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미술의 입지를 모색하는 작가의 전시
-윤동천 개인전,「만화경-의미있는 사물」
김현도 / 미술평론가
고급예술을 일상생활과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요즈음 발언권을 얻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서민 대중의 일상과 무관한 순수예술의 흐름은 다분히 반민주적이라는 점이 하나의 이념적 근거가 된다. 소수의 고급취향을 만족시키는 까다로운 취미로써의 예술은 민주적 이념에 배치되는 생활양식일 것이므로 마땅히 순수예술은 어떤 식으로든 서민 대중의 미적 취향을 반영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실제로 고상한 미적 감식안을 만족시키는 뿌리깊은 고급예술의 전통은 일련의 은밀하고도 정교한 유통체계를 통해 명맥을 이어 왔다. 바꿔 말하자면 작가는 언제나 고도의 미적 감각을 습득하기 위해 피나는 훈련을 감수해 왔으며 서민 대중과 작가 사이의 미적 관심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 균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급예술의 역사성의 맥락을 이어받은 작가가 보다 서민적인 예술을 일상화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고급예술의 역사성 자체를 스스로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일에는 결국 자기부정의 고통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일에는 결국 고급예술의 역사성 자체를 스스로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일에는 결국 자기 부정의 고통이 수반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른 한 가지 방법으로써, 작가는 고상하고 난해한 고급예술의 맥락으로부터 벗어나서 대중에게 보다 쉬운 시각적 어법과 기술을 제공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우리 미술의 경우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에 걸친 이른바 민중미술이 이러한 맥락에 개입되어 있었다. 근대 서구미술의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다다의 반예술에서 전자의 경향을, 후자의 대표적 사례로써는 팝아트의 경향을 틀 수 있다). 그런데 애초의 '예술은 일상이다'라는 민주적 명제를 돌이켜 보면, 문제는 작가가 부정하려 하는 미술사에 대해서 문외한이기 때문이고 또한 서민 대중일수록 예술은 난해하고 고상한 것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의 일상화를 추구하는 작가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들이 다가가려는 관객은 쉬운 예술에 대해서도 어려운 예술에 대해서도 똑같이 거부감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는 것이다. 어려운 예술은 어렵기 때문에 서민적 정서와 동화될 수 없고 쉬운 예술은 너무 뻔해서 예술에 대한 서민의 신비감을 충족시킬 수 없다.
결국 문제는 고도의 세련을 거듭해 온 시각예술의 누적된 역사와 대중적 일상생활과의 괴리에 있으며 여전히 미적 취향을 보편화라는 명분과 무관하게 그러한 세련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예술 시스템이 존속하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 세련된 시각예술의 역사를 부인하고 공격하는 방식은 예술사에 무지한 대중의 의아함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세련된 형식을 마다하고 소박하고 전통적인 방법을 채용하는 일은 창조적인 예술성과 그 생산자로서의 작가에 대한 대중의 경의를 훼손시킨다는 점에서 작가의 입지를 스스로 위태롭게 만드는 셈이다. 따라서 '예술은 일상이다'라는 명제와 순수미술의 보편화라는 방향을 추구하려는 작가는 끊임없는 고급취향의 차별화라는 예술의 본능적 성향에 맞서는 한편, 대중을 고급화된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계몽적 역할을 아울러 수행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한편 오늘날의 대중은 대중문화라는 일상적 선전과 계몽의 무차별적 세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고급예술의 숙련을 거듭해온 순수시각 미술가들이 대중적 보편화를 추구하는 경향의 최대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하겠다. 광고를 필두로 하는 각종 상업적 응용미술의 영역은 이미 과거 고급예술의 성과들을 시각적으로 응용하는데 성공하여 있으며 대중은 그 현란하고 속도감 있는 디자인의 세계에 충분히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산업 디자인의 현장과 광고 이미지, 패션사진, 극영화의 포스터, TV광고를 포함한 시각적 서비스의 홍수 속에서 대중은 보편적인 미감의 유행에 본의 아니게 편승하게끔 되어간다.
윤동천은 이러한 시각예술의 운명을 누구보다 잘 감지하고 있는 작가 중의 하나이다. 이 점에서 그는 서민적인 주제의식을 극히 전통적인 매체로 전달하고 나서 할 일을 다했다고 믿어버리는 지난날의 현실주의 작가들과는 차이점을 보인다. 사실상 그들의 작업은 고급예술을 훈련시키는 상아탑과 전문적인 저널, 그리고 미술관과 화랑을 둘러싼-대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협소하고 한정적인-이른바 미술계 내면에만 영향을 미칠 따름이다. 결국 그러한 방식으로는 연예와 오락 또는 레저와 스포츠 등의 대중문화를 통해서 잠시 동안의 기분전환을 기대하는 대다수 서민 대중의 일상적 스케줄 속에 순수예술의 시공간은 애당초 종적이 없다.
