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이즘과 축제
-인도의 문화
이윤전 / 인도 네루대 박사과정
흔히 인도문화 하면 힌두이즘 Hinduism을 생각하게 하고 힌두이즘은 힌두교라는 종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힌두이즘을 단지 종교로 이해하기에는 많은 다양한 요소를 갖고 있다. 다른 종교들처럼 특정한 창시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신앙고백의 기초가 되는 경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약 오천년 전의 베다 Veda 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에 따라 여러 요소들을 수용 또는 배척하면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리스, 페르시아, 몽고족의 침입과 무갈 제국의 지배, 영국 통치 등을 거치면서 다양한 이민족의 문화가 인도 문화에 접목되었고, 현재의 인도문화의 다양성을 낳게 하였다. 즉 다양한 인종과 언어 종교 문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속에 그들 나름의 단일성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도인'이라는 정체의식 Identity일 것이다. 이 정체의식을 구체화시켜주는 그들의 생활철학이 바로 힌두이즘이라 할 수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힌두이즘은 단순한 종교라기보다는 면면히 내려오는 인도인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서로 다른 계급간에 때로는 서로 다른 종교간에 이해를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생활철학이 잘 나타나는 것이 인도인들의 축제이다. 인도인들의 축제는 거이 대부분 종교적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이것은 외피일뿐 그 내용을 살펴보면 사회적 화합의 기제임을 알 수 있다. 다음에서는 인도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크게 거행되는 두 가지의 축제-홀리Holi와 디왈리 Diwali-를 통해 인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먼저, 흘리는 기원전부터 행해 졌으나 본격적으로는 13C∼14C부터였다. 홀리의 전승적 유래는 악에 대한 선의 승리로 표현되는 홀리까 Holika의 죽음이다. 홀리까의 오빠는 히란야끼샤쁘 Hirany kasbap라는 폭정을 일삼는 왕이었는데, 이왕은 그의 아들 쁘라홀라드 Prahoad가 헌신적이고 선이 대명사로 자기에게 많은 선행은 요구하자 화형에 처하려고 한다. 화형에 처해진 쁘라홀라드를 홀리까가 그의 무릎에 앉히고 같이 죽기를 원하나 바람에 의해 쁘라홀라드는 살아나고 홀리까가 대신 죽게 된다. 이러한 유래에 의해 홀리까의 이름을 따서 이 축제의 이름을 '홀리'라 불려지게 되었다.
홀리는 인도력의 '팔군(보통 2월에서 3월사이)'의 보름날 거행되는데 기본적 축제의 형태는 축제 당일 전날 모닥불을 피워 홀리까를 가리고 당일에는 여러 가지 물감을 서로에게 던지고 농담을 주고받는다. 또 이날 아침에는 대마 생잎을 갈아 우유에 탄 '방 Bhang'이라는 음료를 나누어 마시는데 이 음료로 인하여 사람들은 약간 흥분 상태에서 이 축제를 즐기게 된다.
위의 내용과 더불어 이 축제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살펴보면, 먼저 이 축제는 봄을 맞는 축제이다. 불을 피우는 이유는 겨울 동안의 여러 기생충들과 나쁜 병균들을 박멸하기 위함이고, 물을 뿌리는 상징적 의미도 봄을 맞아 파종을 한 후 그것을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이다. 둘째로, 사회적으로 공인된 복수의 허용이다. 카스트 Caste제도 정착 이후, 차별당하고 있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농담과 격한 말들, 즉 욕설들을 퍼부으며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섯째로, 다양한 종교, 인종, 언어, 문화적 습관과는 상관없이 서로의 얼굴을 물감으로 가리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축제이다. 물론 물감놀이는 봄의 화사함에서 연유한다.
이렇듯 홀리는 다양한 인도 사회에서 동일성 Unity을 창출해 주는 인도인의 새해 첫 축제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디왈리이다. 디왈리는 인도 특히, 북인도 지역에서 가장 큰 축제이다. 이 축제의 배경 신화는 비슈누 Vishnu 신의 화신으로 불리우는 람 Rama의 신화에서 출발한다. 이 신화는 인도의 오래 된 서사시 Ramayana에 근거하는데 간략하게 살펴보면, 람은 인도 북부의 작은 나라 아요드야 Ayodhya국의 왕세자로서 왕위를 이을 위치에 있었지만 왕의 사랑하는 후궁의 시기로 인해 14년간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 중 부인인 시따 Sita가 악신인 라반 Ravana에게 납치를 당하게 되는데 람은 그의 동생 락쉬만 Lakshmana과 그를 돕는 원숭이 하누만 Hanuman과 함께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나선다. 천신만고의 역경을 무릅쓰고 결국 악신 라반을 죽이고 부인을 찾은 람과 시따 그리고 락쉬만은 14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아요드야로 돌아오게 된다. 악신인 라반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더쉐하라 Dusehra라는 축제를 행하며 디왈리 20일전이 된다. 이날은 마을마다 짚으로 된 커다란 라반의 장승을 세워놓고 불화살과 폭죽으로 이 장승을 태우게 된다. 그리고 이 람의 돌아오는 날을 밝히기 위해 인도의 각 가정에서는 등잔 Diya에 불을 켜고 축하하게 되는데서 이 축제를 디왈리라 부르게 되었다.
