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 팽창에 기운 수동적 태도 배제를
김채현 / 무용평론가, 중앙대 교수
해방 이후 무용계의 변화
광복 50년이라 일컫는 지난 50년에 대해 우리는 평가하는 주체의 입장에서는 한편, 앞으로 50년 후에 관해서는 평가받는 대상의 입장에 서게 된다. 평가하는 자가 언젠가는 평가받는 자로 역전할 구 밖에 없는 역사의 패러독스 앞에서 지난 50년을 회고할 수만은 없다 하겠다. 이런 패러독스가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까닭이라면 지금의 춤계 상황이 차후의 밝은 전망을 쉽게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무용연구소 같은 형태로 연명하던 춤계는 이제 전국에 40군데에 달하는 대학의 학과를 통해 사람을 양성하고 있고 가뭄에 콩나듯 했던 공연은 연중 절반의 기간 만큼은 올려지고 있다. 70년대 말에만 해도 공연이 매월 한두 번 열린 것이 고작이었던 데에 비하면 근자의 상황은 확실히 괄목할 성장이고, 이를 광복 50년 동안의 실적으로 인정하는 데 인색해야 할 이유도 없다. 게다가 춤에 대해 춤은 여자나 하는 것, 춤은 이쁜 것, 춤은 사치 소모적인 것이라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던 이런저런 부정적 시각4도 해소되는 중이니 눈부신 발전으로 여길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춤계는 상당한 무기력증세를 보이고 있다. 웬만큼 큰 국제행사를 해도 반응은 시큰둥하고 무용인들 간의 대동단결심도 열려져 있지 않다. '춤의 해'에서 확인된 것처럼 작지 않은 규모의 외부 투자가 있어도 성과는 고만고만했는데, 사실 '춤의 해' 이후 무기력증은 심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 대학에서 춤을 전공해도 취업은 까마득해서 궁리해내면 춤학원 운영이고 또 가장 현실적 방편이 되고 있다. 춤 공연 현장에서도 썰렁하기 일쑤인 객석은 출연진뿐만 아니라 관객마저 움츠리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80년대 중반이래 고조되던 춤 부활의 열기는 한때의 꿈으로 애모될 뿐 더 이상 춤계의 현실적 에너지로 작용하지 않는 것 같다. 작품성도 해방 직후에 비하면 현격한 차이를 보일테지만 시대가 변했고 전세계적으로 춤이 그만큼 고품질화 되었다는 점을 구려하면 평가는 달라진다. 한마디로 작품의 완성도는 가령 일반인의 상식을 넘어서는 내용과 즐거움을 제공할 정도가 아니다. 만족스럽지 않다. 이것이 광복 50년 춤계의 현주소이다.
품앗이 구조에 기대선 춤계의 양적 팽창
80년대 후반의 춤 열기는 광복이래 초유였으나 이전처럼 동호인들 간의 품앗이 구조에 기대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90년대 들어 춤계는 다시 이전의 매너리즘으로 회귀하는 역현상의 조짐을 드러내고 있다. '춤의 해'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우리는 정부의 대대적 예술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해석하기도 하겠지만, 춤계로서는 '춤의 해'가 모처럼 맞이한 80년대 후반의 열기가 90년대 들어 동요하는 것을 정지시키고 춤이 한 계단 더 올라서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기대함직하였다. 애당초부터 시기상조론도 없지 않았고 도중하차의 우려를 동반하면서 '춤의 해'가 1년을 채우긴 했어도 그런 기대에 못 미친 채 끝났다. 심지어 그 후 춤계 지도층의 반목은 그전보다 깊어진 듯해서 광복50주년 앞날을 전망하려니 아쉬움이 더욱 크다. 이를테면 덩치만 커졌지 춤계가 다시 80년대 중반 이전으로 회귀한 느낌이다. '연극의 해', '국악의 해', '미술의 해'등에도 문제점이 없지 않았으나 여러 모로 더 열악한 춤계 현실은 그런 상대적 위안을 허락하지 않는다.