윤동천은 순수미술의 입지를 모색하는 작가이다. 그는 끊임없이 순수미술의 사회적 의미를 성찰하고 있다. 그가 다루는 주제는 특히 미술과 사회문화적 통념과의 관계이다. 지난 7, 80년 대의 부실하고 완고한 교육윤리, 발전과 진보의 강박관념, 국가와 민족의 훌륭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간단명료한 가치관이 은근히 그리고 끈질기게 예술에 요구하는 사회적 제약들을 뒤집어 보이거나 그러한 획일적인 윤리의 이면에서 우러나오는 극히 음성적인 욕망의 그림자들을 들추어 낸다. 그는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일상적 거래들을 일상적 매체를 통해 환기시키고 그 매체들의 장력 속에서 순수미술의 좌표를 역추적한다.
가령,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선택의 기회 혹은 입장」이라는 명제를 작업을 보자. 이 작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장의 대형 사진이 한 종류를 이루고, 각각의 사진 앞에 놓인 세 개의 좌대 위에는 한 스푼, 비트, 팍스 등의 각종 일상적 시제들이 진열된다. 이 조합의 사물과 좀 거리를 두고 빨래판을 걸쳐놓은 세 개의 커다란 코발트색 플라스틱 대야가 보인다. 일차적으로, 문제는 세제와 빨래판 사이의 거리이다. 관객은 이 두 조합의 사물들을 별도로 감상할 수 있다. 말하자면 관객은 빨래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볼 수도 있고 단지 사진과 세제의 조합만을 구경하는 자리를 지나갈 수도 있다. 여기서 흑백사진과 세제의 결합은 필연적인 과제처럼 주어진다. 왜 사진 이미지와 세제의 결합이 필연적인가? 문제는 결국 사진의 이미지가 지시하는 내용으로 돌아가야만 풀린다.
첫 번째 사진은 권총이다. 이것이 장남감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이것은 흑백 필름을 통해 상징적 의미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권총의 이미지를 폭력이라는 상징적 실제로 해독할 수 있다. 같은 식이다. 두 번째 사진은 너트와 볼트를 조이는 연장이며 세 번째는 책과 노트의 이미지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두 번째에서 생산의 욕망을 세 번째에서는 지식과 정보라는 세력의 상징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어쨌거나 여기서 우리는 욕망의 힘의 유형과 일상적 세제를 결합시킨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야만 한다. 그런데 작가의 의도는 다른 곳에 또 있다. 배우에 놓인 빨래판이 문제인 것이다. 작가는 앞서의 조합을 다시금 빨래판이 놓인 새로운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결국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손수 세탁할 만한 위치에 있는가 아닌가 하는 윤리적 모의실험의 경지로 들어선다.
이처럼 윤동천이 일상적 사물을 통해 제시하는 상황들은 그렇게 난해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약간의 흥미와 끈기를 가진다면 충분히 해독할 수 있는 숨은그림찾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 주제의식의 밑바닥은 결국 우리의 정신 사나운 일상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궁극적 의문들에 연결되어 있다. 더구나 이것은 그저 순수미술의 유통을 통해서 약간의 정서적 안정을 기대하는 일반인의 상식과는 꽤 먼 거리에 놓여있다. 오히려 그것은 대중의 상식과 정서의 밑바닥에 깔린 안일한 의식을 꼬집고 그곳에 연속적인 의문부호를 붙이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결국 그의 작업의 성패는 서민 대중의 일상사를 다룬 문제의식의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충분히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 사물들은 서민 대중을 순수예술의 통로로 끌어들일 만큼 매혹적인 것인가? 설사 매혹적 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고급미술에 대한 대중의 고정관념뿐 아니라 그 고정관념을 고착화시키려는 순수예술의 유통방식, 게다가 자극적인 광고 디자인의 시각적 환경 전체의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예술을 일상으로 대중에게 돌려주는 일은 가능할 것인가. 그 일을 작가의 일상으로 삼는 것은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가.
어쩌면 윤동천은 이러한 의문점들과의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열쇠를 부단히 깎고 있다. 따라서 이번 개인전-「만화경, 의미있는 사물」(국제화랑, 5. 24∼6. 15)-에 선보인 그의 일상적 사물들을 그저 쉽게 나열된 수집품들이 아니라 그의 일상적 모험과 전투에서 훼손된 자의식의 파편, 또는 전리품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