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예술의 현장 / 연극

특징 없는 셰익스피어 읽기

-극단 한양 레퍼토리의 「한 여름 밤의 꿈」




김윤철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예술의 전당이 첫 번째 '세계 명작가 시리즈'로 기획한 '셰익스피어 연극제'가 극단 한양 레퍼토리의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막을 올렸다. 지난해 예술의 전당은 '오태석 연극제'와 '오늘의 작가' 시리즈를 기획하여 창작극의 진흥에 적잖이 기여한 게 사실이다. 이 가운데 '오늘의 작가' 시리즈는 올해에도 계속되어 이미 정복근 작 한태숙 연출로 「덕혜옹주」를 공연한 바 있다. 그러나 '오태석 연극제'와 같이 한 작가의 창작극을 위한 축제는 올해 안에 계획이 없는 것 같다. 아쉬운 일이다. 물론 극작가 층이 얕은 한국 연극의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니나 축제에 경축의 의미보다 진흥의 의미를 더 두면 굳이 계속 못할 이유가 없다. 아무래도 1년만에 번역극 시리즈로 축제의 성격을 바꾼 것은 다소 안이한 발상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세계명작가 시리즈라는 이름 아래 셰익스피어 연극제로 번역극 축제를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셰익스피어야말로 오래 전부터 전세계 공통의 연극언어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 셰익스피어 극이 매일 무대에 올라가고 있을 정도다. 4세기 전의 작가가 현대의 어느 작가보다도 더 인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첫째는 그의 극이 시대성과 지역성을 초월하는 인류보편적인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특정 시대와 특정 지역을 극의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셰익스피어는 인간에 대한 거의 신적인 통찰력을 구사하여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극복한다. 둘째 셰익스피어는 비극이건 희극이건 또는 역사극이건 모든 형식을 망라하여 다른 작가가 감히 넘볼 수 없는 뛰어난 연극성을 실현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그의 역사극을 볼 때에도 우리는 역사보다 연극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인가. 그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현대적이어서 인생을 희극적인 것과 비극적인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비극에선 희극적 가능성을, 희극에선 비극적 가능성을 오히려 더욱 강조함으로써 비극과 희극이 혼재한 인생의 모호성과 신비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셋째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인물들의 성격이 현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차용할 만큼 인간적 전형성을 갖추고 있거니와 그들을 한번 겪고 나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만큼의 강렬한 개성을 겸비하고 있어 흥미롭기 짝이 없다. 그밖에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환상, 연극과 극중극, 삶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장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해방된, 내일보다도 더 현대적인 그의 극구조 또한 셰익스피어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주요 이유가 된다. 또 있다.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비평의 이론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요즈음에는 여성해방론적 관점, 막스주의적인 관점, 신역사주의적인 관점, 정신분석학적 관점 등의 다양한 비평이론들을 도입하여 셰익스피어를 새로 읽으면서 그의 현대적인 의미들을 계속 발굴해내고 있고 이 또한 그를 즐기는 주요한 방법이 되고 있다.

셰익스피어 극을 무대에 올릴 때 이제는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무대 만들기를 시도하지 않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현대의 정치사회적인 상황에 셰익스피어의 극을 대입하거나 당대를 지배하는 정신과 정서를 통해 극의 의미를 재해석하거나, 성과 계급에 대한 의식을 통해서 극의 이념성을 강조한다거나, 시간을 현재화하고 공간을 지역화하여 개문화적 특성으로 번역한다거나, 아니면 현대의상이나 다매체를 사용하여 최소한 무대만들기를 현대화한다. 그래서 카우보이 시대를 배경으로「말괄량이 길들이기」가 공연되기도 하고, 삼바춤을 사용하여「로미오와 줄리엣」의 남미화가 시도되기도 하며, 현대병원의 수술실에서 주사기로 글로스터의 눈알을 뽑기도 하고 베이찡 오페라의 양식으로 「맥베드」가 공연되기도 하며 순전히 남자들로만 공연하는 「리어왕」이 있는 것이다.