80년대 후반의 춤 열기에 대해 기대한 바는 춤계의 물량적 팽창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춤 소외 현상의 실질적인 극복이라 여겨진다. 이쁜 춤, 여자나 하는 춤, 사치스런 춤과 같은 신화에서 보다시피 광복 이후 우리 춤계가 짊어진 최대 숙원과제라면 생활과 역사로부터 유리된 춤이라는 오명을 벗기는 일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과제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여러 방안을 상정할 수 있을 터인데, 그대까지 우리 춤계가 택한 유력한 방안은 전문인 양성을 통해서 춤의 기반을 확대하고 공연의 양적 증대를 기한다는 것이었다. 60년대에 처음 대학에 무용전공 학과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80년대에 춤 공연의 양적 팽창으로 그 꽃이 피기 시작한 사실이 무용인들로 하여금 그것이 유력한 방안이자 타당한 방안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진리는 부인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실제로 있는 현실은 그 자체로는 진리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다음 시기에 이르러선 과거의 현실이 되고 과거의 진리일 따름이지 지금에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진리는 되지 못한다. 80년대 후반의 춤 열기가 전제로 했던 양적 팽창을 다시 양적으로 능가하는 공연과 무용인이 90년대 중반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열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춤계 전체가 상당히 표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양적 팽창보다 더 중요한 점이 간과되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아직도 우리 춤계가 양적 팽창의 효과에 매달리고 있다는 증거는 중고교 춤 교육이 체육 교과의 일부가 아니라 정규 교육과정으로 독립되면 춤은 생활과 가까워질 수 있고 춤계도 활성화되리라는 전망이 춤계에서 정석처럼 굳어져있다는 데서 찾아진다. 독립 교과로 대변되는 중고교 춤 교육의 정상화의 원칙에 반대할 이유도 없고 이를 위해 노력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만 그것이 춤계의 중요과제 즉 궁극적으로 춤 소외 현상을 해결하는 결정적 고리가 못된다는 점만은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말하자면 80년대 후반의 열기를 조성한 제도적 조건들은 90년대가 되어도 늘면 늘었지 줄어들 것은 아니므로 춤계가 양적 팽창이라는 형식만 잘 유지하면 질적 도약이라는 내용은 저절로 달성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안일한 논리는 광복 50년을 전후한 근래에 들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는 듯하다.
80년대 g반기는 연간 춤 공연 횟수면에서 광복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70년대의 규모를 저만치 따돌렸다. 그리고 언론의 각광을 받는 빈도수에서도 그 이전과는 도저히 비교되지 않을 만큼 잦았다. 그렇긴 해도 80년대의 춤은 광복 이후의 여느 시기와 엇비슷하게 동호인의 품앗이에 기대는 창작과 공연의 관행 속에 머무르고 있었다. 다만 80년대는 여러 제도적 장치와 그 누적 효과에 힘입어 품앗이 구조가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대된 규모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즉 80년대 후반기는 그런 장치가 좀 긴 시일에 걸쳐 만든 누적 효과를 맛보게 된 최초의 시기였던 것인데 이를 뒤집어 보면 80년대까지 우리 춤의 한계는 품앗이 구조 속에 총집결되어 왔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때의 양적 팽창기에 확보한 일반 관객을 향해 춤은 이제 별다른 유인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 확보한 관객조차 춤과 멀어져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해외에서 초빙한 발레단들이 산발적으로 관객을 확보하고 있으나 이를 우리 춤계의 순수 역량으로 해석하기에는 난점이 많다.
경제적 측면에서 춤을 만들고 구경하고 평가하는 경로를 춤 유통질서라 부를 수 있다면, 품앗이 구조는 무엇보다도 춤 유통질서에서 긴장감을 저하시킨다.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 보면 품앗이 구조 속에서 어느 무용가는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리고 호소력 있는 공감대 형성을 위해서라기보다 품앗이 구조로부터 낙오되지 않기 위해 춤을 만들게 되고 어떤 요청에 의해 출연하게 되고 관객동원에 협력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품앗이의 근본 정신이 매도될 것까지는 없고 어려운 때 나름의 순기능을 행하는 측면도 고려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품앗이 정신은 무용인들이 쉽게 의뢰하는 품앗이 구조로 '왜곡'되고 있고, 그에 따른 문제점을 누구든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타개하려는 노력은 퍽 미온적이다.
