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의 사람들. 5

여운덕, 무대작화의 현대적 개척자

-잘 그려야 살아 남는다




서연호 / 연극평론가, 고려대 교수

작화가가 되기까지

: 문화예술지를 통해서 여운덕(1942. 7)씨를 만나 뵙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평소에 저는 무대 디자인만 있으면 무대미술이 대충 다 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디자인을 가지고 실제로 무대 배경그림을 그리고 또 제작한 장치에 칠을 해내는 역할에 대하여는 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운덕씨가 바로 이런 작화부문의 일인자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정말 장치실에서만 작업하니까 일반 사람들은 물론 국립극장 내에서도 서로 잊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무대작화를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 KBS가 공사화 되기 전인 1972년부터 방송국에서 무대작화를 시작했습니다. 1975년에 이 국립극장으로 오게 됐고요. 23년 한 셈이죠.

: 작화를 배우게 된 과정을 소개해 주십시오.

: 제 고향은 충북 영동입니다. 청년기에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생활이 어려워서 전주 외삼촌댁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별로 할 일이 없어 상경하여 영화관에 들어가 심부름을 하게 된 겁니다. 마포의 경보극장, 불광동의 불광극장, 종로의 피카디리극장 등에서 일하면서 앞으로 살 길을 찾고 있을 때 영화간판을 그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깨너머로 익히고, 선배들이 선을 그려주는대로, 혹은 지시하는대로 칠을 하기 시작하면서 배우게 됐죠. 애초부터 생활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했습니다.

: 간판화가로 독립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 방송국에 들어가기 전에 퇴계로에 아데네극장(현 극동극장)에서는 제가 책임자로 독립했습니다. 4인이 한 조가 되어 작업했는데, 돈은 한 프로당 얼마씩 받는 경우와 월급제가 있었죠. 저는 월급제로 월 20만원 정도였습니다. 많이 받은 편입니다. 그때는 극장 간판화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 방송국에서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 KBS에는 당시 작화실장으로 나희재씨가, 미술계장으로 김동진씨가 있었습니다. 두 분의 지도로 배웠습니다. 연속극이나 쇼의 세트를 주로 그렸는데, 지금처럼 실제 물건을 갖다 놓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그림으로 그려서 처리했던 시절이라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의 그림을 그렸죠.

: 국립극장에 오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 먼저 국립극장에 와 있던 김동진 계장이 불러 주었습니다. 1975년 광복절날 육영수 영부인 저격사건이 나고 8월 말에 여기에 왔습니다. 역시 KBS출신인 조성인씨가 당시 장치제작 책임으로 있었죠. 아무래도 두 분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죠. 작화에는 역시 KBS 출신인 박광인씨가 책임자로 있어서 같이 작업했습니다. 김동진씨가 사직한 이후 조성인씨가 미술계장으로 현재 계십니다. 조성인씨를 뒤를 이어서 정용수씨가 장치제작을 맡고 있고요. 박광인씨가 교육방송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현재 제가 작화주임으로 일하고 있죠. 제밑에는 구재하, 이성현 같은 분들이 작화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20대 초반에 국립극장에 와서 만 20년만인데, 그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 자체 프로그램은 모두 다 그렸습니다. 엄청난 수효죠.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매력을 주었습니다. 제일 큰 것은 세로 36척, 가로 86척으로 무대 뒤를 완전히 가릴 수 있죠. 큰 것은 1주일 정도, 작은 것은 3일 정도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바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잘 그려야 살아 남는다'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한 10년을 그리고 나니까 밑천이 달리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미술학원이나 미술대학 특강 혹은 미술 교수들을 찾아다녔죠. 저는 화가로서 작품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무대미술과 장치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서예, 수채화, 유화, 건축 등 온갖 그림을 다 알아야 하지요. 자연 폭 넓게 공부해야 하는 거지요. 언제나 그림개발에 힘쓰고 있습니다.