요컨대 문화와 이념에 의거하여 셰익스피어를 새로이 읽는 시도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지 패턴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의식구조가 복잡다양한 것이 현대인의 주된 특징임을 감안할 때 위와 같은 추세는 관객들의 수용미학을 수용하는 공연미학을 개발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연극의 변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 살아 있는 배우와 살아 있는 관객 사이의 유기적인 교감에 있다고 할 때 이 현대적 무대만들기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 시대에 고전과 씨름하는 이유는 그것이 통시적 보편성과 공시적 시의성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 여름 밤의 꿈」역시 다양한 공연사를 갖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폴란드의 비평가 얀 코트의 암울한 책읽기에 영향을 받아 인간의 동물적인 에로티시즘과 이성간의 폭력성을 강조한 피터 브루크의 연출이 있다. 사실 이 극은 현대적 일기를 유혹하는 자료들을 무궁무진하게 제공해 준다. 가부장적 귄위와 정치적 권위의 위계질서, 남성과 여성의 부당한 관계 등의 정치적인 이슈로부터 사랑과 결혼의 역학관계, 인간과 제도의 충돌과 같은 사회적인 주제, 극과 극중극, 현실과 꿈의 경계를 묻는 미학적인 문제 등등.

그러나 한양 레퍼토리는 현대적 읽기를 포기하고 원작이 갖는 희극성의 부각에 이번 공연의 초점을 맞춘다. 광인과 연인과 시인을 동일시하며 삶과 예술의 관계를 복잡하게 도해한 셰익스피어의 미학적 실험보다는 철부지 연인들의 변덕스런 사랑의 이야기가 대단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읽기로 관객 앞에 펼쳐진다. 요정들은 긴장과 질투와 화해의 리듬을 통과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부부관계를 발레적인 몸짓과 양식적인 언어를 섞어가며 표현하는데 그 효과는 상식적인 비현실감일 뿐이다. 드미트리어스(김의성)과 허미아(임유영) 등 두 쌍의 젊은 연인들은 사랑에 대한 성숙한 인식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사랑을 구하고 사랑을 위해서 싸울 뿐이다. 아테네의 공작 티시어스(신용욱)와 그의 약혼녀 히폴리타(박선미)의 관계에 처음과 끝 장면 사이에 전혀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갈등과 화해를 주제로 삼는 오버론-티태니아 및 두 쌍의 젊은 연인들의 극적 행동에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피라무스와 티스비」라는 연극을 준비하고 공연하는 아테네의 노동자들 역시 각자의 직업과 신분 등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지 않은 채 환상과 현실의 무식한 구분에만 열중하여 구체적 성격 창조보다 일반적 성격묘사에 머문다. 요정의 여왕 티태니아(신정호)와 직조공 보템(이문식)의 사랑이 다소 파격적으로 그려지기는 했지만 그 정도가 미미하여 눈에 띄지 않는다. 요컨대 무대만들기 전체가 현대적 주제를 구체화하는 것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텍스트에 대한 이 일반적인 접근은 배우들의 연기를 애매하게 만들었다. 특히 요정의 왕 오버론 역의 권해효는 요정의 초자연적인 정체성을 묘사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시선은 방향 없이 허공을 헤매기 일쑤고 몸짓은 정서를 진실하게 드러내는 대신 기계적인 패턴을 반복할 뿐이다. 사실 오버론과 티태니아는 말이 요정이지 정서 패턴이나 경험의 성격상 인간과 다름이 없다. 권해효가 요정이기보다 인간이기에 힘썼더라면 보다 구체적이고 믿음이 가는 역창조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극은 흥미롭게도 여자는 사랑에 충실한 반면 남자는 불성실하게 그리고 있다. 물론 젊은 남자들이 그러는 데는 사랑의 꽃즙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극은 이 젊은이들의 무의식에 내재해 있는 배반과 폭력의 가능성을 짙게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의성과 김광주는 맹목적인 사랑을 강조할 뿐 인간속성의 어두운 이면을 제거하여 극의 의미 지평을 축소하였다. 그밖에 임유영과 구혜령, 신용욱과 박선미 등 주요 배역을 맡는 배우들도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행동의 수행에 집중하는 대신 장면의 정서를 형용사적으로 묘사하는데 급급하여 진실감을 전달하지 못했다.

한양 레퍼토리가 그 동안 예술적인 형식미를 창조하는 데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자기 표현에 기초한 진실한 역 창조에 있어서 만큼은 뚜렷한 실적을 보여왔던 것에 미루어 이번 공연은 극단 고유의 강점마저 살리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한양 레퍼토리는 이제 시대의 미학에 알맞은 보다 구체적인 연출 개념으로 성인적 읽기로 도약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