품앗이 구조는 우리 춤계가 매우 단단한 벽돌로 둘러싸여 있음을 나타낸다. 동문들끼리, 기성인들끼리, 기득권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등등 끼리끼리 연결된 품앗이 구조가 자립적 예술가를 발붙이기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작을 전반적으로 매너리즘에 빠뜨릴 위험성이 농후한 구조가 품앗이 구조인 것이다. 춤계에서 인맥과 학연의 '파벌'이 예술적 '유파'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회변화를 선도하는 주체적 의식전환 필요
지난 50년간 한국 사회는 대내적으로는 독재를 청산하는 민주화, 대외적으로는 비주체성을 물리치는 자주화를 요구하였다. 물론 민주화와 자주화는 가령 인간의 인간적 실현, 인간적인 세상의 실현과 같은 궁극 목표를 위한 과도기적 현안에 지나지 않는다. 광복 50주년의 의미는 한국 사회 전 부문에서 그런 궁극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 두 요구를 얼마나 충족시켰느냐에 다라 가늠될 것이다. 사회와 문화를 평가하는 기준을 똑같게 설정할 경우 분명 문화는 수동적이며 기계주의적 입장에 예속되고 말지만 이와는 달리 문화의 상대적 자율성은 민주화와 자주화가 우리 춤계에서도 그 동안 무용인들 앞에 전면적으로 부각되지는 않았을 망정 분명히 주요 현안이었다는 사실을 간접적 형태로 시사한다. 여기서 두 가지 물음이 제기되는데,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자주화에 춤계가 얼마나 기여했느냐의 물음 그리고 춤계 자체는 내부적으로 얼마나 민주화와 자주화를 달성했느냐의 물음이 그것들이다. 서로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 두 가지 물음 앞에서 안타깝게도 지난 50년간의 춤은 자신 있는 답을 내놓을 처지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사회를 선도하기보다 춤은 사회 변화를 뒤따라갔으며, 사회가 만든 여러 제도적장치(대학교육, 극장건립, 지원제도 등)에 기대어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삶과의 관계에서 작품들은 예외가 없지 않았다 해도 현실과 맞서는 의식, 현실을 반성하는 의식보다 현실을 인정하는 선에서 일말의 부정성이나 초월성을 제기해왔기 때문에 민주화에서나 자주화에서나 보수성을 공통점으로 한다. 그리고 춤계 내부의 민주화와 자주화 역시 단적으로 품앗이 구조의 유통 질서와 토착화되지 않은 매체 형식에서 그 성취도가 낮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난 50년간 거듭된 사회의 양대 모순은 춤계의 현상황에 대해 악영향을 끼쳐 왔다고 진단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 즉 춤이 사회에 대해 갖는 상대적 자율성 속에는 춤이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는 객체이기도 한 동시에 사회에 영향을 주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광복 반세기까지 사회와의 관계에서 춤은 주체보다는 객체의 입장을 압도적으로 강하게 드러냈으며, 그러므로 앞으로도 춤이 이런 입장을 고수하는 한 한국 사회의 양대 모순이 해결되지 않으면 춤의 발전은 아무래도 요원하다는 결론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와의 관계에서 춤이 주체의 입장과 객체의 입장을 따로따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객체의 입장이 압도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며, 이런 까닭에 두 입장 사이의 균형을 찾는 일이 향후 50년간의 과제로 보인다. 이제껏 춤계에서 형성된 기득권에 안주하는 것, 그에 안주해서 춤계의 모순을 가중시키는 것, 그럼으로써 기득권을 더 확보하는 것 등은 다반사로 재연되고 있는데 이 순환관계로부터 거리를 두는 무용인은 소수이거나 현실적 발언권이 약하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양대 모순에 편승해서 기득권을 챙기는 풍조가 일시적으로는 어느 무용인의 안녕을 보장할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모두에게 재앙을 부를 수 있다는 자각 즉 역사의식(또는 위기의식)만이 해결의 관건이라 하겠다.