: 보통 회화는 전혀 그리지 않습니까?

: 취미로 좀 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인데 1985년 기독교 1백주년기념성화대회에「형상」이라는 예술상을 출품해서 수상한 적도 있습니다. 동양화도 좀 그렸구요. 너무 바빠서 개인 작업할 시간이 없습니다.

무대작화의 역할과 과정

: 무대작화의 역할과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 무대디자이너가 작품에 맞는 설계 혹은 그림 도면을 그려 가지고 와서 저에게 넘겨주면서 희망사항을 설명합니다. 저는 그 도면과 제 자신이 원작을 통해서 파악한 내용이나 이미지를 토대로 해서 실제 무대 크기로 혹은 모양대로 그리게 돼죠. 이런 과정에서 디자이너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많이 보강 표현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작화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무대미술은 모두 디자이너의 공로로 돌리고 있죠. 잘 된 것은 모두 디자이너의 공로이고, 잘못되면 작화담당에게로 책임이 되돌아오게 되지요. 너무 인식이 부족합니다.

: 평소에 작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십니까?

: 먼저 말한 대로 그림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관찰하고 노력합니다. 전시회에서 타인의 그림을 보거나 책에 실린 그림이나 사진을 많이 보지요. 장소와 시간과 색채의 조화문제, 물체의 모양과 색채, 계절에 따른 변화, 분위기 등을 연구해 두지요. 작품연구는 주로 대본을 가지고 합니다. 무대그림과 장치에서 색채의 조화와 분위기를 중시합니다. 아울러 의상이나 조명과 조화되도록 고려해야 합니다. 디지아너의 도면보다 수십 배 확대되는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거기서는 아이디어를 얻을 뿐, 실제로는 하나의 새로운 작업을 하게 되지요. 작화는 관객들이 볼 때 시각적으로 어떤 사실이나 분위기가 빨리 잘 느껴지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반 회화처럼 정교하고 세세한 표현이 중요한 것이 아니죠.

: 조화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 스태프진들이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까?

: 외국 극단들이 와서 하는 것을 보면, 먼저 그림에 조명을 맞추고 다음에 배우와 조명을 맞춥니다. 조명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각 스태프진들이 각기 따로 행동합니다. 스태프회의를 자주 해서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하는데 자주 할 여유도 없이 작품이 만들어지고 또 회의에 참가할 인원도 없어서, 그저 바쁘기만 합니다. 그런 관습이 빨리 정착될 수 있도록 보완해야 할 것입니다. 국립극장만 하더라도 스태프 인원이 절대 부족입니다.

: 현재 물감의 질은 어떻습니까?

: 국산수성을 사용하는데 좋은 편입니다. 70년대 초만 하더라도 물감이 엉키고 색상도 유치했지요. 공연이 끝나고 그림이나 장치를 뜯으면 접착력이 약해서 가루가 날렸습니다. 현재는 색채, 접착력, 농도 모두 양호합니다. 많이 발전했지요

: 그 큰 천을 걸어놓고 그림을 그립니까?

: 배구장 만한 마루바닥에 넓게 천을 펼쳐놓고 그림 속에 들어가서 걸어다니면서 콤프레셔로 뿜거나 롤로에 수성 페인트를 묻혀서 그립니다. 물론 정교한 부분은 붓으로 그리고요. 훈련이 잘 되어서 걸어놓고 그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바탕이 천이기 때문에 걸어놓고 그리면 색이 잘 안 묻고 흔들리게 됩니다.

: 정말 대단한 능력이군요. 외부 작품 수주도 받습니까?

: 내부 작품 준비만도 바빠서 못합니다. 대관 공연은 그들이 작품을 준비해 가지고 들어옵니다.

: 아까 부족한 인원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작업조건은 어떻습니까?

