주의'이다.

신표현주의는 1980년 봄에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를 이 미술의 원년으로 삼는다. 이탈리아의 비평가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 Achille Bonito Oliva와 프리랜서 큐레이터 제랄드 스츠만 Gerald Szeemam 두 사람은 본 전시와는 별도로 특별전을 꾸몄는데 특별전에 「오픈 80」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전시에는 이탈리아의 '3C'로 통하는 쿠치, 키아, 클레멘테를 비록하여 미국의 혈기왕성한 제드 가렛, 브라이언 헌트, 로버트 쿠스너, 수잔 로센버그, 줄리앙 슈나벨, 네드 스미스, 이 외에도 독일의 바셀리츠, 키퍼가 각각 출품하였다. 나중에 이탈리아 작가들은 '트랜드 아방가르드', 미국 작가들은 '뉴 이미지 페인팅', 독일 작가들은 '신표현주의'로 각각 다르게 불리워지게 되나, 이 전시를 계기로 그간 '국제적 양식'으로 공인되었던 미니멀리즘과 그 잔재에 쐐기를 박고 이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푯대를 세우는 알찬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물론 새 미술의 흐름만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그간 미국 독주의 흐름에 제동을 걸고 지역 할거주의를 추인하려는 치밀한 의도가 함축되어 있었다. 특히 이런 움직임은 유럽 국가들일수록 더욱 분명했는데, 유럽 국가의 일원으로 이탈리아가 그 총대를 메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탈리아야말로 유럽 문화의 발상지로서 로마, 르네상스와 같은 찬란한 문화유산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금세기에 들어와 미술의 주도권을 미국에 빼앗겼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픈 80」은 이탈리아가 현대미술에 화려하게 복귀하는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일대 사건에 다름 아니었다. 실제로 이탈리아 '트랜스 아방가르드'에서 보이는 고전양식의 차용과 복고풍 색채, 그리고 사실적 묘사 등은 '현대판 신고전주의'라 할만큼 강한 지역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약간 다른 얘기이기는 하나, 1986년 베니스에서 훌텐 Pontus Hulten이 기획을 맡아 열린 「미래파와 그 분파 Futurismo & Futurimi」전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는 행사였다. 흥미롭게도 이 전시에는 무솔리니에게 자동차, 트럭, 그리고 전투기를 헌납했던 피아트사가 다시 후원자로 나섰다는 것은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지만 말이다. 지역주의가 어느 정도 숙성되자 이제는 그와 관련된 좀더 광의의 시각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자각은 1993년 제44회 행사를 계기로 본격화된다. 이때 비엔날레의 주제는 '예술의 방위', 즉 예술의 동서남북으로 서구 중심적 시각에서 비서구문화의 것도 의식하려는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행사의 기획자로는 「오픈 80」의 기획을 맡았던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가 나섰다.

그는 전시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과학기술과 통신술의 발달로 지구촌 개념이 낯설지 않은 오늘날, 예술도 한정된 지역성을 벗어나 서로 다른 문화권의 작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예술가들도 한 곳에 집착하기보다는 '문화의 유랑자'처럼 시야를 넓혀가야 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이 전시를 통해 독일 제국의 부활을 신랄하게 고발한 한스 하케와 역시 독일 국적을 가지고 참가하여 전시관 주위의 산책로를 '동서문화의 실크로드'로 간주하여 동서의 화해와 상호존중, 교류를 표현한 작품으로 백남준이 최고 전시관상을 받았음은 변모하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측면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1백주년을 맞는 올해, 우리나라는 뜻깊게도 한국관을 개관해 국제미술계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아시아 국가로는 두 번째로 개관된 한국관은 흥미롭게도 베니스 앞바다로 출항하는 배의 모양을 본떠 지었다고 한다. 앞으로 그 배가 지중해뿐만 아니라 대서양, 태평양을 종횡무진 누빌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비단 필자의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