자율성 이행으로 춤의 존재이유 확보
광복 이전부터 지금가지 근 1세기 동안 춤계의 구성원은 대부분 여성들이었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런 구성에는 큰 변동이 없을 것 같다. 이로부터 춤계의 한계가 원천적으로 나온다는 지적은 누누이 있어 왔는데 흔히들 남녀 성비에서 여성이 훨씬 우세하여 남성미의 춤이 드물다든가 춤 경력과 가사노동 사이의 알력이 창작에 장애가 된다든가 아니면 춤의 전개가 치밀하지 않다든가 하는 등으로 그 한계를 지적하곤 한다. 여성이 주도하는 춤계라서 그런 한계가 있다면 남성의 동참이 적극적일 경우에야 그런 한계가 없어지게 된다는 역설도 가능하다. 사실 남성미의 춤이 많고 여성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고 춤 전개가 치밀해지면 즉 우리 춤계가 성비에서 남녀 균등을 이룩할 경우 얼마간 한계를 탈피할 가능성은 분명히 있고 권장할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성비에서의 균등을 모색하기 이전에 여성 무용인이 먼저 '인간'으로서 현실에 대해 능동적 태도부터 갖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성의 지위와 관련해서 현실에 대한 주체냐 현실에 대한 객체냐 하는 논쟁은 사회 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다. 여성이 주도하는 춤계이기 때문에 춤계 여성들은 현실에 대해 주체로서 존재하고 있는가? 사실 대다수의 춤들은 여성의 관점에서 서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의 관점에 서고 있으며, 우리는 광복이래 인간으로서 자각한 여성의 춤을 얼마나 경험하였을까? 말하자면 대표적으로는 고전 발레에서 보다시피 우리 춤들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이미지에 맞서지 않아 왔기 때문에 남성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듭 추인하는 데 봉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녀 성비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계속 지배 이데올로기에 별다른 이의를 느끼지 못한다면 춤은 현실에 대해 객체의 위치를 고수하게 될 공산이 크다.
현재 우리 춤에서 남성미를 강조하는 이유가 춤의 여성화에 대한 반작용이면 모르지만, 남성 지배이데올로기에 따른 남성미라면 강조되지 말아야 한다. 여성이 창작에 전념하는 방향으로 환경의 개선이 필요하더라도 남성 지배이데올로기 테두리 내에서라면 찬동할 수 없다. 춤의 전개가 내포한 현실을 외면할 경우 명분을 잃는다.
따라서 광복 50년 이후 우리 춤계는 사회 현실에 대한 입장부터 다시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여태껏 사회로부터 조성된 여건에 힘입어 양적 팽창을 기하였고 무용인에 따라서는 일부 기득권을 누리며 또 기득권에 편입되려는 무용인이 적지 않을 줄로 알지만, 그 결과가 긍정적이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더욱이 이제부터 지구촌 국제화 the globalization로 인해 전면 가시화될 국경선 붕괴, 문화 개방, 매체의 다극화는 현재와 같은 춤계 시스템이 지구촌 국제화를 감당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할 것임을 강하게 예고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춤계 시스템과 무용인의 관점, 두 측면에서의 대전환 곧 춤계 역량을 결집해서 춤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대전환이 요청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대전환기에 즈음하여 춤계 구성원들은 능동적인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모순된 사회가 제공하는 열매는 일정 부분 모순성을 띤다. 이 열매에 안주하는 것은 그 모순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모순의 시정은 능동적 자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대전환의 전제가 되는 능동적 자세는 이제까지 몸담아 왔던 사회적 관계를 반성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런 뜻에서 광복이래 50년간 춤계의 관행처럼 굳어진 객체의 모습으로부터 주체의 모습으로 대사회적 위상을 재조정해 나간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의무라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정치적으로 억압적이어서, 문화적으로 부족해서 춤추기도 여의치 않은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 웬만큼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가능성을 소홀히 한 채 춤계가 아직도 품앗이 구조에 맴돈다는 사실은 확실히 광복 50주년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인간 해방, 여성 해방, 민족 통일,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유지, 생명환경 보전, 전자문명의 통제와 같이 지금 이 순간에도 쉴틈없이 던져지는 주요 현안들에 대해 우리 춤이 대처하는 방안은 과연 무엇인가?
춤의 존재이유를 거시적으로 보는 역사의식이 절실하다
춤 지원제도의 정착, 춤 교육기관의 설치, 춤 인구의 증가처럼 해방 당시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외형적 발전상은 그만큼 문제점도 많이 안고 있다. 이런 문제점이 우리 사회의 모순에서 기인했다고 할지언정 전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상대적 자율성은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춤계는 외형적 발전상에 주목하는 대신 상대적 자율성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춤이 사회와 유리되었던 점 또한 상대적 자율성을 올바로 파악하지 않은 소치이다. 아무튼 춤계는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주체로 일어서는 데 활용해야 할 것이고, 현재의 춤계 관행들로써는 차후의 50년을 맞이하려면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재차 직시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춤은 역사와 일상 속의 생명의 실현이라는 명제 아래 우리 춤계가 춤의 존재 이유를 거시적으로 보는 역사의식이 절실해진다. 그렇다면 품앗이 구조를 극복하는데 따르는 아픔 또한 1945년과 2045년의 중간에 선 무용인들의 숙명이라면 과장된 표현일까?