: 좋은 편입니다. 다만 현재 작업실이 좁아서 하나 더 있었으면 하는 겁니다. 장치 제작을 할 때는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펴놓을 공간이 없으니까요. 제작이 끝나고 나서야 그림을 그리게 되니 서로 쫓기게 되는 겁니다. 국립극장 정도면 현재의 제작실 공간 만한 것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작화실과 장치제작실로 나누어서 사용하게 말입니다.

작화육성방안

: 작화 분야를 육성하자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이 분야에 대한 인식이 절대 부족합니다. 일반인들은 물론 극장에 관계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극단 사람들도 이 분야의 중요성을 제대로 모르고 있지요. 앞으로 디자인을 하겠다는 젊은이들은 많아도 작화 하겠다는 사람은 없어요. 실제로 디자인보다 작화가 더 많이 필요하거든요. 무대그림 그리는 것은 물론, 장치 제작이 끝나면 전체를 다 칠해서 무대 준비를 마무리하는 사람이 작화가니까 인원이 많이 필요한데 숫자는 오히려 줄고 있어요. 젊은이들이 궂은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더욱이 수입이 불안정하다니까 뛰어들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일정하게 좋은 월급을 주면서 극장 별로, 제도적으로 전문가를 키우고 또 장래를 보장해 주어야 해요. 아무리 작품을 만들고 싶어도 작화가 없으면 무대예술은 결과가 뻔하지 않겠습니까.

: 저 역시 미처 생가하지 못했던 문젭니다. 정말 심각하군요.

: 이 분야에도 파격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문예진흥원 같은 곳에서는 무대디자인만 가르키지 말고 작화가를 힘들여 양성해야 합니다. 공공기관이 아닌 밖에서 활동하는 작화가들은 수입이 좋은 편이니까 국공립 극장에서는 점점 수준 높은 사람들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수준은 날로 떨어질 수 밖에요. 공공극장에서 작화가를 채용하자면 기능사 자격증이 필요한데, 흔히 도장공 자격자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도장공은 칠이 전문이지 무대예술적인 작화를 할 수 없지요. 별정직으로 채용하는 방법도 있기는 한데, 등급을 낮게 주니까 애시당초 응모조차 않습니다. 앞으로 전국의 국공립극장들은 다 이런 문제에 부딪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작화전문은 이 국립극장 밖에 없습니다.

: 프리랜서로 활약하는 분중에서 어떤 분들이 계십니까?

: 작화에는 나희재씨, 김동주씨, 송관우씨, 장치제작에는 양경주씨 등이 계십니다. 너무 부족합니다.

: 우리 공연예술의 발전을 위해서, 특히 무대예술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해서 앞으로 보완해야 할 점을 지적해 주십시오.

: 공연예술에 관계하시는 자문위원들이나 레퍼토리위원들부터가 무대예술분야의 중요성을 잘 알아 두셔야 합니다. 작품 선택이나 연출자, 연기자들에 대하여는 자주 신경을 쓰시는데, 무대예술에 관해서는 소홀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울러 무대예술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창작비용을 대폭 인상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저임금 노동을 시켜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현재 유능한 전문가들이 국공립극장의 작업에 불참하고 있거나, 기회만 있으면 국공립극장을 떠나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예술가들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다는 증거입니다. 다음으로 이런 국공립극장을 젊은이들의 훈련장으로, 실습장으로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강사료는 진흥기금에서 내도록 하고, 신인이나 학생들을 극장의 무대 분야에 직접 배치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실제로 하나하나 공연되는 작품을 만들어 보도록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각 지방의 극장에서 필요한 무대 요원도 이렇게 해서 훈련시키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직접 그리고 만들어 보면서 전문가로 육성하는 겁니다. 끝으로 가능한 한 스태프 회의를 자주해야 한다는 겁니다. 계획단계부터 진행단계, 그리고 완성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테프들이 작품의 조화와 통일을 위해서 계속 토론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효과적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제도화, 조직화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오늘 말씀 너무나 절실한 문제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간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