디왈리는 인도력 '까르띠끄(보통 10월에서 11월 사이)'의 그믐에 행해진다. 디왈리의 바로 전날은 작은 디왈리라 하여 사람들은 집안의 다섯 군데의 중요한 장소에 등불을 밝히고 부의 여신 락쉬미 lakshmi에게 경배를 드린다. 그리고 이 축제를 거행하기 전에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라임을 섞은 물로 회를 바른다. 부의 여신이 밝고 깨끗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음 디왈리 날은 집 주변을 등잔으로 밝히고 폭죽을 터뜨리면서 이날을 즐긴다. 그리고 주변 사람이나 친지들에게 건과나 인도 전통 과자를 돌린다. 또한 이날 사람들은 하누만 사원을 찾아 경배하기도 하는데 하누만은 마치 손오공과 비슷한 성격으로 람이 시따를 찾을 때 많은 도움을 준 원숭이이다.
기본적으로 디왈리는 전통 힌두 서사시에 근거한 축제이다. 디왈리의 주인공 람은 가장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인간의 모델이다. 왕으로서, 신하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가장 완벽한 인간의 전형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 축제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종교적 의미로써의 '람' 보다는 집안끼리, 이웃끼리, 또는 또래 그룹끼리의 유래의 확대, 지난 일년간의 결실을 기념하고 다가올 새해에 대한 기원과 축복이다. 폭죽을 터뜨려 떠도는 귀신들을 쫓아내고 맑은 빛으로 죽은 조상들이 찾아오는 길을 밝혀준다는 믿음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는 것이다. 지역적으로 기본적인 틀을 제외하고는 축제를 즐기는 모습에 차이가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축제의 비중이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축제들을 통해 서로가 일체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두 가지의 축제를 통해 인도의 축제가 신화에 근거하고 있지만 신화적 의미보다는 가족끼리의 화합을 이루거나 마을 사람끼리, 또는 카스트 그룹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도인들의 일상생활은 그들의 종교와 결부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 종교적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삶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다. 따라서 힌두이즘을 하나의 철학 또는 삶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인도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독립 이후 근대화 과정 속에서 대부분의 후진국들이 자신들의 전통 가치관과 문화적 가치를 잃고 급격히 서구화 되어가고 있다.
각자의 전통적인 세시풍속보다는 서구에서 전래되어 온 물질 문화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정신문화가 파괴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도에서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신화에 존재하는 신의 탄생일이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고, 먹고 입는 기본적인 문화에서 아직도 그들의 고유의 양식을 고수하고 있다.
인도의 국가기념일에 인도의 수상은 인도 전통의상을 입고 기념 연설을 한다. 인도의 장관들은 공식석상에 아주 쉽게 맨발의 차림으로 나타난다.
인도인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에 가장 좋은 선물은 인도의 전통 단 과자인 미타이 Mithai를 선물하는 것이다. 아직도 청바지와 짧은 스커트보다는 전통의상인 사리 Sari가, 비스킷보다는 미타이가, 스넥보다는 나마낀 Namakeen(인도의 전통적인 짠 과자류)이 인도인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물론 최근 외국자본과 기술 등의 도입을 추진하려는 정부의 혁신적인 경제정책과 몇 년 전과 비교하여 너무도 자유로워진 외국 공중파 매체의 유입 등에 기인한 개방화의 영향으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인도의 젊은이들의 의식-이성교제, 결혼관, 이혼, 핵가족화 등-과 옷차림에서 변화가 보여지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대가족제도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종교와 전통적인 관습 속에서 지극히 인도적인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상충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축적된 경험으로 볼 때, 여러 번 있어왔고 그때마다 그 이질문화는 인도화 되었다. 예를 들어 단일국가로는 세계 최고의 회교 인구를 가지고 있는 인도의 회교는 회교자체의 그 독특한 배타성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인도적인 면을 지니고 있는데 카스트제도의 수용이 바로 그것이다.
인도문화는 흔히 '부조화 속의 조화', '다양성 속의 단일성'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적 소산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인도 문화의 복합구조는 봉건적인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그들의 계급구조사회(Caste제도)의 농촌 등 촌락 문화의 온존이 그 바탕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근대화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 Identity을 유지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로의 그들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하겠다. 바로 이러한 조화가 인도인들의 삶의 철학이라 할 수 있는 힌두이즘의 근간이고 이 힌두이즘의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인도문화의 이해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